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 시 154

가시나무에게/ 김 재 황

가시나무에게 김 재 황 여행을 다녀와서 우리는 만나 본 얼굴들을 이야기한다, 무엇을 대접받았고 어디를 함께 갔는지 누구나 힘주어 말하는 대목 남겨 놓지 못한 말은 아무도 아쉬워하지 않는다, 손과 손을 잡을 때 그 따뜻함은 이미 식고 눈과 눈이 마주칠 때 그 찬란함은 이미 잊었다, 가시나무야, 가시나무야 메말라 버린 내 꿈결 속으로 지친 뿌리를 뻗어다오, 남몰래 밤이면 벼리어 살던 네 뾰족한 그리움을 이제는 나에게 전해 다오. (1991년)

대표 시 2022.02.19

귤밭의 삼나무/ 김 재 황

귤밭의 삼나무 김 재 황 지금 제주도의 삼나무는 시름에 잠겨 있다. 짙은 그늘을 이고 귤나무들이 아우성을 친다, 비키든지 키를 낮추라고 한다. 바람을 막고 자식처럼 키운 은공을 도무지 모른다. 바람 때문에 고구마만 자라던 때를 잊고 있는가, 이제는 자랄 대로 커서 바람도 두렵지 않단 말인가. 할 일 끝낸 삼나무는 외롭다, 키가 자꾸만 커서 서럽다. 그래, 떠나야지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이며 이제 이 자리를 떠나야지. 바람이 불어오자, 꽃가루가 눈물처럼 번진다. (1991년)

대표 시 2022.02.18

곰솔에게/ 김 재 황

곰솔에게 김 재 황 너는 살아있는 전설이다, 바람의 말을 알아듣고 바다의 언어를 이해하는 너는 숨을 쉬는 고전이다, 나약한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는 짙은 그늘을 펼침으로써 수평선처럼 머문 사색 아, 꼿꼿하게 서서 하늘을 만지는 너의 손이여 그 믿음이여 영혼은 구름을 닮아 가는가, 무슨 밀어를 주고받는가, 비사나 애사까지도 이제 너는 증언하려는가, 흑비둘기 한 쌍 네 가지에 몸 비비며 울어도 나는 그리움의 말을 너에게 전하지 못한다, 맺힌 한을 아직도 나는 풀어 주지 못한다. (1991년)

대표 시 2022.02.18

어름치/ 김 재 황

어름치 김 재 황 보아라, 저 시린 물을 거슬러 오르는 힘찬 의지 비늘마다 입술 씹은 자국 보인다, 스스로 매질한 얼룩 빛난다, 그 영혼 새롭게 벼리기 위해 이 밤에도 너는 눈을 감지 않는구나, 몸을 비워 마음을 비워 면벽 기도를 올리는구나, 산에 엎드려서 목을 축이고 바람이 숲에 들어 잠을 청할 때 그렇다 바로 그렇다 너는 아직껏 못 이룬, 폭포를 뛰어넘어 천상의 그분을 만날 수 있다. (1997년)

대표 시 2022.02.17

즐거운 숲/ 김 재 황

즐거운 숲 김 재 황 가지와 가지 사이에 그분의 말씀이 우거져 있다, 기쁨으로 꽃이 열리는 소리 들리고 아픔으로 열매 물드는 소리 들린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이르신 말씀 그대로 몸 가벼운 잎 고운 햇살 내리듯 그분이 자애로운 눈빛 여시니 나비처럼 모든 영혼 춤추는구나, 발돋움한 온갖 나무 노래하는구나, 지으신 이 세상 더욱 푸르게 그분의 어진 음성 한층 새롭게. (1997년)

대표 시 2022.02.16

줄지은 저 철새는/ 김 재 황

줄지은 저 철새는 김 재 황 목을 길게 빼고 날아간다, 그리움을 따라서 떠나는 길 시린 하늘에 몸을 맡기고 구름인 양 바람을 탄다 그분이 오라고 손짓하는 마을 거울처럼 마음이 비치는 물 마당 빈 죽지에 깃이 돋아서 가볍고 홀가분한 차림새로 총총히 줄짓는 내 사랑이여 부리에 한 자락 긴 울음 물고 너울너울 춤사위 펼치며 날아간다. (1997년)

대표 시 2022.02.16

지지 않는 달/ 김 재 황

지지 않는 달 김 재 황 여전히 바로 그 자리에 둥근 보름달 하나 열려 있다 창밖에 일그러진 반달이 떴다가 지고 성난 초승달이 종종걸음쳐도 이십여 년 전 모습 그대로 환한 보름달 하나 매달려 있다 사랑아, 이렇듯 모진 세상을 살면서 네가 어찌 보름달처럼 둥글기만 했으랴 향기롭기만 했으랴 그러나 나는 기쁘게 바라보는 눈길 풀 수가 없다 멈출 수가 없다 설령 그대가 일그러진 반달을 꿈꾸고 초승달의 종종걸음을 흉내 낸다 하여도 나는 결코 눈을 떼지 않으리 한 번 내어준 이 하늘에 영원히 보름달로 피어 있게 하리. (1997년)

대표 시 2022.02.15

개펄 앞에 서서/ 김 재 황

개펄 앞에 서서 김 재 황 칠게들이 분주하다, 연신 진흙을 집어다가 입에 넣는다 마파람이 불자, 온갖 목숨의 냄새가 뱃고동을 타고 운무처럼 번진다, 꼬막이 혀를 내밀다가 얼른 감춘다 짱뚱어가 지느러미를 세우고 뒹굴며 마냥 마사지한다, 해오라기 몇 마리가 날아와서 탱고의 스텝을 신이 나게 밟는다 이따금 여린 가슴을 열어젖히고 갑갑하다는 듯 깊은숨을 내쉬는 펄이여 누구든 짙은 이 마음을 탐하지 마라 젖은 옷도 벗기지 마라 그대로 조용히 누워 있게 둬라. (1997년)

대표 시 2022.0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