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스한 안개/ 김 재 황 따스한 안개 김 재 황 어둠이 걷히는 산봉우리에 숨결 더운 안개가 깔리고 있다 하늘에 사는 별빛 숲에 내려 눈물처럼 맺히고, 밤새 나눈 이야기 잎에 떨어져 꿈처럼 젖고 있다 고요한 길을 밟고 와서 외로운 창문을 두드리는 이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오를수록 험한 산골짜기라도 맨발로 뛰어 올라가서 안개 속에 몸을 묻고 싶다 내 앞을 가로막는 절벽이라도 맨손으로 기어 올라가서 신비로운 그 품에 안기고 싶다. (1997년) 대표 시 2022.02.13
손 씻은 하늘/ 김 재 황 손 씻은 하늘 김 재 황 바위의 움푹 팬 자리에 빗물이 고여 있고, 곧은 소나무가 고달픈 그림자를 벋어서 그 물에 손을 씻는다. 세상을 안은 눈빛이 잔잔하다. 내 호기심이 소나무로 다가가서 그 그림자의 손을 잡아당기자, 산의 뿌리까지 힘없이 딸려 올라오고, 빈 하늘만 몸을 떤다. (2001년) 대표 시 2022.02.12
겨울 산을 오르면/ 김 재 황 겨울 산을 오르면 김 재 황 거기, 고요가 살고 있다. 해묵은 기침 소리 모두 잠재우고 두툼한 햇솜 이불 넓게 깔아놓은 채 하얀 숨결이 날개를 접고 있다. 낮아서 더욱 아늑한 자리 시린 바람 불어와서 한껏 자유로운 곳 말하지 않아도 알아듣고 만지지 않아도 느껴지는 그분의 결코 안 늙는 사랑 졸고 있는 산봉우리 멀찍이 세워두고 거기, 씨암탉 같은 고요가 온 우주를 가만히 품고 있다. (1997년) 대표 시 2022.02.11
먹붕어 뛴다/ 김 재 황 먹붕어 뛴다 김 재 황 한 대접의 맑은 물을 약모밀 앞으로 가지고 가서 밤새 달빛에 얼룩진 그의 얼굴을 닦아 준다. 먼동이 다가올수록 환하게 피어나는 꽃들의 미소 그릇 속에 달이 갇힌다. 펄떡펄떡 먹붕어 뛴다. (2003년) 대표 시 2022.02.11
흔들리지 않고는/ 김 재 황 흔들리지 않고는 김 재 황 흔들리기만 하는 풀들도 사실은 길을 가고 있다. 낮에는 노랗게 열린 햇빛의 길을 걷고 밤이면 하얗게 열린 달빛의 길을 걷는다. 걸어가며 허공에 찍어 놓은 이내 같은 발자국 함께 흔들리지 않고는 결코 볼 수 없는 그 길. (2003년) 대표 시 2022.02.10
숫된 새벽/ 김 재 황 숫된 새벽 김 재 황 안개를 밟고 산을 오른다. 고요에 싸여 있는 먼동 다듬어지지 않았으므로 들쭉날쭉한 가난한 나무들, 어둠을 벗고 숲이 일어서기도 전에 벌써 기침하는 산 울림만이 손끝에 남고 찬란한 느낌으로 무릎을 꿇는다. 그분은 눈빛 찬찬히 내려다보시는데 나는 내 마음밖에 드릴 게 없어라. 밤새운 별을 주워 모으면 한 줄기 은하수보다 맑게 흐르는 길 아파하는 숫된 새벽이여 눈물로 산이 산을 닦으니 하늘은 온 세상의 일, 가슴으로 듣는다. 모은 잎에 꿈이 닿는다. (1997년) 대표 시 2022.02.09
믿음의 지팡이/ 김 재 황 믿음의 지팡이 김 재 황 네 걸음은 구름처럼 가벼웠다. 길이 멀고 험할수록 너는 나보다 한 발짝 앞에서 이 땅의 시린 가슴 조심스레 두드려 가며 산을 만나면 산을 넘고 강과 마주치면 강을 건넜다. 그래도 내 젊음이란 천방지축이어서 내민 네 손길 뿌리치고 저만치 홀로 달려가 보기도 했지만, 결국 작은 바람에도 내 몸이 흔들렸고 생각보다 빠르게 천파만파 세월은 주름진 늙음 속으로 나를 몰아갔다. 이제 내 발걸음이 무거우니 어찌하겠는가. 손을 내밀면 닿을 자리에 늘 너는 있었는데, 그 믿음이 있었는데 미처 앞선 중심에 눈뜨지 못했으니. (2006년) 대표 시 2022.02.09
오늘 하루는/ 김 재 황 오늘 하루는 김 재 황 내가 지금까지 손에 들고 놓지 못한 만년필 나무에게 맡겨 놓은 채 바람의 길을 밟겠다. 이 나이에 이를 때까지 한 번도 닿아 보지 못한 곳 나무와 함께 걸으며 멋지게 휘파람을 불겠다. (2001년) 대표 시 2022.02.08
풀꽃으로 살다가/ 김 재 황 풀꽃으로 살다가 김 재 황 내 목숨 다하여 눈을 감으면 사람은 다시 말고 숲속으로 들어가서 잘난 맛에 뒤집히는 얼레지나 될까, 실바람 한 입 머금은 현호색이나 될까, 허공에 글씨 쓰는 금붓꽃이나 될까, 귀여움을 독차지하는 노루귀나 될까, 짝사랑에 목이 메는 설앵초나 될까, 웃음을 참지 못하는 동의나물이나 될까, 오랜 벗을 기다리는 초롱꽃이나 될까, 옛이야기 주워 모은 금낭화나 될까, 자나 깨나 하품 여는 참배암차즈기나 될까, 그렇게 또 한세상 숨어 살다가 그 한목숨 또 다하고 하늘로 돌아가서 밤이면 피어나는 달의 꽃 되리라. (1997년) 대표 시 2022.02.07
떡갈잎 그 손/ 김 재 황 떡갈잎 그 손 김 재 황 오로지 지닌 손이 넓으면 그 마음 또한 커다랗다고 하였던가. 남에게 베푸는 즐거움으로 그 빛깔이 마냥 푸르기만 하다. 생겨나서 단 하루도 쉴 틈이 없이 부지런히 일에만 매달렸으니 그 살결이야 당연히 거칠지 않겠느냐 굵은 힘줄이 드러나 있어서 고단한 네 일상을 짐작하게 한다. 가는 바람이 손등을 쓰다듬고 오는 가랑비가 주름을 적시는데 나는 하늘의 빛나는 일들을 떠올린다. 늘 펴서 밝히고 있으므로 아무것도 안 숨김을 나는 아노니 그 몸과 마음의 어울림이 아름다운 사랑을 다시 빚는다. (2001년) 대표 시 2022.0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