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서/ 김 재 황 혈서 김 재 황 세상을 더듬던 손가락 끝 가장 가려운 살점 베어낸 자리에서 전신의 아픔보다 더한 꽃이 핀다. 그늘진 쪽에 서서 몇 줌 스며든 햇빛에 눈멀지 않고 오직 순수하게 펼친 무명 위에 뜨거운 마음을 적는 아, 속으로 불붙는 나무의 모습 찬바람에 붉은 꽃이 진다. 빛나던 잎에 하나둘 피가 맺히고 결국은 방울방울 떨어뜨리는 의식으로 분명한 외침이 살아난다. (1997년) 대표 시 2022.01.29
가까이서 보니/ 김 재 황 가까이서 보니 김 재 황 좀 떨어져서 바라보았을 때는 그리 힘 있게 보이던 구리때 가까이 다가가서 살펴보니 그 몸 여기저기에 깊은 상처가 숨어 있네. 이 세상 어느 목숨인들 상처를 간직하지 않은 몸 있을까. 아픔을 숨기고 살 뿐이네. 그 슬픔도 잎집으로 감싸면 아름다운 무늬가 될지도 몰라. (2003년) 대표 시 2022.01.29
지휘자/ 김 재 황 지휘자 김 재 황 교회에서 관현악단을 지휘하는 모습이 그분을 보는 것 같다. 이쪽을 깨우고 저쪽을 다독거리고 구름을 타고 너울너울 날다가 갑자기 성난 파도를 일으키기도 한다. 부드럽기가 솜털인 양하고 기운차기가 말갈기를 세운 듯하다. 음악을 이끄는 손짓 우주를 날아다니는 신명 바람이 불고 안개가 내리고 천둥과 번개까지 어울려서 이 세상이 창조되는 순간을 재연한다. 그토록 팔놀림이 아름다운 것은 그 몸 안에 그분이 머무시기 때문이다, 그분의 팔이 춤추기 때문이다 (1997년). 대표 시 2022.01.28
달빛 아래에서/ 김 재 황 달빛 아래에서 김 재 황 금강산과 손이 닿아 있는 성대리 언덕으로 달빛이 너무 많이 쏟아져서 길이 끊겼다, 어둠을 밟고 걸어가야 할 이 땅의 바쁜 사람들 우거진 풀숲처럼 서로 얽히어서 얕은 잠에 빠질 때 그는 달빛 아래에서 꽃을 빚으려고 몸을 살랐다. 길을 이으려고 시를 썼다. (2006년) 대표 시 2022.01.27
맑은 눈동자/ 김 재 황 맑은 눈동자 김 재 황 이 세상에서 가장 맑은 건 들꽃의 눈동자 이는, 천성으로 그렇다기보다도 태어나면서 맨 처음 새벽하늘을 보았기 때문이다. 들꽃과 눈이 마주치면 어린 샘물의 옹알이가 들린다. (2005년) 대표 시 2022.01.26
협죽도/ 김 재 황 협죽도 김 재 황 믿음이 깨어지던 날 내 사랑은 독이 되었다, 의심이 나를 괴롭혀 칼날 같은 마음이 되었다, 아 어쩌랴, 여름에 남쪽 바닷가를 거닐면 그리움 뜨거운 협죽도꽃이 나를 닮는다, 내 사랑을 닮는다. (1989년) 대표 시 2022.01.25
한란/ 김 재 황 한란 김 재 황 너는 어찌 똑같은 풀로 태어나 귀한 존재가 되었는가, 너는 어찌 습하고 그늘진 곳에서 젖은 시름을 견디는가, 너는 어찌 추운 계절에 꽃 피어 고고한 품격을 지키는가, 너는 어찌 잡혀 온 몸이면서도 높은 자리에 앉았는가, 너는 어찌 가난한 나에게로 와서 슬픈 의미로 머무는가. (1989년) 대표 시 2022.01.24
섬/ 김 재 황 섬 김 재 황 내가 섬을 떠나는 것은 떠나면서도 내가 섬을 사랑한다는 것은 십 년이나 함께 살며 구석구석 나무 하나하나 손때 묻은 귤밭을 두고 여름 바다에 눈물을 섞으면서도 내가 섬을 떠나는 것은 떠나가서도 멀리서 바라보는 눈길이 더욱 서럽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가 섬을 떠나는 것은 바람과 돌의 숨결을 두고 동박새 울음을 길게 남기고 떠나면서도 진정 떠나지 못하는 것은. (1989년) 대표 시 2022.01.23
못/ 김 재 황 못 김 재 황 애초부터 어디엔가 박혀야 할 운명이라면 그대 가슴에 파고들어 믿음의 의미가 되고 싶다, 그리하여 그대 안에서 하나의 뼈대 같은 사랑으로 서고 싶다. (1989년) 대표 시 2022.01.22
사랑놀이/ 김 재 황 사랑놀이 김 재 황 어디만큼 쏘아 올렸나, 우렛소리로 긴 홰를 치고 날아가 번개처럼 깃을 펼쳐 꽃피운다. 높이 뿌려 놓은 별빛 밟으며 하나로 어우러져 춤을 벌인다. 눈빛 뜨겁게 마주 닿으면 차가운 가슴에도 불꽃이 필까. 저 하늘에 피가 돌아서 어두워진 갈피마다 꽃물 들이고 타다가 스러져 별을 묻는다. 보아라, 바람 자는 구름 밖까지 고운 영혼 가물가물 걸어간 길을, 가다가 힘들고 날이 저물면 부싯돌 같은 사랑 마주해 부싯깃 같은 구름에 대고 치리. 우리 숨결이 숨겨 둔 불씨 다시 꺼내어 꽃인 양 다독거리리. (1997년) 대표 시 2022.0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