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선나무 개화/ 김 재 황 [워낭 소리] 편 미선나무 개화 김 재 황 봄날이 자리 잡고 ‘이제 됐다.’ 하기 전에무엇이든 알고 싶나, 무엇이든 하고 싶나,와르르 잔 말마디들 가득 숲에 쏟았다. 봄날이 둥근 가슴 ‘열어 놨다.’ 하기 전에서러운 게 무엇인지, 차가운 게 무엇인지사르르 흰 마음조차 풀고 모두 보였다. 뭐 그리 서둔 건지, 뭐 그리 바쁜 건지그 봄날 귀 세우고 달려 보자 하기 전에까르르 헤픈 웃음만 남겨 두고 떠났다. (2014년) 오늘의 시조 2024.11.30
수우재를 그리며/ 김 재 황 [워낭 소리] 편 수우재를 그리며 김 재 황 실바람 안고 있는 사랑채가 지닌 공간별이 총총 깊은 밤에 대숲 소리 불을 켜고날 밝자 땅을 울리며 모과 하나 떨어진다. 아직도 서려 있는 창호지의 푸른 기운난초 훌훌 향기 따라 탱자 열매 또 익는데우리글 쓰인 하늘이 빈 마당에 내려선다. (2014년) 오늘의 시조 2024.11.29
가을 잎의 이야기/ 김 재 황 [워낭 소리] 편 가을 잎의 이야기 김 재 황 할 일 모두 끝냈으니 갈길 이제 걸어야지여린 가지 질긴 사이 아예 모두 끊어 내고두텁게 실뿌리 덮는 그 흙으로 가야지. 묵은 먼지 탁탁 털고 마음 연 채 떠나야지욕심 없이 푸른 하늘 다만 가슴 마주 닿게춤추듯 날개를 펴고 나비처럼 떠나야지. 이리 이왕 된 바에야 멋진 무게 잡아야지마냥 가는 구름인 양, 쉬지 않는 바람인 양누구도 깨울 수 없는 그 꿈 괴고 자야지. (2014년) 오늘의 시조 2024.11.28
단풍 이미지/ 김 재 황 [워낭 소리] 편 단풍 이미지 김 재 황 뭣 때문에 그러하게 서두르며 살았는지왜 그리도 사는 일이 바쁘기만 하였는지물으면 어느 잎들은 붉은 물이 듭니다. 푸른 하늘 바라보기 부끄럽지 않았는지주먹 쥐고 걷는 길에 베풀기는 잘했는지제풀에 어떤 잎들은 붉게 젖고 맙니다. (2014년) 오늘의 시조 2024.11.26
덕수궁 분수대/ 김 재 황 [워낭 소리] 편 덕수궁 분수대 김 재 황 긴 세월이 흘렀건만 결코 잊지 못하는 일매우 더운 날이었고 바람조차 안 불었지우리의 첫 데이트는 이 자리에 딱 멈췄어. 그 당시도 지금처럼 물을 뿜고 있었나 봐눈길 서로 마주칠까 짐짓 거길 보았는데우리의 풋 만남처럼 먼 색동이 팍 피었데. (2014년) 오늘의 시조 2024.11.25
춘천 야경/ 김 재 황 [워낭 소리] 편 춘천 야경 김 재 황 눈을 뜬 불빛들은 어둠 밖을 노니는데잘 닦인 물거울에 간지럼이 돋는 밤중오히려 곱게 뜬 달이 얼굴 반쯤 가린다. 선율이 흐르는지 마음 떨림 전해 오고무작정 꼬리 무는 초여름 꿈 이야기들어딘지 길게 튼 길도 은빛 비늘 돋겠다. (2012년 6월 1일) 오늘의 시조 2024.11.24
통도사 장경각/ 김 재 황 [워낭 소리] 편 통도사 장경각 김 재 황 가볍게 실바람이 마음 풀고 오가는 곳꼭꼭 적어 불에 구운 말씀들이 여기 있네,맘 비운 이들에게야 껴안을 게 이것뿐! 이따금 구름장이 가슴 펴고 감싸는 곳오랜 세월 갈고 닦은 말씀들이 빛을 내네,몸 가둔 이들에게야 그 외에 더 무엇을? (2014년) 오늘의 시조 2024.11.23
통도사 극락암/ 김 재 황 [워낭 소리] 편 통도사 극락암 김 재 황 바람이 따로 없이 산길 따라 올라가니잘생긴 소나무들 보란 듯이 둘러서고어쩐지 추운 느낌에 가슴 도로 여민다. 천수를 누린 듯이 벚나무가 멈춰 있고쉬었다 다시 가라 이르며 선 반월 다리여천문 바로 그 앞에 그림자를 누인다. 안으로 들어서면 말은 없고 글만 가득높직이 합장하고 고개 깊이 숙이고서영취산 넓은 품속에 내 기쁨을 맡긴다. (2014년) 오늘의 시조 2024.11.22
내가 품은 바다/ 김 재 황 [워낭 소리] 편 내가 품은 바다 김 재 황 마음을 비워내고 파도 소리 껴안으면갈매기 날갯짓에 펼쳐지는 푸른 물빛외로운 무인도 끝에 정든 쉼표 찍는다. 하늘과 맞닿아서 팽팽하게 뜬 수평선퉁기지 않았어도 저녁놀은 붉게 떨고밤이면 작은 별들이 음표 위에 앉는다. 용왕님 이야기야 먼 전설로 남았지만점잖은 고래들은 무리 지어 노니는데물음표 시리게 끌며 빙산 소식 닿는다. (2014년) 오늘의 시조 2024.11.20
북극 백곰에 관한 생각/ 김 재 황 [워낭 소리] 편 북극 백곰에 관한 생각 김 재 황 얼음뿐인 벌판에서 아름답게 살아가고그 커다란 몸뚱이와 강한 발톱 지녔으니모두가 부러워하는 존재였다, 전에는. 배고프면 먹이 잡고 나른하면 잠을 자고무엇 하나 안 아쉬운 은둔자라 여겼건만모든 게 크나큰 착각, 그 삶 또한 독했다. 물범을 닷새마다 꼭 잡아야 산다는데흔하지도 않거니와 빠르기는 좀 빠른가,번번이 허탕을 치니 허기진다, 꼬르륵. 힘 빠지면 허덕허덕 달리기도 쉽지 않고못 먹으니 그야말로 마주 붙는 뼈와 가죽 다시는 깰 수 없는 잠 깊이 든다, 마침내. (2014년) 오늘의 시조 2024.1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