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 시 154

등나무 그늘/ 김 재 황

등나무 그늘 김 재 황 부드러운 햇살에 녹아서 자줏빛 그늘이 짙게 내린다, 밤새 달빛에 닦인 미소 또한 내 귀 간지럽게 속삭인다, 뺨을 비벼라, 입술을 맞추어라, 두 사람 나란히 앉으면 고운 사랑 절로 태어난다, 아름다운 세상 어여쁜 계절 종다리 높이 떠 지저귀나니 노랑나비 나풀거리며 날아오리니 이 봄을 모두 노래하자 그 마음 향기롭게 꽃잎을 열자 기쁜 눈물에 땅도 젖는다. (1998년)

대표 시 2022.02.22

낙성대/ 김 재 황

낙성대 김 재 황 사당동에서 까치고개를 올라 바라보면 알 수 있다 어두운 하늘에서 별 하나 떨어져 꽃다운 한목숨 피어난 곳 거센 바람 앞에 촛불 같던 옛 나라 작은 몸 크게 나서서 굳게 지키고 그 숨결 머물러 아직도 뿌리고 있는 향기를 맡을 수 있다 좀더 가까이 다가가 보아라, 천년 긴 꿈에 잠겨 있는 석탑에서 거란을 물리친 호령 소리 들을 수 있고 맑은 눈 다문 입의 영정에서 오늘의 진정한 용기를 배울 수 있다, 칼을 들고 나아가 나라를 구하고 붓을 들고 물러나 민족을 ᄉᆞᆼ한 임 그는 멀리 있지 않다 우리 곁에 지금도 당당히 살아있다, 까치고개를 걸어내려가 왼쪽으로 다시 언덕을 조금 오르면 누구나 금방 알 수 있다. (1998년)

대표 시 2022.02.22

그리는 별/ 김 재 황

그리는 별 김 재 황 어둠 속에서 눈을 뜬다, 하얀 꿈 그대로 일어나서 이슬로 몸을 씻고 바람의 깃 달린 옷을 차려입는다, 맑고 차구나 볼우물 비치는 거울이여 한 손에 한 송이 꽃을 들었는가, 거니는 정원에 꽃향기 날릴 때 또 한 손을 내밀어 숲 우거진 산 하나를 쓰다듬는다, 아무리 멀다고 한들 그대 목소리 왜 안 들리리 조금 더 가까이 발돋움하면 그대 숨결 내 귀에 왜 안 닿으리. (1998년)

대표 시 2022.02.21

치자꽃 향기/ 김 재 황

치자꽃 향기 김 재 황 오늘은 그가 냉수 한 바가지 달랑 떠 들고 나를 찾아왔다 물푸레나무가 들어앉았던 물인가, 맑은 하늘이 가득 담기어 있다 내가 받아서 마시니 단박에 온 세상이 파랗다, 나는 무엇으로 손님을 대접해야 하나 아무것도 내놓을 게 없다 내가 그저 활짝 흰 이를 내보이니 그는 답례로 더욱 환하게 눈을 감는다 아, 나는 그예 빚을 지고 마는구나. 그가 말없이 앉았다가 떠난 자리에서 치자꽃 향기 살며시 날개를 편다. (1998년)

대표 시 2022.02.21

은행나무 사연/ 김 재 황

은행나무 사연 김 재 황 오늘도 은행나무는 왜 저리 길거리에 나와 섰는 줄이나 아십니까 가고 오는 사람들은 많아도 한 자리에 머물려는 사람은 없는데, 그리 곱던 잎 모두 떨구고 저 키 큰 은행나무가 왜 그림자를 끌며 섰는 줄이나 아십니까. 멀리 떨어져 있는 은행나무의 정담은 바람이 안아다가 들려주고 아무리 멀어도 사랑의 선물이라면 또한 바람이 업어다가 척 전해주건만, 매연에 매운 눈을 훔치면서 저 늙은 은행나무가 왜 발을 구르며 섰는 줄이나 아십니까. (1998년)

대표 시 2022.02.21

낚시의 리듬/ 김 재 황

낚시의 리듬 김 재 황 그대 유연한 손놀림 물살 위로 던진 낚싯줄이 바람을 가르며 바람 소리로 날아가 한 마리 나비처럼 살포시 물결 위에 앉는다, 잠시 머무는 고요함 세상이 일시에 멎는 그 순간 다만 영혼만이 맑고도 가볍게 줄 끝을 따라가 희열에 떤다, 오, 물소리를 타고 만나는 눈과 눈 서로 주고받는 리듬이 되어 세찬 물살 속에서 꽃이 되나니. (1998년)

대표 시 2022.02.20

나의 굴거리나무/ 김 재 황

나의 굴거리나무 김 재 황 내 몸은 목질이 되어 아직껏 이 한 평생 살 트는 질척한 아픔에 젖어 살아왔거니 이제 그 여윈 가지 끝에 교양의 잎이 돋아서 나 스스로 무릎 아래 앉는다, 마침내 감은 눈에 벽이 헐리고 열린 귀로 어두움이 흘러나간다, 산과 숲을 흔들던 바람도 어쩌지 못해 입을 다물고는 수평선에 머ᅟᅮᆫ 하늘로 돌아가는데 내 덜 깬 꿈속에서 지붕이 새는 허술한 우리 양옥집이 한 점 안면도로 떠 있었다. (1998년)

대표 시 2022.02.20

이 밤길 멀어도/ 김 재 황

이 밤길 멀어도 김 재 황 나무가 길을 간다, 어둠 속에 발을 담그고 꿈길을 간다, 이 나뭇가지에서 저 나뭇가지로 날며 나무를 유혹하는 휘파람새의 노래 아지랑이가 알 듯 모를 듯 눈짓하고 실바람은 보일 듯 말 듯 손짓하는 곳 부르르 잎을 떨며 나무가 간다, 강물은 땅에서만 길을 여는가, 구름속 달이 살짝 덧니를 보이는데 부스스 깨어난 별이 보조개를 짓는데 그래, 이 밤길이 아무리 멀어도 나무는 흘러 흘러 꽃길을 간다, 한 치 두치 어렵게 키를 늘이며 뜨거운 얼굴 만나러 간다. (1998년)

대표 시 2022.02.20

굴뚝새/ 김 재 황

굴뚝새 김 재 황 굴뚝이 없으니 굴뚝새는 날아갈 곳이 없다, 모처럼 고향을 찾았는데 동구 밖 정자나무는 이제 너무 늙어서 말귀를 통 알아듣지 못한다, 옛일조차 물을 수가 없어서 낭패다 전에는 그리 명랑했던 냇물이 시무룩이 쉬엄쉬엄 산길을 내려온다, 반짝임이 없다, 눈빛이 죽었다, 굴뚝새는 서러워서 울고 몇 그루 싸리나무가 눈시울을 붉힌다, 낮은 굴뚝을 겨드랑이에 끼고 졸던 초가집이 앉았던 자리는 어디인가, 밤이면 별이 떨어져 묻히던 곳 굴뚝새는 여기저기 땅을 헤집다가 흙 묻은 별 조각 하나 물고 돌아와서 교회 첨탑 꼭대기에 걸어놓는다, 오늘은 그게 시가 되어 빛난다. (1998년)

대표 시 2022.02.19

흑비둘기 노래/ 김 재 황

흑비둘기 노래 김 재 황 바다 주위를 맴돌며 사는 흑비둘기 갈수록 답답한 가슴 검은 빛을 띤 자줏빛이나 초록의 빛이 나는 몸 저 깊은 물에 헹구려고 파도가 갈기를 세우는 그 섬을 떠나지 못한다. 암청색 부리는 여위고 붉은 다리는 가늘어져서 그리운 그분만을 기다리는 나를 닮은 흑비둘기 해 지는 후박나무 위로 날아가서 깃을 접는다. (1991년)

대표 시 2022.0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