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고시조 감상 419

올여논 물 시러 두고/ 이 정 보

414. 올여논 물 시러 두고/ 이 정 보 [원본] 올여논 물 시러 두고 綿花 밧 매오리라울맷틔 외를 따고 보리 능거 點心하소 뒷 집에 술닉어거든 차자남아 가져 오새.   [역본] 올벼 논에 물을 대고 목화 밭은 매야 하리울 밑에서 오이 따고 보리 찧어 잠심 마련뒷집에 찌꺼기 술이라도 얻어 오면 좋겠소.   [감상]   이정보(李鼎輔 1693~ 1766)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연안(延安), 자(字)는 ‘사수’(士受)이고 호(號)는 ‘삼주’(三洲) 또는 ‘보객정’(報客亭)이라고 한다. 1721년 진사과에 합격하고 1732년 정시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을 시작으로 몇 직책을 거치고 만년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사대부 시조작가로서 시조의 주축을 평민층으로 옮기는 ..

곳 피면 달 생각하고/ 이 정 보

413. 곳 피면 달 생각하고/ 이 정 보 [원본] 곳 피면 달 생각하고 달 발그면 술생각하고곳 픠쟈 달 밝쟈 술 어듸면 벗 생각하니언제면 곳 아래 벗 다리고 翫月長醉하려뇨.   [역본] 꽃 피면 달 바라고 달 밝으면 술 챙기고꽃 피고 달 오르고 술 얻으면 벗 떠올리네언제면 꽃과 벗 함께 달을 보며 취하려나.   [감상]   이정보(李鼎輔 1693~ 1766)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연안(延安), 자(字)는 ‘사수’(士受)이고 호(號)는 ‘삼주’(三洲) 또는 ‘보객정’(報客亭)이라고 한다. 1721년 진사과에 합격하고 1732년 정시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을 시작으로 몇 직책을 거치고 만년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사대부 시조작가로서 시조의 주축을 평민층으로 옮..

뭇노라 부나븨야/ 이 정 보

412. 뭇노라 부나븨야/ 이 정 보 [원본] 뭇노라 부나븨야 네 뜻을 내 몰래라한나븨 죽은後에 또한나븨 딸아온이암을이 프새옛 즘생인들 너죽을줄 모르는다.   [역본] 묻노라 불나방아 네 뜻을 난 모르겠다한 나비 죽은 후에 또 한 나비 따라오니아무리 풀 벌레라도 너 죽는 줄 모르냐.   [감상]   이정보(李鼎輔 1693~ 1766)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연안(延安), 자(字)는 ‘사수’(士受)이고 호(號)는 ‘삼주’(三洲) 또는 ‘보객정’(報客亭)이라고 한다. 1721년 진사과에 합격하고 1732년 정시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을 시작으로 몇 직책을 거치고 만년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사대부 시조작가로서 시조의 주축을 평민층으로 옮기는 데 일조를 했다는 평가..

海東國 三千里에/ 정 형 석

311. 海東國 三千里에/ 정 형 석 [원본] 海東國 三千里에 許多한 바위로다風磨 雨洗하면 어내 돌이 안 變하리그中에 一片義岩언 萬古不變 하리라.    [역본] 삼천리 이 나라에 많고 많은 바위구나바람 갈고 비 씻으면 어느 돌이 안 바뀔까그 중에 의로운 바위는 오래 가도 그대로.   [감상]   정현석(鄭顯奭 1817년 ~1899년)은 조선 말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초계(草溪)이고 자(字)는 ‘보여’(保汝)라고 하는데 호(號)는 ‘박원’(璞園)으로 알려져 있다. 동중추부사인 정홍관(鄭鴻觀)의 손자이며 필선 정기화(鄭琦和)의 아들이다. 고종조 때 진주목사를 비롯하여 덕원부사 및 한성부좌윤, 호조참판, 황해도관찰사를 지냈다. 그는 후릉참봉을 시작으로 3조 5부의 내직을 두루 거치고 10군의 수령을 역임하는 ..

구버난 千尋綠水/ 신 지

310. 구버난 千尋綠水/ 신 지 [원본] 구버난 千尋綠水 앙대하니 萬尺丹崖丹崖에 紅花發이오 綠水에 白鷗飛라紅花發 白鷗飛하니 閒興계워 하노라.    [역본] 굽어보면 깊푸른 물, 위로 보면 높은 언덕긴 벼랑에 핀 붉은 꽃 푸른 물에 흰 갈매기저마다 제 빛 보이니 한가롭고 즐겁다.    [감상]   신지(申墀 1706~ 1780)는 영조와 정조 때의 문인이다. 자(字)는 ‘백첨’(伯瞻)이고 호(號)는 ‘반구옹’(伴鷗翁)이라고 한다.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했으나 번번이 낙방하고, 말년에 고향으로 내려가서 ‘반구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여생을 보냈다고 전한다. 그의 문집인 ‘반구옹유사’(伴鷗翁遺事)에 시조 14수가 있다. 초장을 본다. ‘구버난’은 ‘굽어보면’이고, ‘천심록수’는 ‘천 길이아 되는 깊고 푸른 물..

田園에 나믄 興을/ 김 천 택

309. 田園에 나믄 興을/ 김 천 택 [원본] 田園에 나믄 興을 전나귀에 모도 싯고 溪山 니근 길로 흥치며 도라와셔아희야 琴書를 다스려라 나믄 해를 보내리라.   [역본] 시골에 남은 재미 모두 싣네 저는 나귀산 내에 익힌 길로 흔들흔들 돌아와서아이야 악기와 책 챙겨라, 남은 해에 쓰겠다.   [감상]   김천택(金天澤)은 시조작가 및 가인(歌人)으로 생몰년대가 밝혀지지 않았다. 그의 자(字)는 ‘백함’(伯涵) 또는 ‘이숙’(履叔)이고 호(號)는 ‘남파’(南坡)이다. 숙종 때에 포교를 지냈다고도 한다. “사람됨이 총명하고 유식하며 능히 시경>을 알고 외워서 한갓 가객이 아니었다.”라는 평을 듣는다. ‘경정산가단’(敬亭山歌壇)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는데, 일종의 사설 음악 연구소로써 그 문하에서 많은 가객이..

野渡 一片舟난/ 김 우 굉

408. 野渡 一片舟난/ 김 우 굉 [원본] 野渡 一片舟난 멷 사람 건네노라가난 닷 오난 닷 쉴 적 업시 단니다가븬 배예 明月을 싯고 절로 汎汎하나니.   [역본] 나루터 작은 배는 몇 사람을 건넸는기가자마자 오자마자 쉬지 않고 다니다가빈 배에 발은 달 싣고 자기 홀로 두둥실.   [감상]   김우굉(金宇宏1524~ 1590)은 조선 중기의 문인으로 경상북도 성주(星州) 출신이다. 본관은 의성(義城)인데 자(字)는 경부(敬夫)이며 호는 개암(開岩)이다. 중종 37년에 향시 수석 합격하였고, 1566년 별시문과에 급제해 예문관검열이 되었으며, 여러 관직을 거친 뒤에 1578년 사복시정을 거쳐 동부승지 및 대사성 등을 지내고 이듬해 병조참의 및 승지에 이르렀으나, 이수의 옥사로 파직되었으며, 60세 때 홍문..

遠山에 비 거든 後/ 김 우 굉

407. 遠山에 비 거든 後/ 김 우 굉 [원본] 遠山에 비 거든 後 前江이 살진 져긔一片 苔磯에 낫대을 빗기 들고몰래라 富春山 釣臺 이러턴동 마던동   [역본] 먼 산에 비 개이고 앞 강물이 불어난 때이끼낀 돌조각에 낚싯대를 비스듬히모른다, 부춘산 낚시터 이러한지 아닌지.   [감상]   김우굉(金宇宏1524~ 1590)은 조선 중기의 문인으로 경상북도 성주(星州) 출신이다. 본관은 의성(義城)인데 자(字)는 경부(敬夫)이며 호는 개암(開岩)이다. 중종 37년에 향시 수석 합격하였고, 1566년 별시문과에 급제해 예문관검열이 되었으며, 여러 관직을 거친 뒤에 1578년 사복시정을 거쳐 동부승지 및 대사성 등을 지내고 이듬해 병조참의 및 승지에 이르렀으나, 이수의 옥사로 파직되었으며, 60세 때 홍문관 ..

突巖은 諺傳이오/ 김 우 굉

406. 突巖은 諺傳이오/ 김 우 굉 [원본] 突巖은 諺傳이오 鰲臺난 뉘 지은고나난 닐오대 龜巖이라 하노니 落龜 呈瑞하니 네 긘가 하노라.   [역본] 내민 바윈 퍼뜨린 말, 자라 누댄 누가 지어?바로 내가 이를 두고 이르기를 거북바위물 흘려, 길조를 바쳤다니 네가 맞나 싶구나.    [김상]   김우굉(金宇宏1524~ 1590)은 조선 중기의 문인으로 경상북도 성주(星州) 출신이다. 본관은 의성(義城)인데 자(字)는 경부(敬夫)이며 호는 개암(開岩)이다. 중종 37년에 향시 수석 합격하였고, 1566년 별시문과에 급제해 예문관검열이 되었으며, 여러 관직을 거친 뒤에 1578년 사복시정을 거쳐 동부승지 및 대사성 등을 지내고 이듬해 병조참의 및 승지에 이르렀으나, 이수의 옥사로 파직되었으며, 60세 때 ..

鰲臺邊 玉柱峯을/ 김 우 굉

405. 鰲臺邊 玉柱峯을/ 김 우 굉 [원본] 鰲臺邊 玉柱峯을 언니 年에 갓가셴고亭亭 疊疊하여 壁立 萬仞 하엿꼬나만일에 天柱옷 것거지면 네 바칠가 하노라.   [역본] 자라 대 옆 옥주봉은 어느 해에 세웠는가우뚝 솟고 겹이 여럿 깎은 벼랑 만 길 높이만일에 하늘 기둥 꺾이면 받칠 넌가 한단다.   [감상]   김우굉(金宇宏1524~ 1590)은 조선 중기의 문인으로 경상북도 성주(星州) 출신이다. 본관은 의성(義城)인데 자(字)는 경부(敬夫)이며 호는 개암(開岩)이다. 중종 37년에 향시 수석 합격하였고, 1566년 별시문과에 급제해 예문관검열이 되었으며, 여러 관직을 거친 뒤에 1578년 사복시정을 거쳐 동부승지 및 대사성 등을 지내고 이듬해 병조참의 및 승지에 이르렀으나, 이수의 옥사로 파직되었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