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로 살기가 참으로 어렵다
김 재 황
예나 이제나 선비로 살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나의 경우로 보아도 가난한 문인으로 살아온 긴 세월이 참으로 조마조마하였습니다. 하기는 경제적 형편이 좋거나 사회적 기반이 좋은 문인들은 쉽게 그 명성을 날리고 목에 힘을 주고 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역시 선비라면 청빈함을 가장 큰 덕목으로 삼아야 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청빈’은, 게으르기 때문에 가난한 게 아니라, 깨끗하기 때문에 가난하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깨끗하게 많은 돈을 벌기는 어렵습니다.
언제인가, 여러 문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과거 일본에 짓밟혔던 시대에 친일한 문인들의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의 재주는 아까우나, 그를 존경할 수는 없다.”
그러자, 그 곳의 한 선배 문인이 얼굴이 벌겋게 되어서 나에게 반문했습니다.
“당신이 그 시대에 살았다면 친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는가?”
나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대꾸하지 않았습니다. 어찌 이런 논리를 펼 수 있단 말입니까. 아무리 옹호를 한다고 하여도 그 정도가 있는 법입니다. 이건 억지입니다. 물론, 문인이라고 모두 선비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스스로 ‘글쟁이’라고 비하하는 사람들도 많은 세상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에게까지 선비의 기개를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오늘 나는 다시 매천(梅泉) 황현(黃玹) 선생님을 생각합니다. 1910년 8월,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강재로 병합되었을 때에 황현 선생님은 다음과 같은 절명시(絶命詩)를 남기셨습니다.
조수애명해악빈(鳥獸哀鳴海岳嚬)- 새와 짐승도 슬피 울고 바다와 큰 산도 찡그리니
근화세계이침륜(槿花世界已沈淪)- 무궁화 온 세상이 이제 가라앉아 망해 버렸다.
추등엄권회천고(秋燈掩卷懷千古)-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긴 세월을 생각하니
난작인간식자인(難作人間識字人)- 우리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서 선비 노릇하기 어렵다.
황현 선생님은 1855년에 전라남도 광양 서석촌에서 태어나셨다고 합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11살이 되었을 때에는 이미 아름답고 수준 높은 한시(漢詩)를 지으실 실 수 있으셨답니다. 특히 ‘통감강목’(通鑑綱目)을 줄줄 외울 정도로 탐독하셨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선생님은 19살이 되었을 때에 홀로 서울로 올라오셔서 당대의 논객들을 찾아다니시며 시와 역사인식에 대한 토론을 청하셨답니다. 시골뜨기 차림에 사팔뜨기인 황현 선생님의 모습은 그야말로 초라하기 그지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입에서 화산처럼 뿜어져 나오는 그 열정 어린 역사의식과 시는 당대의 선비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답니다.
나는 지금 선생님이 남기고 가신 역저 ‘매천야록’(梅泉野錄)을 읽으며 선생님을 생각합니다. 아니, 선생님을 만납니다. 과연 선생님은 선비의 도리를 다하신 분입니다. 하늘을 바라보아서 결코 부끄럽지 않을 분입니다. 위의 시를 남겨 놓으시고 난 후, 황현 선생님은 스스로 목숨을 끊기로 결심하셨습니다. 황현 선생님은 미리 준비한 아편 세 덩어리를 꺼내 놓으셨답니다. 그러나 결행하기가 그리 쉽지는 않으셨답니다. 그게 인지상정입니다. 선생님은 아편을 입에 댔다 뗐다 하시기를 세 차례나 거듭하셨다고도 전합니다. 마침내 선생님이 숨을 거두시고 난 다음에 선생님이 가족들에게 남기신 ‘유자제서’(遺子弟書)가 공개되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게는 꼭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 그러나 조선이 선비를 기른 지 500년이 되었는데도 나라가 망하는 날에 한 사람도 목숨을 끊는 이가 없다면 가슴 아픈 일이고도 남는다. 내가 위로는 하늘이 지시하는 아름다운 도리를 저버리지 아니하였고 아래로는 평소에 읽은 책속의 말씀이 어긋나지 않았다. 이제 깊이 잠들려고 하니 참으로 통쾌하기 그지없다. 그러니 너희들은 너무 슬퍼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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