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고시조 감상 419

배골하 섧다하야/ 고 응 척

394. 배골하 섧다하야/ 고 응 척 [원본] 배골하 섧다하야 畵餠이 긔 됴호랴終日 談河인달 止渴을 엇지하료진실로 富潤屋하면 窮타한달 얻더하료.   [역본] 굶주려서 섧다 하여 그림의 떡 뭐가 좋아하루 내내 잇는 얘기, 목마름을 어찌 끝내재물로 집을 빛내면 가난해도 어떤가.   [감상]   고응척(高應陟 1531~ 1605)은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시인이다. 자(字)는 ‘숙명’(叔明)이고 호(號)는 ‘두곡’(杜谷) 또는 ‘취병’(翠屛)이라고 한다. 1561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였고, 이듬해 ‘함흥교수’가 되었으나 1563년 사직한 뒤에 한동안 시골에 묻혀 살았으며 1595년 풍기군수 등을 역임하고 낙향하였으며 1605년 경주부윤으로 부임했으나 바로 사임했다고 한다. 그의 시조는 ‘두곡집’에 28수가 전하고..

두 귀를 넙게하니/ 고 응 척

393. 두 귀를 넙게하니/ 고 응 척 [원본] 두 귀를 넙게하니 閑中에 今古이로다두 눈을 발게하니 靜裡에 乾坤이로다하말며 豁然處에 올라면 日月인달 멀니까.   [역본] 두 귀를 넓게 하니 한가함에 예와 지금두 눈을 밝게 하니 고요함에 하늘과 땅하물며 트인 곳 오르면 해와 달도 멀겠냐.   [감상]   고응척(高應陟 1531~ 1605)은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시인이다. 자(字)는 ‘숙명’(叔明)이고 호(號)는 ‘두곡’(杜谷) 또는 ‘취병’(翠屛)이라고 한다. 1561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였고, 이듬해 ‘함흥교수’가 되었으나 1563년 사직한 뒤에 한동안 시골에 묻혀 살았으며 1595년 풍기군수 등을 역임하고 낙향하였으며 1605년 경주부윤으로 부임했으나 바로 사임했다고 한다. 그의 시조는 ‘두곡집’에 2..

閑居屋漏中에/ 고 응 척

392. 閑居屋漏中에/ 고 응 척 [원본] 閑居屋漏中에 忌憚업산 져 사람아너 속고 남소기니 긔 므스일 그러한다아마도 配天地하사 나해 됴케 산달 얻떠료.    [역본] 한가한 집 새는 비에 안 꺼리는 저 사람아너 속고 남 속이니 그 무슨 일 그러하냐 어떨까 세상과 짝하여 나와 좋게 사는 게.   [감상]   고응척(高應陟 1531~ 1605)은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시인이다. 자(字)는 ‘숙명’(叔明)이고 호(號)는 ‘두곡’(杜谷) 또는 ‘취병’(翠屛)이라고 한다. 1561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였고, 이듬해 ‘함흥교수’가 되었으나 1563년 사직한 뒤에 한동안 시골에 묻혀 살았으며 1595년 풍기군수 등을 역임하고 낙향하였으며 1605년 경주부윤으로 부임했으나 바로 사임했다고 한다. 그의 시조는 ‘두곡집’에..

날이 저물거날/ 권 호 문

391. 날이 저물거날/ 권 호 문 [원본] 날이 저물거날 나외야 할닐 업서松關을 닫고 月下애 누어시니 世上애 뜻글마음이 一毫末도 업다.   [역본] 하루가 저무니까 도무지 할 일 없어소나무 문 아예 닫고 달빛 아래 누웠으니세상에 티끌 마음이 한 털끝도 없구나.   [감상]   권호문(權好文 1532~ 1587)은 조선 선조 때의 학자이다. 본관은 안동(安東), 자(字)는 ‘장중’(章仲)이고 호(號)는 ‘송암’(松巖)이다. 1561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청성산(靑城山) 아래에 ‘무민재’(無悶齋)를 짓고 은거했으며, 이황(李滉)을 스승으로 모셨는데 동문들은 그의 학행을 높이 평가하였다고 한다. 훗날, 내시교관(內侍敎官) 등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관물당(觀物堂)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이는, 한..

어와 뎌 족해야/ 정 철

392. 어와 뎌 족해야/ 정 철 [원본] 어와 뎌 족해야 밥업시 엇디 할꼬 어와 뎌 아자바 옷 업시 엇디할꼬 머흔 일 다 닐러사라 돌보고져 하노라. [역본] 슬프다 저 조카여 밥 없이 어찌할까 슬프다 저 아재여 옷 없이 어찌할까 궂은 일 모두 말해요 돌보고자 합니다. [감상] 정철(鄭澈 1536~ 1593)은 조선 중기의 문인이며 문신이다. 본관은 연일(延日), 자(字)는 ‘계함’(季涵)이고 호(號)는 ‘송강’(松江)이다. 1561년에 진사시에 1등을 하고 이듬해에는 문과 별시에 장원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여러 관직을 지내고, 45세 때에 강원도관찰사가 되었을 때 가사문학의 대가로서의 기질을 발휘했다고 한다. 그 후 55세 때는 좌의정에 올랐고 인성부원군(寅城府院君)에 봉하여졌다. ‘어와’는 ‘아!..

三曲은 어드매오/ 이 이

389. 三曲은 어드매오/ 이 이 [원본] 三曲은 어드매오 취병에 닙 퍼졋다 綠樹에 山鳥난 下上其音 하난 적에 盤松이 바람을 바드니 녀름 景이 업세라. [역본] 셋째 경치 어디인가 병풍 절벽 감싸는 잎 산의 새는 녹색 나무, 그 아래 위 우짖을 때 가로 솔 받은 바람에 여름 빛이 없구나. [감상] 이이(李珥 1536~ 1584)는 조선 중기의 추앙받는 학자이다. 자(字)는 ‘숙헌’(叔獻)이고 호(號)는 ‘율곡’(栗谷) ‘석담’(石潭) ‘우재’(愚齋) 등이라고 한다. 즉, 신사임당의 아들이다. 1564년 신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기까지 모두 9번이나 장원을 하였고, 좌랑이나 지평 등을 지내고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582년부터 판서 등을 역임하고 일단 사직했다가 그 후에 다시 부사와 이조판서에 임..

二曲은 어드매오/ 이 이

388. 二曲은 어드매오/ 이 이 [원본] 二曲은 어드매오 花岩에 春晩커다 碧波에 곳츨 띄워 野外로 보내노라 사람이 勝地를 모로니 알게 한들 엇더리. [역본] 둘째 경치 어디인가 꽃 핀 바위 온 그 늦봄 푸른 물에 꽃을 띄워 들판으로 보내는데 사람이 좋은 곳 모르니 알게 하면 좋겠구나. [감상] 이이(李珥 1536~ 1584)는 조선 중기의 추앙받는 학자이다. 자(字)는 ‘숙헌’(叔獻)이고 호(號)는 ‘율곡’(栗谷) ‘석담’(石潭) ‘우재’(愚齋) 등이라고 한다. 즉, 신사임당의 아들이다. 1564년 신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기까지 모두 9번이나 장원을 하였고, 좌랑이나 지평 등을 지내고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582년부터 판서 등을 역임하고 일단 사직했다가 그 후에 다시 부사와 이조판서에 임명..

一曲은 어드매오/ 이 이

387. 一曲은 어드매오/ 이 이 [원본] 一曲은 어드매오 冠岩에 해 비쵠다 平蕪에 내 거드니 遠山이 그림이로다 松間에 綠罇을 노코 벗오난양 보노라. [역본] 첫째 경치 어디인가 갓바위에 해 비친다 찹초 들이 안개 걷자 저 먼 산은 그림 같다 숲 새에 술독을 놓고 벗이 오나 보겠다. [감상] 이이(李珥 1536~ 1584)는 조선 중기의 추앙받는 학자이다. 자(字)는 ‘숙헌’(叔獻)이고 호(號)는 ‘율곡’(栗谷) ‘석담’(石潭) ‘우재’(愚齋) 등이라고 한다. 즉, 신사임당의 아들이다. 1564년 신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기까지 모두 9번이나 장원을 하였고, 좌랑이나 지평 등을 지내고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582년부터 판서 등을 역임하고 일단 사직했다가 그 후에 다시 부사와 이조판서에 임명되었..

靑山은 내 뜻이오/ 황 진 이

386. 靑山은 내 뜻이오/ 황 진 이 [원본] 靑山은 내 뜻이오 綠水난 님의 情이 綠水 흘러간들 靑山이야 變할손가 綠水도 靑山 못니저 우러 예어 가난고. [역본] 푸른 산은 내 뜻이요 초록 물은 임의 정이 초록 물 흘러가도 푸른 산이 바뀔 건가 그 물도 이 산 못 잊어 긴 울음을 끄느냐. [감상] 황진이(黃眞伊)는 생몰 연대가 확실하지 않다. 조선 중기의 시인이자 기녀로 중종과 명종 때에 활동했다고 한다. 다른 이름은 ‘진이’(珍伊) 또는 ‘진랑’(眞娘)이고, 기생 이름은 ‘명월’(明月)이다. 시와 그림 외에 춤도 잘 추었고 학문도 뛰어났다. 초장을 본다. ‘청산’은 글자 그대로 ‘푸른 산’인데, 황진이 자신의 마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 반면에 ‘녹수’는 ‘초록 물’인데, ‘임의 정’을 가리키고 있다...

갈 때난 靑山이려니/ 작가 미상

385. 갈 때난 靑山이려니/ 작가 미상 [원본] 갈 때난 靑山이려니 올 때 보니 黃山이로다 산천도 변하거든 낸들 아니 늙을쇼냐 두어라 저리 될 人生이니 아니 놀고 어이리. [역본] 갈 때는 여름 산이 올 때 보니 이 가을 산 산과 내도 바뀌는데 나만 어찌 안 늙을까 저리 될 우리 삶이니 아니 놀면 어찌 할까. [감상] 초장을 본다. ‘청산’은 ‘푸른 산’인데, ‘여름 산’을 가리키고, ‘젊음’을 나타낸다. 그 반면에 ‘황산’은 ‘누른 산’이고 ‘가을 산’을 가리키며 ‘늙음’을 나타낸다. 떠날 때는 ‘푸른 산’을 보고 떠났는데 돌아오면서 보니 그 산이 ‘누른 산’으로 변해 있었다. 그만큼 세월이 흘렀음을 가슴으로 슬퍼하고 있음을 알겠다. 산이라는 게 우리에게 믿음을 주고 있는 존재인데 그리 변한 모습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