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고시조 감상 419

갈길이 머다하나/ 작가 미상

384. 갈길이 머다하나/ 작가 미상 [원본] 갈길이 머다하나 져 재 너머 내집이라 細路松林의 달이 조차 더다 온다 갓득이 글먹는 나귀를 모라 무슴하리. [역본] 갈 길이 멀다 하나 고개 너머 내집이다 그 솔숲 좁은 길에 달이 또한 돋는구나 제대로 못 먹인 당나귀 몰아 가서 되겠냐. [감상] 초장을 본다. 어디 먼 곳을 다녀오고 있는 중인가 보다. 갈 길이 멀다고 여겨서 일찍부터 서둘러 온 것 같은데, 이제는 고개 너머에 작가의 집이 있단다. 이는, 자기 집에 거의 도달했다는 뜻을 지닌다. 참 많이도 걸었겠으므로 피곤할 때도 되었다. 하자먼 집이 가까워졌다는 생각에 새로 힘도 솟았을 것 같다. 중장을 본다. ‘세로송림’은 ‘소나무 숲 사이로 난 오솔길’을 말한다. 그래서 나는 ‘그 솔숲 좁은 길에’라고 ..

재너머 成勸農집의/ 정 철

383. 재너머 成勸農집의/ 정 철 [원본] 재너머 成勸農집의 술닉닷말 어제 듯고 누은 쇼 발로 박차 언치 노하 지즐타고 아해야 네 勸農 겨시냐 鄭座首 왓다 하여라. [역본] 고개 너머 권농 집에 술 익었단 말을 어제 누운 소 일으켜서 털 헝겊만 눌러 타고 아이야 네 어른 계시냐 내가 왔다 하여라. [감상] 정철(鄭澈 1536~ 1593)은 조선 중기의 문인이며 문신이다. 본관은 연일(延日), 자(字)는 ‘계함’(季涵)이고 호(號)는 ‘송강’(松江)이다. 1561년에 진사시에 1등을 하고 이듬해에는 문과 별시에 장원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여러 관직을 지내고, 45세 때에 강원도관찰사가 되었을 때 가사문학의 대가로서의 기질을 발휘했다고 한다. 그 후 55세 때는 좌의정에 올랐고 인성부원군(寅城府院君)에..

대우해 심근 느티/ 정 철

382. 대우해 심근 느티/ 정 철 [원본] 대우해 심근 느티 몃해나 자란난고 씨디여난 휘초리 저거티 늙도록애 그제야 또 한잔 자바 다시 獻壽 하리라. [역본] 높이 심은 느티나무, 몇 해나 자랐을까 씨 뿌려 난 나뭇가지 저와 같이 살도록 해 그때야 또 한 잔 잡아 장수 술잔 올리리. [감상] 정철(鄭澈 1536~ 1593)은 조선 중기의 문인이며 문신이다. 본관은 연일(延日), 자(字)는 ‘계함’(季涵)이고 호(號)는 ‘송강’(松江)이다. 1561년에 진사시에 1등을 하고 이듬해에는 문과 별시에 장원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여러 관직을 지내고, 45세 때에 강원도관찰사가 되었을 때 가사문학의 대가로서의 기질을 발휘했다고 한다. 그 후 55세 때는 좌의정에 올랐고 인성부원군(寅城府院君)에 봉하여졌다. ..

이몸 허러내여/ 정 철

381. 이몸 허러내여/ 정 철 [원본] 이몸 허러내여 낸믈의 띄오고져 이믈이 우러녜여 한강 여흘 되다하면 그제야 님그린 내 병이 헐할법도 잇나니. [역본] 이 몸을 조각조각 냇물에 띄워 보자 이 물이 울고 가서 큰 강 여울 되고 나면 그 때야 임 그린 내 병 나을 수도 있으니. [감상] 정철(鄭澈 1536~ 1593)은 조선 중기의 문인이며 문신이다. 본관은 연일(延日), 자(字)는 ‘계함’(季涵)이고 호(號)는 ‘송강’(松江)이다. 1561년에 진사시에 1등을 하고 이듬해에는 문과 별시에 장원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여러 관직을 지내고, 45세 때에 강원도관찰사가 되었을 때 가사문학의 대가로서의 기질을 발휘했다고 한다. 그 후 55세 때는 좌의정에 올랐고 인성부원군(寅城府院君)에 봉하여졌다. 초장을..

이려도 太平聖代/ 성 수 침

380. 이려도 太平聖代/ 성 수 침 [원본] 이려도 太平聖代 저려도 聖代太平 요지일월이요 순지건곤이로다 우리도 태평성대에 놀고가려 하노라. [역본] 여기도 좋은 시대 저기도 어진 평안 요 임금 그 세월에 순 임금 바른 세상 우리도 좋은 시대에 놀고 갈까 한단다. [감상] 성수침(成守琛 1493~ 1564)은 중종과 명종 때의 학자이다. 자(字)는 ‘중옥’(仲玉)이고 호(號)는 ‘청송’(聽松) 또는 ‘죽우당’(竹雨堂) 등이라고 한다. 기묘사화로 스승인 조광조가 처형되고 선비들이 화를 당하게 되자, 밖으로 나가지 않고 학문에만 몰두했다고 한다. 49살 때에 후릉 참봉이나 주부 및 현감 등의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명리를 초개같이 여겼으며 매우 효성스러웠다고 알려져 있다. 초장을 본다. ‘이려도..

榮辱이 並行하니/ 김 천 택

379. 榮辱이 並行하니/ 김 천 택 [원본] 榮辱이 並行하니 富貴도 不關터라 第一江山에 내혼자 님자되야 夕陽에 낙싯대 두러메고 오명가명 하리라. [역본] 명예 치욕 함께 가니 부자 귀함 상관없다 첫째가는 그 강산에 내가 혼자 임자 되어 저물녘 긴 낚싯대 메고 오고 가고 하겠다. [역본] 김천택(金天澤)은 시조작가 및 가인(歌人)으로 생몰년대가 밝혀지지 않았다. 그의 자(字)는 ‘백함’(伯涵) 또는 ‘이숙’(履叔)이고 호(號)는 ‘남파’(南坡)이다. 숙종 때에 포교를 지냈다고도 한다. “사람됨이 총명하고 유식하며 능히 을 알고 외워서 한갓 가객이 아니었다.”라는 평을 듣는다. ‘경정산가단’(敬亭山歌壇)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는데, 일종의 사설 음악 연구소로써 그 문하에서 많은 가객이 배출됐다. 초장을 본다...

東風이 건듯부니/ 윤 선 도

378. 東風이 건듯부니/ 윤 선 도 [원본] 東風이 건듯부니 믉결이 고이닌다 東湖를 도라보며 西湖로 가쟈스라 두어라 압뫼히 지나가고 뒷뫼히 나아온다. [역본] 샛바람 잠깐 부니 고운 물결 일어난다 동쪽 호수 돌아보며 서쪽 호수 찾아가자 앞산은 차츰 지나고 저 뒷산이 다가온다. [감상] 윤선도(尹善道 1587~ 1671)는 조선시대의 중기와 후기의 문신이자 작가 및 음악가이다. 여러 관직을 거친 후, 보길도(甫吉島)에 은거하였고, 그 때 보길도를 배경으로 ‘어부사시사’를 지었다고 전한다. 또, 양주의 고산(孤山)에 은거하기도 했으며, 1657년 동부승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일생 중 여러 번 파직 및 유배를 겪었다. 이 작품은 ‘어부사시사’ 중 ‘춘사(春詞) 제3’이다. 초장을 본다. ‘동풍’은 ‘’봄바람..

비오는대 들희가랴/ 윤 선 도

377. 비오는대 들희가랴/ 윤 선 도 [원본] 비오는대 들희가랴 사립닷고 쇼머겨라 마히 매양이랴 장기연장 다사려라 쉬다가 개난 날 보아 사래 긴 밧 가라라. [역본] 비 오니 들에 갈까 문 닫고 소 먹여라 장마라고 안 그칠까 쟁기 등을 손질해라 쉬다가 비가 개거든 이랑 긴 밭 갈아라. [감상] 윤선도(尹善道 1587~ 1671)는 조선시대의 중기와 후기의 문신이자 작가 및 음악가이다. 여러 관직을 거친 후, 보길도(甫吉島)에 은거하였고, 그 때 보길도를 배경으로 ‘어부사시사’를 지었다고 전한다. 또, 양주의 고산(孤山)에 은거하기도 했으며, 1657년 동부승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일생 중 여러 번 파직 및 유배를 겪었다. 이 작품은 당쟁의 어지러움을 지적하였다고 본다. 초장을 본다. ‘들희’는 ‘들에’..

늙엇다 물너가쟈/ 송 순

376. 늙엇다 물너가쟈/ 송 순 [원본] 늙엇다 물너가쟈 마음과 議論하니 이님 바리고 어드러로 가잣말고 마음아 너란 잇거라 몸만 몬져 가리라. [역본] 늙었으니 물러나자 내 마음과 뜻 모으니 이 임금님 버리고서 그 어디로 가자는 말? 마음아 넌 남았거라 우선 먼저 몸만 가리. [감상] 송순(宋純 1493~ 1583)은 조선 시대 명종 때의 문신이다. 본관은 신평(新平), 자(字)는 ‘수초’(遂初) 또는 ‘성지’(誠之)이고 호(號)는 ‘면앙정’(俛仰亭) 또는 ‘기촌’(企村)이다. 시호(諡號)는 ‘숙정’(肅正)이다. 1519년 문과에 급제한 후에 벼슬이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는데, 말년에는 담양(潭陽)에 깊이 은거하여 책을 읽으며 자냈다. 초장을 본다. ‘물너가쟈’는 ‘물러나자’라는 뜻으로 본다. 그리고..

冬至ㅅ달 기나긴 밤을/ 황 진 이

375. 冬至ㅅ달 기나긴 밤을/ 황 진 이 [원본] 冬至ㅅ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내어 春風 니불아래 서리서리 너헛다가 어른님 오신날 밤이여든 구뷔구뷔 펴리라. [역본] 열한째 달 긴긴 밤을 한가운데 싹둑 잘라 따뜻한 이불 밑에 포개어서 넣었다가 얼은 임 오신 그 밤에 길게길게 늘이겠다. [감상] 황진이(黃眞伊)는 생몰 연대가 확실하지 않다. 조선 중기의 시인이자 기녀로 중종과 명종 때에 활동했다고 한다. 다른 이름은 ‘진이’(珍伊) 또는 ‘진랑’(眞娘)이고, 기생 이름은 ‘명월’(明月)이다. 시와 그림 외에 춤도 잘 추었고 학문적 지식이 해박했다고 전한다. 그녀는 기녀였지만, 함부로 아무에게나 정을 주지는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에게도 정든 이는 있었을 게 아닌가. 초장을 본다. ‘동짓달’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