울다 지친 모습의 솔체꽃
김 재 황
높은 산으로 올라가면, 쉽게 만나지 못하던 꽃들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얼마나 반가운지, 왈칵 눈물이 솟습니다.
몇 년 전, 강원도 지방의 민통선 북방 지역을 탐방하다가, 나는 우연히 솔체꽃을 상면하였습니다. 엷은 하늘빛 입술을 달싹거리며 무엇인가 하소연하려는 듯이 다가오는 그 모습에, 나는 그만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연민의 정을 느꼈습니다. 꽃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 때의 내 심정을 짐작할 수 있을 겝니다.
솔체꽃은 체꽃들 중에서도 특히 잎이 가늘게 찢어지는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아픔을 지녔으면서도 햇볕이 잘 드는 밝은 자리를 좋아합니다. 더군다나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겨울을 넘기는 두해살이 풀입니다.
키가 작으면 30Cm밖에 안 되기도 하지만, 보통은 90Cm까지 크게 자랍니다. 그러므로 쓰러져 있는 경우를 보게 될 때가 흔하지요. 그 몸 또한 여린 모습이어서 잔털이 많은데, 꼬부라지기도 하고 퍼지기도 합니다.
잎은 마주 납니다. 뿌리에서 돋는 잎과 줄기에서 돋는 잎이 있습니다. 밑의 뿌리잎은 긴 잎꼭지를 지녔으며, 달걀 모양의 길둥근꼴입니다. 그 반면에 위의 줄기잎은 알 모양의 길둥근꼴이지만, 위로 올라갈수록 그 조각이 가늘게 깃 모양으로 깊게 갈라집니다. 포엽은 줄꼴이고 밋밋한 형태를 지닙니다. 뿌리잎은 꽃이 필 때는 없어지지요.
8월 경에, 엷은 청자색 두상화(頭狀花)가 줄기끝에서 얼굴을 내밉니다. 가운데의 꽃은 통 모양이고 작으나, 주위의 꽃은 큽니다. 꽃부리는 위와 아래, 둘로 갈라집니다. 그리고 다시 위의 것은 2개로, 아래의 것은 3개로 깊게 갈라집니다. 수술은 4개가 있습니다. 꽃부리의 기부에는 꽃받침 역할을 하는 너더댓 개의 가시가 돋습니다. 열매는 수과(瘦果)로서, 포(苞)에 싸인 형태로 바람에 날려서 여행을 떠납니다.
솔체꽃은 우리나라 중부 이북에서부터 만주 등지에까지 분포합니다. 우리나라에는 솔체꽃을 비롯해서, 줄기가 약간 빳빳한 ‘체꽃’, 키가 작은 ‘구름체꽃’, 털이 없는 ‘민둥체꽃’ 등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외국에도 체꽃 종류는 있습니다. 알프스 지방에는 다음과 같은, 체꽃에 얽힌 전설이 전해집니다.
옛날, 알프스산의 깊은 산 속에 마음 착한 한 님프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 이름은 ‘피이챠’라고 했지요. 그녀는 늘 숲속을 이 곳 저 곳 말괄량이처럼 뛰어다니며 노는 듯이 보였는데, 실상은 약으로 쓸 꽃들을 따다가 모으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피이챠가 약초를 뜯어다가 맑은 개울물에서 씻고 있을 때였습니다. 어디서인가 한 양치기 소년이 비틀거리며 다가오더니, 그녀 앞에서 힘없이 쓰러졌습니다. 그 당시에 그 곳 인근의 마을에서는 몹쓸 돌림병이 돌고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 가고 있다고 소문이 떠돌 때였으므로, 그녀는 금방 그 양치기 소년이 돌림병에 걸렸음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피이챠는, 마침 그 돌림병을 고치는 약초를 캐어서 씻고 있던 중이었기에, 지체하지 않고 그 약초로 양치기 소년의 등과 앞가슴을 문질러서 얼마 만에 병이 낫게 하였습니다. 양치기 소년이 피이챠에게 말했습니다.
“제 목숨을 살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부탁 드릴 게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병이 나았지만, 저희 동네에는 아직도 돌림병에 걸려서 신음하고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니 그 약초를 저에게 조금만 나누어 주십시오.”
피이챠는 양치기 소년의 착한 마음씨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의 얼굴마저 꽃처럼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아, 그 양치기 소년이야말로 꿈마다 자신이 그리던 바로 그 얼굴이 아닌가요. 피이챠는 선뜻 그가 지니고 있던 약초를 모두 그에게 건네어 주었습니다. 양치기 소년은 그 약초를 받아들자, 바람처럼 마을로 달려 내려갔습니다.
그 후로, 피이챠는 은근히 그 양치기 소년이 자기를 찾아와 주기를 낮이나 밤이나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그 양치기 소년은 좀처럼 그녀 앞에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양치기 소년이 젊은이가 되어 피이챠를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천만 뜻밖이었지요. 그의 곁에는 아름다운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피이챠에게 말했습니다.
“저번에 약초를 제게 주셔서 참으로 고맙습니다. 그 약초로 이 사람의 목숨을 구하게 되었으며, 그 인연으로 우리 두 사람이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모두가 당신의 덕분입니다.”
두 사람은 정중히 인사를 하고 돌아갔습니다. 피이챠는 그들이 떠나고 나자, 눈물이 쉴새없이 쏟아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며칠 동안을 울기만 하다가, 그녀는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얼마의 세월이 흘렀을까요, 피이챠가 묻힌 무덤 가에 그녀를 닮은 아름다운 꽃이 피어났습니다. 그 꽃이 바로 ‘체꽃’입니다.
이러한 전설 때문에, 체꽃의 꽃말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지요. 아, 그렇습니다. 그렇기에 솔체꽃 또한 울다가 지친 모습으로 나에게로 다가왔습니다. 나는 달려가서 품에 안아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