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 시 154

오늘이 뱀처럼/ 김 재 황

오늘이 뱀처럼 김 재 황 기척이 없이 스르르 빠져나간다, 발을 지니지 않았으면서도 빠르게 그늘진 곳을 찾아서 떠난다, 그 몸이 길고도 또 길기에 한 장소에 점잖게 머물려고 하면 똬리를 틀 수밖에 없다, 겉으로 보기에는 잠을 즐기는 듯싶지만 언제나 차게 의식은 깨어 있고 단숨에 먹이를 삼키려는 욕망도 크다, 두 갈래의 혀를 그토록 자주 빠르게 널름거리는 까닭은 바로 제 감각을 더욱 갈고 다듬으려는 것인가, 좋은 계절에는 그 몸이 자라므로 이따금 허물을 벗고 새로워져야 한다, 몸 빛깔이 하얀 게 최상이라는데 내가 목격한 놈들은 모두 먹빛이다. (2006년)

대표 시 2022.03.26

단단한 선물/ 김 재 황

단단한 선물 김 재 황 단단한 껍질을 등에 지고 있으므로 느릿느릿 걸음을 옮길 수 있다 어떤 어려운 일이 앞에 닥칠지라도 너는 큰 바위처럼 느긋하다, 그저 엎드려서 참고 기다리기만 하면 가던 길을 다시 걸어걸 수 있다 나도 그와 같은 믿음을 업을 수 있을까 쉬엄쉬엄 삶을 이을 수 있을까 믿는 것이라고는 오직 굳은 등껍질 때로는 그게 거추장스럽기도 하겠지만 소중히 등에 얹고 살아간다, 말없이 물과 뭍을 번갈아 오가며 작은 눈을 끔벅거리는 남생이 그리 단단한 믿음을 기쁘게 얻었으므로 네 한 생 낮게 입맞춤으로 열심히 가서 하늘 문을 두드릴 수 있다. (2006년)

대표 시 2022.03.25

멀리 나는 걸 보니/ 김 재 황

멀리 나는 걸 보니 김 재 황 큰 눈을 뜨고 멀리 나는 것을 보니 너는 분명히 무거운 임무를 지녔나 보다 어찌나 투명한지 하늘이 모두 비치는 고운 날개를 선물로 받았으니 네 목숨 다하여 하늘로 날아야 한다, 차디찬 물속에서의 어린 시절 그 연단이 얼마나 숨이 막혔겠는가, 하지만 모든 시련을 이기고 맨 처음에 물 밖으로 나왔을 때 저 하늘은 얼마나 네게 힘찬 길이었겠는가 살이 찢어지는 그 아픔쯤은 상긋 웃으면서 참을 수 있었겠지 날개돋이는 그만큼 특별한 은총 너야말로 이 세상 펼쳐져 있는 기쁜 일 슬픈 일 모두 알 수 있으니 확실히 너는 큰 그릇으로 쓰시려나 보다 높이 날아서 넓게 사는 걸 보니. (2006년)

대표 시 2022.03.25

맹꽁이의 감사기도/ 김 재 황

맹꽁이의 감사기도 김 재 황 못생겼어도 목소리는 곱기만 하다, 얼마나 오래 참고 기다렸는데 오랜 가뭄 끝에 단비가 내렸으니 어찌 그리 기쁘지 않겠는가, 빗물인지 눈물인지 몸에 범벅이 되어 하늘을 바라보며 크고 맑게 운다, 그 가벼운 영혼을 다 바쳐 목청껏 젖은 기도를 간절히 올린다, 가만히 눈을 감고 들어 보아라 누가 그 소리를 한낱 울음이라고 하리 쩍쩍 갈라졌던 논바닥에 산을 안고 출렁거리는 물이 고이니, 시들던 벼들도 생기가 넘쳐 저리 흔들흔들 춤추고 있지 않은가, 목마른 온갖 목숨을 대신하여 감사기도를 올리는 목소리, 아름답다. (2006년)

대표 시 2022.03.25

그분과 학춤을/ 김 재 황

그분과 학춤을 김 재 황 깃 사이에 바람이 가득 스며들면 하얀 눈길이 오히려 정신을 맑게 하는데, 가난한 갈대들만 서로 몸을 비비는 물가 그 고즈넉한 자리로 어디선가 거문고 소리 날아와서 머물고, 모든 날개가 가볍게 부추김을 받는다 그분이 진정 바라시는 모습인 듯 아름답게 어우러진 걸음걸이와 날갯짓이 한바탕 소용돌이를 일으키는가 하면 우주를 그 안에 잠들게 한다, 바람 소리는 시린 가락을 허공에 두르고 보이지 않는 손길이 내려와서 감싼다, 그 기쁨에 모가지가 절로 길어지며 널찍하게 펼쳐지는 두 날개 풀쩍 너는 하늘 높이 네 몸을 띄워 올린다, 날아가서 그 품에 안기를 바란다. (2006년)

대표 시 2022.03.24

숲을 잃고 말았으니/ 김 재 황

숲을 잃고 말았으니 김 재 황 어둠 속에 엎드린 바위들 부드럽게 원시의 숲으로 일으켜 세우며 그분은 어떤 노래를 부르셨을까, 찢어진 손톱에서 피를 털어 내듯 졸졸 흐르는 소리가 반짝이게 되었으리, 그 눈빛들이 모여서 흰 물결을 이뤘으리, 더운 숨결은 먼동을 불러오고 하늘의 미소가 이 땅으로 내려와서 풀이며 나무를 방문하여 꽃을 피우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하였으리 그 모습 보시는 그분의 가슴에는 또 얼마나 시원한 강물이 흘렀을까, 그런데 어쩌면 좋지, 날이 갈수록 산은 허물어지고 길은 사방으로 뚫려서 숲을 잃어버리고 말았는데 이제 그 슬픔이 저 높은 가슴의 짙은 먹구름이 될 테니 어쩌면 좋지. (2006년)

대표 시 2022.03.24

산에서 읽는 시/ 김 재 황

산에서 읽는 시 김 재 황 집안에서 뒹굴며 보내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날씨라, 시집 한 권을 들고 산으로 오른다, 만나는 별꽃에 인사하고, 사색에 잠긴 신갈나무 그 등에 잠깐 기대었다가 소나무 숲으로 걸음을 재촉한다, 내가 숨이 차게 찾아가면 늘 마련되어 있는 그늘 멍석 바로 그곳이 내가 대자연과 만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푸른 사랑방 내가 시집을 펼쳐서 시를 읽는데, 바람은 말할 것도 없고 구름 또한 귀를 열고 기웃거린다, 서로 마음을 주고받는 게 이처럼 가볍고 즐거울 줄이야. (2006년)

대표 시 2022.03.24

기다리는 오두막집/ 김 재 황

기다리는 오두막집 김 재 황 날이 저물고 사방이 어두워졌으니 쉴 곳을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간절하게 두 손 모은 기도 속에서 어둠 저편에 오솔길이 나타나고 그 끝에 작은 불빛 한 점이 반짝인다, 건 적 없었어도 작은 오두막집 지친 나그네를 기다리고 있으리니, 낡은 쪽마루에 그분이 앉아 계시리니 서둘러 걸어가야 하지 않겠는가, 숲을 지나고 다시 언덕을 넘어서 방울새의 고운 음성이 닿아 있는 산 비탈을 오르고 능선을 타고 걸으며 그분의 둥근 얼굴을 가슴에 안아 본다, 무엇을 선물로 가지고 가야 하나 내가 지닌 것은, 한 대접의 마음뿐 맑은 물소리 가득 담아서 들고 가리니. (2006년)

대표 시 2022.03.23

놓이는 이유/ 김 재 황

놓이는 이유 김 재 황 여린 마음을 지니고 달려가면 그 앞에 다다를 수 있을까 일곱 빛깔의 층계를 딛고 오르면 천국에 이를 수 있을까 그분이 저 높은 하늘 어디에 저리 고운 사다리를 숨겨 두셨는지, 무슨 일에 쓰시려고 저리 큰 꽃 사다리를 마련해 두셨는지, 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네 커다랗게 동그라미를 반쯤 그려서 색동옷을 입혀 놓았으니, 누구든 동심으로 돌아가지 않고서는 하늘로 갈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닐까, 맑게 갠 날이 아니라, 한 차례 비가 내리고 난 다음에 저리 고운 무지개가 놓이는 까닭은 참다운 눈물을 흘린 후에야 그분에게 갈 수 있다는 뜻이 아닐까. (2006년)

대표 시 2022.03.23

먼 곳을 바라보며/ 김 재 황

먼 곳을 바라보며 김 재 황 우리는 오늘도 열심히 걸어간다, 길이 너무 머니 먼 곳을 바라보며 외롭게 모두 걸음을 옮긴다, 달빛을 벗 삼아서 밤에만 떠나는 길 긴 그림자가 내 뒤를 따르고, 조심스레 고요만 밟고 가는데 누웠던 들꽃들이 하얗게 잠을 깬다, 우리는 너무 힘든 길을 걷고 있다 그것도 넓은 들길이 아니라 좁고 험한 산길이니, 불 켠 초롱꽃 한 송이 멀리 바라보며 부지런히 앞으로만 줄곧 간다, 먼 밤길을 기쁘게 걸어가는 그곳 동구 밖 느티나무 아래에서 그분이 기다리고 계실 것임을 우리가 모두 뜨겁게 믿고 있다. (2006년)

대표 시 2022.03.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