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 시 154

툭배기 같은 친구/ 김 재 황

뚝배기 같은 친구 김 재 황 척 보면 투박해 보여도 오래 따뜻함을 머물게 하는 뚝배기처럼 옆에 있는지 없는지 별로 눈에 뜨이지는 않지만, 진정 그가 있기에 내 마음 편안한 그런 친구 있었으면 좋겠네 내가 기쁠 때는 멀찍이 떨어져서 웃고 내가 슬플 때는 가깝게 다가와서 내 손을 잡아 주는, 그런 친구 만났으면 좋겠네, 척 보기에는 마냥 무뚝뚝한 모습이어도 사귀면 새록새록 정이 솟아나고, 한 번 가슴을 열었다고 하면 저 넓은 하늘까지 껴안을 수 있는 사람 그런 친구가 그리운 지금 뚝배기 하나 내 앞에 놓여 있네. (2006년)

대표 시 2022.03.29

펑퍼짐한 함지박/ 김 재 황

펑퍼짐한 함지박 김 재 황 믿음이 가는, 그 펑퍼짐한 엉덩이 만지면 살결이 더없이 부드럽고 안아 보아도 전혀 무겁지 않아서 좋다, 쌀쌀하지 않은 성품으로, 언제나 변하지 않는 표정으로 놓아둔 자리에서 할 일을 기다리고 있다, 얼마나 높이 쌓은 믿음을 지녔기에 그 오랜 나이테를 무늬로 빚어 안고 묵묵히 제 길을 걷고 있는가, 무엇이든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은 모두 소중히 가슴에 안을 텐데, 배고픔의 서러움을 달랠 수 있는 오곡백과의 갈무리라면 더 말해서 무엇하리 바람이 불어와도 흔들리지 않고 눈이 펑펑 쏟아져도 잠들지 않는 넓은 사랑을 네 가슴에 가득 지녔으니 아무것도 부러울 게 없겠구나, 너는. (2006년)

대표 시 2022.03.29

모래톱에 서면/ 김 재 황

모래톱에 서면 김 재 황 부드러운 물결이 몰려와서 살랑살랑 굳은 발바닥을 주무르고 먼 섬의 젖은 소식도 실어다가 자잘하게 내 바로 앞에 펼쳐 놓는다, 깨어나라, 깨어나라 갈매기는 귀찮게 보채는데 부스스 사철쑥은 일어나서 눈을 비빈다, 차츰차츰 다가서면서 그리고 조금씩 물러나면서 나에게 두 팔로 커다랗게 하트를 그리는 바다 도란도란 속삭임이 귓전에 앉고 물방울과 모래알들도 다 함께 깨끗해져서 맑게 반짝인다, 가장 한가로운 이 순간 저 하늘에서 내린 마음 한 자락이 수평선과 기쁘게 맞닿아 있다. (2006년)

대표 시 2022.03.29

설설 물이 끓고/ 김 재 황

설설 물이 끓고 김 재 황 겉으로 주전자는 점잖다, 그러나 붉은 혓바닥이 슬슬 네 엉덩이를 간질이면 참지 못하고, 분기가 끓기 시작한다, 센 콧김이 밖으로 ‘식식’ 쏟아져 나오고 뚜껑마저 들썩들썩 장단을 맞춘다, 한밤 내내 갈아앉아 있던 부드러움이 놀라 깨어나서 몸을 뒤집으며 용솟음친다, 무엇으로 네 마음을 토닥거려야 하나? 다만, 너를 달랠 수 있는 건 한여름의 푸름을 안으로 감춘 잎사귀뿐 잘 마른 찻잎 한 수저에 성났던 그 마음이 스르르 누그러져 만고강산의 너그러움을 드러내게 될 터이라, 두 손으로 공손히 뜨거움을 따라놓으니 온 세상이 단박에 따뜻해진다, 녹차 향이 방안 가득 춤추며 날고 태고의 맛이 달려나와서 나를 맞는다. (2006년)

대표 시 2022.03.28

안으려고 한다/ 김 재 황

안으려고 한다 김 재 황 여태껏 지녔던 것 모두 버리고 너 하나만을 가슴에 껴안으려고 한다, 붉은 향기로 말하고 매콤한 빛깔로 손짓하는 장미여 너는 나를 멀리하려는 듯 짐짓 억센 가시를 내보이고 있으나 네 몸짓이 나를 잠 못 들게 한다, 누가 네 앞에서 기를 펼 수 있겠는가 이 모정의 땅에서 걸어 나와 저 믿음의 하늘로 날 인도하는 신비스러운 그 원색의 속삭임 결코 나는 꿈에서도 너를 잊을 수 없다, 이제는 네 곁으로 다가가 그저 마주 서 있기만 하여도 온 우주가 내 품에서 기우뚱거리는데, 그게 사랑의 멀미인지는 아직 모르지만 네 안에 구원이 있음을 안다. (2006년)

대표 시 2022.03.28

넓은 그리움으로/ 김 재 황

넓은 그리움으로 김 재 황 원래 부끄럼을 잘 탔었나 보다 작은 꽃망울조차도 차마 보이지 못하고 몰래 안으로만 숨겨 왔기에 너는 옛 동산의 이름난 나무가 되었다, 너무 큰 수줍음으로 하여 네 몸 가릴 곳 많고도 많아 손 닮은 잎사귀를 그렇듯 많이 지녔는가, 아름다움을 감추지 못하는 것 아니, 안 보이려고 할수록 불거져서 붉은 볼이 되고 달콤한 입술이 되니 어찌 사랑받기에 마땅하다고 아니하겠는가, 그동안 오랜 세월이 흘렀건만 네 이름이 잊히기는커녕 오히려 푸른 그리움으로 남아서 출렁거리는구나, 누구든 고향을 향하여 떠날 때 마음에 너를 그리지 않는 이가 없다. (2006년)

대표 시 2022.03.28

가마솥을 보면/ 김 재 황

가마솥을 보면 김 재 황 어느 부엌에 걸린 너를 보면 그 집의 후한 인심을 생각하게 된다, 지금껏 그 크고 우묵한 가슴으로 얼마나 많은 이의 배고픔을 달래 왔을까, 네가 마당 한쪽에 내어 걸리니 그 하루는 즐거운 잔칫날 온 동네 사람들이 배를 두드릴 수 있다, 너를 위해 마른 장작을 지피고 김이 무럭무럭 날 때까지 기다리면 복사꽃과 살구꽃이 피었다가 진다, 지은 밥을 모두 퍼서 골고루 나누어 주고 밑바닥에 마지막으로 남은 누룽지 또 그 숭늉 맛을 무엇이 따를 수 있겠는가, 남에게 많이 베푸는 일이 곧 자신을 가장 아름답게 가꾸는 일이기에 너는 끝까지 뜨거움을 참아야 한다. (2006년)

대표 시 2022.03.27

마음의 눈이 뜨이시어/ 김 재 황

마음의 눈이 뜨이시어 김 재 황 앞을 못 보시는 할머니 마음의 눈이 뜨이시어 세상이 환하다, 맑은 햇빛 날아드는 소리 들으시려고 날마다 창을 닦으시고 밝은 얼굴로 오는 바람을 맞으시려고 마루를 열심히 훔치신다, 밖을 보면, 비탈진 텃밭에 정성껏 더듬어서 심어 놓으신 고추 몇 포기 매운 세상살이처럼 벌겋게 익은 열매들을 힘껏 달고 있다, 마을로 곧장 흐르는 길 다시 거슬러 올라가서 머무는 마당 어귀 이웃에게 예쁘게 보이라고 수줍은 맨드라미 고운 머리 빗기신다, 불 안 켜신 채로 한 땀 한 땀 꿰매어 오신 삯바느질 그 팔십 평생이 내 어두운 마음 밭에 환하게 모란 꽃송이로 피어난다. (2006년)

대표 시 2022.03.27

조그만 세상 속에/ 김 재 황

조그만 세상 속에 김 재 황 너무나 날고 싶은 꿈이 크기에 스스로 입에서 가느다란 실을 내어 제 몸 크기만 한 집을 짓고 있네, 죽은 듯이 가만히 들어앉아 얼마나 긴긴 명상에 잠겨야만 할까, 지금껏 쌓아 올린 장벽을 허물고 가난한 시간으로 몸을 씻으며 또 얼마나 질긴 침묵을 깨물어야 할까, 우리 삶이 모두 그렇듯 그곳이 그 나름의 작은 세상이네 고단해도 절대로 잠들지 마라 이제 곧 고치를 뚫고 밖으로 나가서 한 마리 나방으로 날아야 하느니, 아름다운 꿈의 얼굴을 찾아서 어두운 숲길을 홀로 떠나야 하느니 내 안의 나를 버리고 나면 하늘길은 반드시 열릴 것이네. (2006년)

대표 시 2022.03.26

달팽이의 고행길/ 김 재 황

달팽이의 그 고행길 김 재 황 성전을 향하여 몇 날 며칠 몸으로 기어서 가는 고행을 본다, 그 아픔이 하얗게 그려내는 또 다른 믿음의 힘든 길과 만난다, 절대로 서두르지 않고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으며, 그저 가야 할 길을 가는 모습이 어찌 기도와 같지 않으랴 벌거벗은 몸뚱이의 민달팽이라고 해도 행복은 그 한걸음에 있는 것 그분이 지금도 지켜보고 계실까 봐 부끄러움에 그늘진 곳을 고른다, 그렇지만 살아서 숨쉬는 기쁨으로 거짓 뿔까지 만들어 보이고는 엎드려서 늠실늠실 앞으로 나간다, 이 밤에도 가고 있는 그 하늘길. (2006년)

대표 시 2022.03.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