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을 떠올리게 하는 갈대
김 재 황
나는 만주국 봉천에서 태어났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바로 심양(瀋陽)입니다. 이렇듯 출생지는 심양이지만, 그 곳이 결코 고향이랄 수는 없습니다. 경기도 파주군 임진면 임진리가 나의 조상이 오래 누려 살던 곳입니다. 그리고 어린 시절을 내가 보낸 곳이기에 누가 뭐래도 나의 고향은 파주입니다.
나는 고향에서 서당에 다니던 기억이 납니다. 서당은 어느 집의 사랑채를 빌어서 사용했습니다. 열 대여섯 명의 아이들이 함께 공부를 했습니다.
서당 훈장께서는 어찌나 엄하셨던지, 공부할 때에 졸거나 그날 배운 것을 외지 못하면 가차없이 회초리를 내리치셨습니다. 그 때문에 모든 아이들이 서당에 가기를 두려워했는데, 나는 어쩐 일인지 신바람이 나서 다녔습니다. 고작 천자문(千字文)도 채 못뗀 짧은 기간이었지만 말입니다.
내 고향인 임진리에는 조국 분단의 아픔을 상징하는 임진강이 흐르고, 그 강변에는 우리의 마른 가슴처럼 슬픔을 서걱이는 갈대들이 무성하게 자라납니다.
바람은 울먹이며 늪 가에서 서성대고
머리 푼 갈대꽃이 혼이 나가 흔들려도
응시의 멍든 역사는 침묵 속에 흐른다.
절규를, 그 애증을 흩뿌려서 흩던 강물
허전한 임진각은 심연으로 잠기는데
세월은 회류의 꿈을 폭포처럼 쏟는다.
휘돌아 내린 굽이 가늘한 목줄이 죄어
다만 물길 하나로는 풀지 못한 한이기에
나루터 빈 배 한 척만 뼈가 삭고 있었다.
―졸시 ‘임진강에서’
언제, 어디에서든지 갈대만 만나면, 나는 불현듯 고향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리고는 무엇보다도 먼저 갈대의 마디에 노란 빛을 띈 흰수염뿌리를 보고, 지금 고향에 잠들고 계신 할머니를 몸살나게 그리워합니다.
나는 어린 시절을 할머니와 함께 고향에서 살았습니다. 어린 나이에 부모와 떨어져 있는 나를, 할머니는 무척이나 사랑하셨지요. 나는 밤마다 할머니를 졸라서 옛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할머니는 주름진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으시며 나를 꼬옥 안으시고는 내가 지쳐서 잠이 들 때까지 이야기를 계속하셨습니다.
하루는 내가 친구와 셋이서 개고마리 둥지를 보러 갔다가 그만 옻이 오른 적이 있었습니다. 그 날 저녁이 되었을까 해서 몸이 조금씩 가려워지기에 몸을 긁적거리고 있으려니까, 할머니께서 보시고는 깜짝 놀라셨습니다.
“에그머니나, 얘가 옷이 올랐잖아.”
할머니는 부리나케 가셔서 물을 끓이시는 한편, 닭장으로 가시더니 닭 한 마리를 잡아오셨습니다. 그런 사이에도 내 몸은 더욱 부어올랐는데, 목이며 겨드랑이며 사타구니가 더욱 심했습니다. 할머니께서는 닭을 삶으셔서 그 국물을 내 온몸에다 발라 주셨습니다.
“고기와 국물을 많이 먹거라.”
할머니가 이르시는 대로, 이게 웬 고기냐 싶어, 나는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렇지만 처음에 그리 맛있던 고기도 금방 물리게 되었고, 나중에는 역겨워졌습니다. 지금도 닭고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또, 갈대가 줄기를 곧게 세우고 한 자리에 여러 대를 뭉쳐서 뽑아 내고 있는 것을 보면, 나는 기골이 장대하셨던 큰아버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고향 마을에는 자그마한 저수지가 하나 있었습니다. 나는 가끔 그 저수지를 찾아가서 잠자리도 쫓고 물방개도 건지며 놀곤 하였는데, 하루는 가 보니까, 큰아버지께서 저수지의 둑을 수리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 때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뱀 한 마리가 큰아버지 뒤쪽의 갈대숲에서 기어나오는 게 아닙니까.
“큰아버지, 뱀이 있어요!”
내가 소스라치게 놀라서 소리를 지르니까, 큰아버지께서 뒤를 돌아보시고는, “이 놈 봐라.”하시며 삽으로 뱀을 찍어 죽이셨습니다. 나는 어찌나 무섭고 징그러웠던지, 그 이후로는 그 저수지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습니다. 혹시나, 죽은 뱀의 부인이나 새끼들이 원수를 갚으려고 벼르고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뿐만이 아니지요. 9월 경에 갈대의 많은 가지가 갈라져서 다갈색의 잔이삭을 밀생시키는 원추화서(圓錐花序)는, 우리 동포들이 한 목소리로 소망하고 있는 통일의 꿈을 되새기게 합니다.
‘철마는 달리고 싶다.’ 지금도 고향의 끊어진 철길 위에는 달리다가 만 철마가 홀로 남아서 무정한 세월 속에 녹슬고 있습니다.
그 언제쯤, 이 철마가 힘찬 기적을 울리며 남으로, 또는 북으로 달릴 수 있을까요. 고향을 생각할 때, 또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게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동구 밖에서 묵묵히 동네를 지켜 주고 있던 나이 많은 느티나무입니다.
내가 일곱 살 때의 일인 것 같습니다. 나는 누이동생과 함께 할머니를 모시고 고향에서 살고 있었지요. 그 때는 모두 끼니가 어려웠는데, 게다가 내 누이동생은 입까지 짧아서 영양실조가 되어 얼굴이 항상 노랗게 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부락의 어른 몇이 동구 밖 느티나무 아래에서 불을 피워놓고 무엇인가 맛있게 구워 먹고 있었습니다. 누이동생이 그 냄새를 맡고는 먹고 싶다고 할머니를 졸라댔습니다. 마침내 할머니께는 그 사람들에게 가셔서 몇 마디 말씀을 나누시는가 싶더니 그냥 빈 손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왜 그냥 오셔요?”
누이동생이 묻는 말에,
“글쎄, 구렁이를 구워 먹는다지 뭐냐.”
할머니는 몸서리를 치셨습니다. 나도 섬뜩하여 뒤로 한 걸음 물러섰는데, 철부지 내 누이동생만은 여전히 떼를 쓰는 게 아니겠습니까.
“구렁이면 어때, 좀 얻어다 줘.”
할머니와 나는 그저 서로 얼굴만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나는 시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것을 참으로 다행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지금도 눈만 감으면, 산이며 강이며 숲이며 들이 선하게 눈 앞에 나타납니다.
하지만 지금은 옛날의 그 고향이 없습니다. 임진강 나루는 그 직분을 박탈당한 채로 시름없이 잡초만 무성하고, 내 어릴 적에 뛰놀던 동네는 동란 중에 폭격을 맞아서 집들이 모두 날아가 버리고 빈 터만 남았으며, 내가 그토록 무서워하던 연못은 물이 말라 버려서 그 흔적만 겨우 찾을 수 있을 뿐입니다.
지금은 할머니와 큰아버지께서 차례로 돌아가시어 고향 동네 뒷산에 잠들어 계십니다. 요즘에는 고작 일년에 한두 번 성묘를 가게 되지만, 갈 때마다 더욱 황폐해지기만 하는 고향이 안쓰러워서 눈시울을 붉히게 됩니다.
우연한 기회에 고향의 임진강을 건너가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강 건너는 그야말로 갈대가 우거져서 숲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바람이 불 적마다 서걱이는 갈대의 몸짓은 통일을 위한 바로 그것이었지요.
수많은 물새떼 날아가고 없는
쓸쓸한 민통선
우리 슬픔이 물줄기를 이뤄 흐르는
임진강을 가로지른 리비교(橋) 건너에
수심처럼 갈대가 숲을 이루고 있습니다
더위를 물고 목마름을 삼키며
일어서 보아도 흙 먼지만 날리는 자리
서걱이는 목숨이여
왜 가슴은 그토록 여위어만 갑니까
시린 달빛을 안고 누웠다가
뜨거운 태양을 업고 일어서서
푸른 신화를 그린다
―졸시 ‘임진강 건너 갈대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