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거니는 이/ 김 재 황 함께 거니는 이 김 재 황 눈이 내리는 날을 골라서 혼자 산으로 간다. 쌓인 눈 속에 고요가 작은 떡잎을 조용히 내밀고 있는 곳 잠들지 않고 서 있는 키 큰 먼나무 곁으로 간다. 흰옷을 몸에 걸치고 그 나무와 함께 거니는 이는 누구인지 나는 서둘러 산을 오르지만 그는 이미 떠나고 없다. (2001년) 대표 시 2022.02.06
시원한 고요/ 김 재 황 시원한 고요 김 재 황 나무 밑에 그 가슴만 한 넓이로 물빛 그늘이 고여 있다. 그 안에 내 발을 들이밀었다가 아예 엉덩이까지 밀어 넣는다. 고요가 시원하다. 그때, 개구쟁이인 바람이 달려와서 그늘을 튀기고 도망간다. 큰 나무 그 깊은 무릎 아래에서는 온갖 것들이 이리 어리다. (2001년) 대표 시 2022.02.05
비워 놓은 까치집/ 김 재 황 비워 놓은 까치집 김 재 황 미루나무 꼭대기에 높이 지은 집 하나 지붕이 아예 없으니 오히려 맑고 밝은 달빛이 정답게 내려앉는다. 그분 쪽으로 한 걸음이라도 더 가깝게 다가앉으니 고운 손길이 바닥을 가볍게 쓰다듬는다. 한꺼번에 아무리 많은 비가 쏟아져도 그치면 보송보송 잘 마르는 자리 때로는 사나운 바람이 불어와도 숭숭 뚫린 구멍으로 모두 빠져 버리니 가난한 그 집엔 아무런 근심이 없다. 지금은 누구든지 와서 편히 머물다 가라고 비워 놓고 떠난 집 별빛들이 내려와서 하룻밤을 묵는다. 미루나무 많은 잎새가 소곤거리는 소리 가물가물 자장가 삼아 들으며 저 먼 북극성과 남극성도 같이 잠든다. (2006년) 대표 시 2022.02.05
아름다운 동박새/ 김 재 황 아름다운 동박새 김 재 황 작고 아름답다. 너는 추운 계절에 서정을 찾아서 명랑하고 우아하게 날아온다. 뜨겁게 앓는 부리로, 변함없이 푸른 가슴으로 동백꽃은 오로지 너를 기다리고 있다. 배고픔을 바람으로 채우며 너는 매우 사랑스럽게 살아간다. 철썩이는 바다에 깃이 젖고 펄럭이는 하늘에 울음이 찢겨도 그리 서러워하거나 원망하지 않는다. 너는 작지만 위대하다. (1997년) 대표 시 2022.02.04
꿈꾸는 길/ 김 재 황 꿈꾸는 길 김 재 황 착하게 그림자를 접으면 품에 안긴 것처럼 편안하다. 나무는 달빛 아래에서 달팽이와 나란히 잠든다. 바람 소리를 베개 삼아 서서도 눕고 누워서도 서며 저절로 흐르는 길을 꿈꾼다. 세상에서 가장 적막한 밤에 큰 너그러움의 나라에 닿는다. (2001년) 대표 시 2022.02.03
위대한 화음/ 김 재 황 위대한 화음 김 재 황 숲에서 피리 소리가 난다. 댓잎이 좁은 소리를 지녔는가 하면 오동잎은 넓은 소리를 지녔고, 미루나무 꼭대기의 어린잎이 높은 음성을 내는가 하면 땅바닥에서 구르는 가랑잎은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음성을 낸다. 솔잎 소리는 있는 듯 없는 듯 잎들이 모여서 이어 가는 자연의 가락 바람은 가는 나뭇가지 사이를 돌아 요리조리 힘차게 빠져나가고, 나무들은 교묘히 구멍과 또 구멍을 막았다가 풀었다가 아름다운 곡조를 연주한다. 때로는 즐겁게, 가다간 아주 슬프게. (1997년) 대표 시 2022.02.03
길은 그대로/ 김 재 황 길은 그대로 김 재 황 급히 산길을 오르다가 나무의 길게 뻗은 다리에 걸려서 넘어진다. 나무가 껄껄 웃는다. 왜 그리 허둥거렸을까, 산도 산길도 그 자리에 그리 있는데 갈 길도 정해져 있는데 나무가 쯧쯧 혀를 찬다. (2001년) 대표 시 2022.02.02
모두 젖는다/ 김 재 황 모두 젖는다 김 재 황 어둠에 잠기면 남몰래 하늘을 바라보며 읊고 있는 나무의 시를 듣는다. 너무나 시리다. 물결은 흘러가고 물소리만 남은 시 가지를 딛고 내린 달빛이 그 위에 몸을 포개고 시가 닿는 자리는 모두 젖는다. (2001년) 대표 시 2022.02.01
시치미를 뗄까/ 김 재 황 시치미를 뗄까 김 재 황 소나기가 내려서 앞동산이 얼굴 씻고 웃는 날 나는 질경이가 되어 볼일 덜 끝낸 구름의 저 궁둥이나 쳐다볼까. 짓궂게 발을 걸어 뛰어가는 바람이나 넘어뜨릴까. 그리하다가 그분에게 들키면 짐짓 먼 산 바라보며 시치미를 뗄까. 얼굴에 멋쩍은 웃음 흘리며 뒤통수를 긁을까. (2003년) 대표 시 2022.01.31
눈 내리는 날/ 김 재 황 눈 내리는 날 김 재 황 비워도 무거운 가지에는 어둠이 밤새도록 친친 감기고 푸른 숨결 의지한 하늘에서 우수수우수수 별들이 떨어진다. 살기는, 산바람 힘겹게 넘는 외진 산골짝 가파른 땅 산 뒤에 또 산을 두르고 하루하루 엮어 가는 나무들의 꿈 그래도 오늘은 눈이 내린다. 날리는 눈발 속에서 새로 난 길로 생각난 듯 그분이 찾아오실까, 흰 옷깃 펄럭이며 바삐 오실까. (1997년) 대표 시 2022.0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