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를 시작하며
예기(禮記)는 오경(五經) 중 하나이다. 그런데 왜 ‘예경’이 아니고 ‘예기’일까. 이는 ‘예’(禮)에 대한 기록 또는 주석(註釋)을 나타내기 때문이라고 한다.
알다시피 공자는 하 나라와 은 나라와 주 나라 삼대의 문물제도와 의례 및 예절 들을 집대성하고 체계화를 이루었다. 또한 논어(論語)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제자들에게 예를 익히고 실천하도록 가르침을 주었다. 공자가 세상을 떠나고 난 후에 제자들은 여러 나라로 흩어지게 되었고 그들에게서 많은 사람들이 공자의 가르침을 배우게 되었다. 그럼으로써 공자의 예에 대한 기록은 쌓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많은 세월이 흐르고 난 후, 공자의 가르침을 잇는 후학들에 따라서 예설(禮說)들의 기록이 늘어나게 되었고, 한(漢) 나라 때가 되어서는 그 예설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예학(禮學)의 학자 또한 생겨나게 되었다. 그 중에 대덕(戴德)이나 대성(戴聖)이 있는데, 이들은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예설들을 수집하여 편찬한 사람들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은 숙질(대덕이 대성의 작은아버지) 사이이다.
한 나라 학자인 정현(鄭玄)의 ‘육예론’(六藝論)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지금 세상에서 행해지고 있는 예는 대덕과 대성의 학(學)이다. 대덕은 기(記) 85편을 전하였으니 곧 대대례(大戴禮)이고, 대성은 예(禮) 49편을 전하였으니 곧 ‘예기’(禮記)이다.” 대대례기는 흩어져서 일부가 없어지고 지금 알 수 있는 것은 40편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대대례기 중에서 49편을 정리하여 편찬한 것이 소대례기인지, 아니면 두 ‘예기’가 각각 별개로 편찬되어 전해졌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정현은 주석하면서 원전을 존중하였는데, 그 자세로 말미암아 “예는 바로 정학(鄭學)이다.”라는 말을 들었다. 당태종의 명을 받은 공영달(孔潁達)은 ‘오경정의’(오경정의)의 편수에 참여하였는데, 그는 정현의 주를 바탕으로 독자적인 정리를 하였다. 그 이후로 ‘예기’는 정현의 주와 공영달의 소가 존중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명 나라 호광(胡廣) 등이 칙명을 받아 찬집한 ‘예기집설대전’(禮記集說大全) 30권이 널리 읽혀졌고 판각도 되었다. ‘예기’가 우리나라에 전해진 시기는 분명하지 않다. 알려지기로는, 중국의 삼국지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이나 ‘주서’(周書) 등에 “서적으로 오경이 있다.”라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삼국시대 초기에 이미 수용되었다고 여겨진다. 우리나라 학자에 따른 주석은 고려 말에 권근(權近)의 연구 결실인 ‘예기천견록’(禮記淺見錄)을 시작으로 조선시대에 많은 주석서가 간행되었다.(글: 녹시 김 재 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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