뽑은 시조 321

재첩국/ 김 재 황

재첩국 김 재 황 젊어서 부산으로 출장 간 적 있었는데 자정에 잠을 찾고 첫새벽이 밝았을 때 구슬픈 행상 외침이 깊은 꿈을 깨웠네. 밤늦게 출출해서 술 한 잔을 마셨는데 내오는 아침상에 비로 이 국 놓였으니 온천장 묵은 여인숙 고르는 일 잘했네. 마시면 가슴 속이 시원한 게 제일인데 씹히는 조갯살에 번져 오는 바다 냄새 늙어서 등대를 보듯 내 마음이 달렸네. (2022년)

뽑은 시조 2022.03.26

모닥불/ 김 재 황

모닥불 김 재 황 횡성에 사는 벗을 찾았을 때 피웠는데 모처럼 만났으니 불꽃 축제 없을 수야 주위에 둥글게 앉아 손뼉 치며 놀았지. 모두가 늙었어도 불을 쬐니 피가 끓고 막걸리 한 사발에 호기 또한 넘쳐나서 드높게 고대 구호를 주먹 쥐고 불렀지. 모이면 나뭇가지 모아 놓고 불 지피듯 청춘도 우리끼리 살릴 수는 왜 없을까, 솔잎을 태우진 말게 연기 땜에 눈물이-. (2022년)

뽑은 시조 2022.03.25

불이문을 지나니/ 김 재 황

불이문을 지나니 김 재 황 참말은 어딜 가든 하나밖에 없을 텐데 어째서 문이란 말 꾹꾹 눌러 담았을까, 하기야 세상 사람은 거짓말을 곧잘 해. 어딘가 문을 지나 여기 살게 되었는데 말마다 다르다니 다른 문이 또 있는지, 가슴을 환히 밝히면 보이려나 그 문이. 죽음이 무엇인지 늙었는데 알 수 없고 어떤 게 삶인지도 가늠조차 못 하는데 절 안에 들어서자니 그게 모두 하나래. (2021년)

뽑은 시조 2022.03.25

눌은밥/ 김 재 황

눌은밥 김 재 황 옛날에 부엌에서 장작으로 밥 지을 때 맨 아래 밑바닥에 눌어붙은 찌끼 있어 거기에 물을 부으면 바로 이게 된다네. 얼마나 구수한지 코가 먼저 입맛 끌고 서러움 깊더라도 그냥 술술 목을 넘지 하기야 간장 하나면 바람처럼 식사 끝. 게다가 우리 몸을 아주 좋게 만드는데 알맞게 태웠기에 온갖 독을 씻어 준대 큰 면역 길러야 하니 안성맞춤 아닌가. (2021년)

뽑은 시조 2022.03.25

숲길/ 김 재 황

숲길 김 재 황 언제나 지친 나를 손짓으로 부르는 곳 가볍게 차려입고 발 빠르게 찾고 나면 바람이 지니고 와서 펼쳐 놓는 얘기들. 빗줄기 내리고 난 다음에야 내민 얼굴 무언가 숨기는 꿈 젖어 있는 숨결인데 고와도 마음 못 주는 안타까움 깃든다. 밤이면 깔린 고요 밟고 가는 그림자여 멀찍이 따르는데 자꾸 솟는 몇 물음들 얼마나 더 마주해야 하얀 답이 보일까. (2021년)

뽑은 시조 2022.03.24

노를 젓는다/ 김 재 황

노를 젓는다 김 재 황 어둠이 깔렸으니 달을 보며 길을 물어 잔잔한 호수에서 연밥 따러 노를 젓네, 물결에 비친 그림자 더욱 힘껏 앞으로. 손으로 밀고 당겨 미끄러운 흐름 따라 강물을 거슬러서 갈대 찾아 노를 젓네, 불어온 바람 한 자락 시원하게 이마로. 떴다가 잠겼다가 거센 파도 타고 앉아 펼쳐진 바다에서 풍란 보러 노를 젓네, 가슴에 담은 날갯짓 쉬지 않고 섬으로. (2021년)

뽑은 시조 2022.03.24

자주 찾는 국밥집/ 김 재 황

자주 찾는 국밥집 김 재 황 큰길을 가로질러 빈 골목을 조금 가면 다 낡은 모습으로 간판조차 없는 양옥 점심을 먹을 때에는 자주 찾는 곳이다. 얼마나 목이 메는 일을 많이 당했던가, 푸는 밥 식었으나 펄펄 끓인 국물이면 말없이 꾹꾹 말아서 후후 불며 먹었지. 세월을 잊은 듯이 붙인 값은 그대론데 밑지면 어떡하나 오는 손이 되레 걱정 좀 이른 끼니때라도 가는 곳은 여기다. (2021년)

뽑은 시조 2022.03.23

보름달/ 김 재 황

보름달 김 재 황 어둠이 깊었는데 잠은 어찌 오지 않나, 창밖을 바라보면 활짝 웃음 짓는 얼굴 갑자기 콕 찔러 봐도 그대밖에 모른다. 둥글게 다가오니 모든 길은 인정 깊고 밤새껏 걸었으나 닿지 못할 먼먼 사랑 정녕코 잊을 수 없는 그대만을 그린다. 어디에 터를 잡고 무슨 일을 가졌는지 누구와 짝이 됐고 몇 아이를 두었는지 오늘은 내 마음 열고 그대에게 묻는다. (2021년)

뽑은 시조 2022.03.23

동아줄/ 김 재 황

동아줄 김 재 황 여기가 처음부터 이런 곳이 아닐 텐데 살면서 지은 죄가 깊게 쌓여 수렁이네, 구원을 받는 길이란 다만 하나 줄밖에. 욕심에 눈이 멀어 잘못 많이 저질러도 불쌍히 여기셔서 살리는 일 오직 그분 서둘러 하늘의 줄을 꼭 잡아야 한다네. 무겁게 매달린 몸 후회한들 소용 있나, 날마다 베풂으로 가난함을 더 이룰 것 믿음만 가질 뿐이네 튼튼한 줄 얻자면. (2021년 11월 11일)

뽑은 시조 2022.0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