뽑은 시조 321

숲 아침/ 김 재 황

숲 아침 김 재 황 산새들 잰 울음에 단풍잎이 젖어 있다, 멀찍이 기지개를 몰고 가는 산 메아리 간밤엔 마루턱 너머 풍악 소리 잦더니. 이슬로 눈물 빚는 별자리를 짚어 보면 들리듯 고운 음성 긴 빛으로 내려앉고 잎사귀 사이사이에 하늘 보는 뭇 얼굴. 문 열린 골짝마다 물소리를 묻는 샘터 고뇌도 산과의 맛 깊은 연륜 새겼어도 먼동이 일군 고요에 불이 붙는 갈채여. (1988년)

뽑은 시조 2022.03.29

눈사람을 만들자/ 김 재 황

눈사람을 만들자 김 재 황 하늘이 추위 안에 참았던 숨 뿜고 나니 산과 들 새하얗게 고운 눈이 빛을 내고 저 멀리 꿈꿀 수 있는 마음들을 부른다. 아이는 손을 호호 작은 머리 빚어 놓고 아비는 땀을 뻘뻘 더욱 크게 둥그런 몸 잘 쌓은 그 머리와 몸 이리저리 살핀다. 좀 삭은 나뭇가지 주워 가니 옳지 양팔 눈썹은 저 잔솔로 눈 코 입을 참숯으로 갖출 것 거의 다 되고 웃음보만 남았다. (2021년)

뽑은 시조 2022.03.29

칡/ 김 재 황

칡 김 재 황 뿌리가 튼튼해야 그 줄기가 힘 있음을 배우지 않았다고 모를 리는 없을 테지, 골짝을 끌며 오르는 덩굴나무 널 본다. 셋이서 함께 가니 잎들이야 안 외롭고 떳떳이 하늘 높이 치켜드는 자줏빛 꽃 속껍질 질긴 이름을 가슴으로 또 왼다. 우리가 어렵사리 얻은 길을 어찌 갈까 끝날 때 덧없다고 가슴 치지 않으려면 이 목숨 저리 뜨겁게 불태우고 떠나리. (2021년)

뽑은 시조 2022.03.28

해녀 스케치/ 김 재 황

해녀 스케치 김 재 황 물결이 치는 곳에 묵정밭은 열려 있고 봉돌을 두른 만큼 보라성게 줍고 나면 참았던 숨결 소리로 하늘 밖도 쓸린다. 산호 숲 사이에서 물고기는 춤을 빚고 오리발 놀린 터에 바다거북 내미는 손 쑤시던 두 무릎까지 씻은 듯이 낫는다. 나이야 팔순 고개 어느 틈에 넘겼어도 물질한 깊이 따라 가사리 꿈 펼치는데 끝끝내 쪽빛 그 길이 동그랗게 보인다. (2021년)

뽑은 시조 2022.03.28

해당화 노래/ 김 재 황

해당화 노래 김 재 황 바다를 끌며 죄며 기다림은 길고 먼데 갈매기 빈 날개를 지닌 이는 누구인가, 연거푸 파도 소리가 푸른 귀를 때린다. 못 보면 그리움에 가시들이 돋는 것을 스스로 마구 찌른 서러움도 젖는 것을 흰 꿈에 더운 핏빛이 떨어져서 떨린다. 가슴이 온 바다를 끌어안게 되는 그날 저녁놀 진 다음에 남은 자리 쓰라리고 뺨보다 아픔 멍울만 둥근 무게 실린다. (2021년)

뽑은 시조 2022.03.27

목멱산을 오르며/ 김 재 황

목멱산을 오르며 김 재 황 몸보다 마음으로 더딘 걸음 옮겨 가면 멀찍이 도는 둘레 가벼운 길 나타나고 빛 붉게 팥배나무가 더운 열매 내뵌다. 잎들도 물이 드니 사람마다 입 벌리고 다람쥐 한 마리가 바쁜 손을 놀리는데 피 묻은 담쟁이덩굴 험한 바위 오른다. 어디쯤 봉수대가 퀭한 눈을 뜨고 있나, 언덕에 오른 솔은 근심으로 등이 휘고 더 높이 서울타워만 긴 발돋움 지킨다. (2021년)

뽑은 시조 2022.03.27

만다라/ 김 재 황

만다라 김 재 황 깨달음 찾으려고 절로 가는 사람 많지 어떻게 오직 그게 거기에만 있는 건가, 불현듯 얻고 싶거든 끊임없이 또 묻게. 병에다 넣은 새를 키우고서 어찌 빼나, 부처가 되려는 것 깊을수록 헤매게 돼 차라리 병을 없애면 갇힌 새도 없도다. 연못에 꽃이 피면 바로 연꽃 아니던가, 화두가 말뚝인 줄 알고 나니 우습구나, 쉬다니 무슨 말이냐 걷는 길만 있다네. (2022년)

뽑은 시조 2022.03.27

도요새/ 김 재 황

도요새 김 재 황 귀 닳게 묻는다면 아버지가 좋아한 새 떠나온 이북 땅인 통천에서 보던 모습 하늘에 새카맣게 뜬 비상의 꿈 그린다. 머나먼 지역에서 때에 따라 찾는 철새 텃새인 참새보다 조금 큰데 볼품 적고 부리는 제법 길지만 지닌 꽁진 짧다네. 쉽사리 볼 수 있던 섬진강이 흐려졌나, 지금은 어렵사리 보게 되니 그게 문제 이 새가 날지 않으면 목마름에 괴롭네. (2022년)

뽑은 시조 2022.03.26

장수하늘소/ 김 재 황

장수하늘소 김 재 황 아무도 알지 못할 어둠만을 지닌 전생 하늘로 구부러진 턱을 지닌 까닭 뭔가, 창 막듯 작은방패판 노란 털로 덮인다. 몸 아래 번드르르 녹색을 띤 갈색인데 잘 태운 구릿빛을 짙게 바른 딱지날개 이만큼 생김 갖추면 모든 이가 높인다. 송곳을 숨긴다고 머리 삐죽 안 내밀까, 많은 닭 모인 곳에 학이라면 어떠할까, 더 오래 천연기념물 살아 주기 바란다. (2022년)

뽑은 시조 2022.03.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