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 시 154

혈서/ 김 재 황

혈서 김 재 황 세상을 더듬던 손가락 끝 가장 가려운 살점 베어낸 자리에서 전신의 아픔보다 더한 꽃이 핀다. 그늘진 쪽에 서서 몇 줌 스며든 햇빛에 눈멀지 않고 오직 순수하게 펼친 무명 위에 뜨거운 마음을 적는 아, 속으로 불붙는 나무의 모습 찬바람에 붉은 꽃이 진다. 빛나던 잎에 하나둘 피가 맺히고 결국은 방울방울 떨어뜨리는 의식으로 분명한 외침이 살아난다. (1997년)

대표 시 2022.01.29

지휘자/ 김 재 황

지휘자 김 재 황 교회에서 관현악단을 지휘하는 모습이 그분을 보는 것 같다. 이쪽을 깨우고 저쪽을 다독거리고 구름을 타고 너울너울 날다가 갑자기 성난 파도를 일으키기도 한다. 부드럽기가 솜털인 양하고 기운차기가 말갈기를 세운 듯하다. 음악을 이끄는 손짓 우주를 날아다니는 신명 바람이 불고 안개가 내리고 천둥과 번개까지 어울려서 이 세상이 창조되는 순간을 재연한다. 그토록 팔놀림이 아름다운 것은 그 몸 안에 그분이 머무시기 때문이다, 그분의 팔이 춤추기 때문이다 (1997년).

대표 시 2022.01.28

섬/ 김 재 황

섬 김 재 황 내가 섬을 떠나는 것은 떠나면서도 내가 섬을 사랑한다는 것은 십 년이나 함께 살며 구석구석 나무 하나하나 손때 묻은 귤밭을 두고 여름 바다에 눈물을 섞으면서도 내가 섬을 떠나는 것은 떠나가서도 멀리서 바라보는 눈길이 더욱 서럽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가 섬을 떠나는 것은 바람과 돌의 숨결을 두고 동박새 울음을 길게 남기고 떠나면서도 진정 떠나지 못하는 것은. (1989년)

대표 시 2022.01.23

사랑놀이/ 김 재 황

사랑놀이 김 재 황 어디만큼 쏘아 올렸나, 우렛소리로 긴 홰를 치고 날아가 번개처럼 깃을 펼쳐 꽃피운다. 높이 뿌려 놓은 별빛 밟으며 하나로 어우러져 춤을 벌인다. 눈빛 뜨겁게 마주 닿으면 차가운 가슴에도 불꽃이 필까. 저 하늘에 피가 돌아서 어두워진 갈피마다 꽃물 들이고 타다가 스러져 별을 묻는다. 보아라, 바람 자는 구름 밖까지 고운 영혼 가물가물 걸어간 길을, 가다가 힘들고 날이 저물면 부싯돌 같은 사랑 마주해 부싯깃 같은 구름에 대고 치리. 우리 숨결이 숨겨 둔 불씨 다시 꺼내어 꽃인 양 다독거리리. (1997년)

대표 시 2022.0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