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린 벤치/ 김 재 황 클린 벤치 김 재 황 바람이 걸러져서 불어오는 곳 그래서 무균상태인 곳 클린 벤치의 내부처럼 깨끗한 숲속 나는 이곳으로 시를 쓰려고 왔다, 순수 그대로 싹이 날 수 있게 내 손도 소독하고 그저 가슴에 간직한 말을 꺼내면 된다. (2001년) 대표 시 2022.03.17
관심법/ 김 재 황 관심법 김 재 황 나무와 친해지려면 관심법을 배워야 한다, 어디가 아픈지 무슨 생각에 잠겨 있는지 그리고 지금쯤 누구를 그리워하고 있는지 나무를 만지지 않고도 짚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나무를 통해 나의 길도 만날 수 있는 법 같은 길을 둘이 함께 걸어야, 친구가 될 수 있는 법. (2001년) 대표 시 2022.03.17
세상을 구하러/ 김 재 황 세상을 구하러 김 재 황 산 아래 안쓰럽게 스모그 속에 잠겨 있는 도시를 향해 푸른 갑옷의 떡갈나무가 벌떡 일어나서 산길을 내려간다, 세상을 구하러 가고 있다, 긴 창이 반짝이고 바람 앞에 달리는 말 울음소리 아직은 완전히 지워지지 않은 벌판에 나무의 발자국이 선명하다. (2001년) 대표 시 2022.03.17
시를 부른다/ 김 재 황 시를 부른다 김 재 황 나무에 기대고 앉아 종일 시를 읽으니 나도 나무인 양, 귀가 열린다, 눈감고 잎을 넓게 펼치니 어디선가 작은 새 한 마리 날아와서 지저귄다, 시를 부른다, 팔을 벌려서 크게 기지개를 켤 때마다 손끝에 닿아 읽히는 바람의 시. (2001년) 대표 시 2022.03.16
바람을 지휘한다/ 김 재 황 바람을 지휘한다 김 재 황 시골의 초등학교 텅 빈 분교에 들러 눈을 감으면 어릴 적, 귀에 익은 작은 손풍금 소리가 날아온다, 더욱 고요와 손을 꼭 잡으면 높은음자리표들이 깡충깡충 뛰어온다, 동시에 어린 소리들이 모두 모여들어, 온 교정이 떠들썩해도 그렇듯 잘 어울리는 것은 저 마당 가의 느티나무 덕택이다 그가 멋지게 바람을 지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2001년) 대표 시 2022.03.16
하늘길/ 김 재 황 하늘길 김 재 황 너무 소중하여 발이 닿지 않게 물구나무서서 걷는다, 날은 저물고 멀리 등불이 깜박거린다, 나뭇잎이 바쁘다. (2001년) 대표 시 2022.03.16
알 수 없는 몸짓/ 김 재 황 알 수 없는 몸짓 김 재 황 나무의 가려운 곳을 긁어 주려고 그 등에 손을 대었다, 너무 두껍고 또 갈라져 있어서 나는 몸짓을 읽을 수 없다, 홀로 바람과 비비며 살아가는 길이 산속으로 깊이 숨는다. (2001년) 대표 시 2022.03.15
어느 봄날에/ 김 재 황 어느 봄날에 김 재 황 얼음이 풀리기가 무섭게 나무가 가슴에 두른 나이테를 한 칸 넓혔다 시린 내력을 지니고 꽃이 얼굴을 내미는 날 바람만 가득한 이 세상에서도 실뿌리가 돋는다. (2001년) 대표 시 2022.03.15
달빛 한 대접/ 김 재 황 달빛 한 대접 김 재 황 나의 벗, 이성선 시인이 이 세상을 마지막으로 밟고 간 곳 설악산 백담계곡 첫 번째 웅덩이에 그리움의 목마름을 띄웠네 그래도 타는 마음을 안고 개울가의 언덕으로 오르니 늘은 참나무 그 벌레 먹은 잎들이 내게 건네는 그의 유품 뼈가 시린 달빛 한 대접. (2001년) 대표 시 2022.03.15
눈감고 시 한 수/ 김 재 황 눈감고 시 한 수 김 재 황 산에 오르면 저 아까시나무처럼 나도 그렇게 서 있고 싶어지네 꽃이 필 때는 꽃향기에 취해 흔들리고 잎이 질 때는 잎 구르는 소리 따라 웅얼거리고 흰 눈이 내리면 저 아까시나무처럼 눈감고 시 한 수를 짓고 싶네. (2001년) 대표 시 2022.0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