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기 목욕/ 김 재 황 소나기 목욕 김 재 황 세찬 빗발 속에 서 있는 플라타너스를 보고 있자니 어릴 적에 버짐 핀 얼굴로 ‘소나기 목욕’을 하던 일이 떠오르네. 벌거벗고 마당 한가운데로 나가 그저 서 있기만 하면 소나기가 알아서 몸을 다 씻겨 주었지. 우리는 간지러움에 낄낄거렸네. 저 플라타너스도 그때 그 재미 알고 있을까. 버짐 핀 몸뚱이를 보고 있자니. (2001년) 대표 시 2022.01.20
고추와 농부/ 김 재 황 고추와 농부 김 재 황 값이 내린다고 하니 고추는 발끈해서 어디 누구든 건드려만 봐라 잔뜩 벼르고 있다. 고추야, 왜 내가 네 맘을 모르겠느냐. 뻐꾸기 우는 점심나절 물만밥을 앞에 놓고 속이 타는 농부가 고추의 눈치를 살피고 있다. (1989년) 대표 시 2022.01.20
못생긴 모과/ 김 재 황 못생긴 모과 김 재 황 너는 민주주의를 신봉하였다. 나는 무심코 네 옆을 스쳐서 갔고 너는 길거리 좌판 위에서 자유롭게 뒹굴며 지내었다. 한 떼의 젊은이들이 길거리에서 민주주의를 목청 높여 외칠 때도 너는 생긴 대로 그렇게 놓여 있었다. 나는 그러한 평화가 보기에 좋아서 걸음을 멈추고는 손을 내밀었고 너는 향기를 나에게 전하였다. 자유로운 모습과 평화로운 향기 나는 유심히 네 옆에 머물고 너는 몸으로 민주주의를 실천하였다. 새콤하게 맛으로도 보여 주었다. (1991년) 대표 시 2022.01.19
너와집처럼/ 김 재 황 (대표 시/ 김 재 황) 너와집처럼 김 재 황 달빛이 너무 밝아 뒷산으로 시를 쓰려고 와서 앉았는데 내 원고지 위에 앞산 억새의 가늘고 긴 그림자가 찾아와서 글씨를 쓰고 좀처럼 시는 몸을 드러내지 않는다. 깊은 숲 속에 자리 잡고 앉은 너와집처럼. (2006년) 대표 시 2022.0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