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 시 154

싱크로 나이즈드 스위밍/ 김 재 황

싱크로나이즈드 스위밍 김 재 황 불쑥 물 위로 솟은 연꽃이 활짝 웃으며 살짝 숨을 들이마신다, 바람이 잔가지를 켜서 들려주듯 가느다란 음곡에 맞추어 아름다운 율동을 그려낸다, 물은을 안고 떠 있는 일이 어찌 쉽겠는가, 남몰래 연꽃도 뛰어가고 있다 넓게 펼친 연잎 그 아래에서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는 발, 발, 발 안 보이는 삶도 꽃과 하나로 향기를 둥글게 날려 보내고 있다, 여기저기 그들만이 알게 자리를 잡고 한 동작으로 벌이는 연꽃들의 춤 보는 사람마저 매우 길게 숨이 멎는다. (2006년)

대표 시 2022.03.22

오늘은 중복/ 김 재 황

오늘은 중복 김 재 황 오, 무섭구나, 찌는 듯한 더위 그래 이름처럼 나서려고 하거든 마음껏 푹푹 삶아 봐라, 이웃집 멍멍이는 멋모르고 자꾸 짖는데 오늘을 기화로 비명횡사한 닭들은 또 얼마나 많겠느냐 용감하게 더위와 싸우는 젊은이도 있다만, 무서운 그놈은 피하는 게 상책이라, 넓게 내린 느티나무 그늘에 노인들이 나와 앉았다 옳거니, 그 자리에는 잘 익은 수박이 제격 칼만 대면 쩍 벌어지는 그 붉디붉은 가슴이여 그래도 댓살 박힌 둥글부채 하나는 반드시 손에 들고 있어야 한다. (2006년)

대표 시 2022.03.22

큰 숨쉬기 느린 걸음/ 김 재 황

큰 숨쉬기 느린 걸음 김 재 황 끝까지 졸아들었던 강의 가슴이 다시 불룩하게 커지는 게 마치 숨쉬기하는 듯이 보인다, 그렇다, 큰 강은 일 년에 한 번 숨 쉰다, 그러니 그 폐활량이 얼마나 크랴, 숨을 가슴에 모았다가 입 밖으로 낼 때 또 그 소리는 얼마나 우렁차랴, 들이쉬고 내쉼이 깊을수록 목숨도 길어진다고 하는데, 그 강은 어느 날까지 걸음을 이어갈 수 있겠는가 살다가 숨이 멎은 사람들 재가 된 몸을 강물에 뿌리는 것은 느리고 긴 숨쉬기를 함께하려는 뜻일까, 강을 빚은 그분의 깊은 마음 기쁘게 노래하며 따라가려는 뜻이네. (2006년)

대표 시 2022.03.22

오솔길로 들어서면/ 김 재 황

오솔길로 들어서면 김 재 황 서둘러 들어서면 언제나 거기 가난한 손으로 어둠을 쓸고 있는 솔바람이 꼭 먼저였다 마음만 바쁜 내 발걸음에 떨어져 구르던 아픔들이 차였다, 물소리가 바위틈에서 흘러나오고 풀잎 같은 얼굴들이 짝짝 손뼉을 쳤다, 휘파람새는 잘 닦인 구슬이었다 내가 깊은숨을 내쉴 때면 하늘에서 흰 구름이 마냥 펄럭거렸다, 노래를 모두 듣고 난 나무들은 어느 사이에 키가 훌쩍 자라 있었다 놀라서 주위를 둘러보자 흰 손이 내 어깨를 툭툭 쳤다 ‘팔 올리고 하늘 보기’를 끝내고 나면 갈 길은 멀리 벋어서 구불거렸고 나는 늘 옷깃을 여며야 했다. (2006년)

대표 시 2022.03.21

저 하늘 지붕 아래/ 김 재 황

저 하늘 지붕 아래 김 재 황 전에 시골에서 소나기를 만났을 때 처마 밑으로 피했던 적이 있다, 한 발짝 앞에서는 세찬 빗줄기가 물비린내를 물씬 풍기며 쏟아졌으나 나는 오히려 아늑함을 즐겼다, 그렇게 오래 그곳에 머물고 싶었다 그런 자리가 그리 쉽게 내 눈에 띌 리는 없겠지만, 그날 이후로 나는 틈만 생기면 사방팔방 땀나게 그런 곳을 오직 찾아다녔다, 그런데 지난봄 어느 날이었던가 우리 집의 야트막한 처마 밑에 한 쌍의 젊은 제비가 가볍게 날아와서 진흙을 물어다가 둥지를 지었는데 그것을 보는 그 순간에 무릎을 쳤다, 이미 나는 그분의 고대광실 큰 지붕 아래에 터를 잡았느니 믿음의 보금자리에 잘살고 있느니. (2006년)

대표 시 2022.03.21

그리는 침묵으로/ 김 재 황

그리는 침묵으로 김 재 황 어쩌면, 작년에 만났던 일월비비추는 나를 기억할지 모르는 일이지만 내가 올해에 다시 찾아간다고 해도 나를 반겨 맞지는 않을 듯싶다 그것은 아무래도 나와 그가 살아가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가 무어라고 하든지 나는 그 웃는 얼굴을 지을 수가 없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이냐, 아예 눈감고 멀리에서 곱게 그려 보는 침묵으로 나는 일생을 살겠다. (2006년)

대표 시 2022.0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