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병훈련소에서
김 재 황
힘차게 하나둘셋넷 연병장을 다져 간다,
발맞춤이 땅 구르면 입맞춤은 하늘 닿고
소매로 땀내를 흩는 무등병들 그 행렬.
몇 분씩 휴식 아껴 화랑담배 입에 물면
눌러 쓴 철모 끈에 안보 그도 대롱거려
고향 녘 환한 낮달은 눈웃음을 짓는가.
황산벌에 퍼져 가는 총검술 그 기합 소리
무르팍이 깨진 만큼 높이 서는 간성이여,
이 밤도 꿈길의 별은 이마에서 빛난다.
(2002년)
(시작 노트)
1965년 2월에, 나는 고려대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러나 병무청의 사무 착오로 입대 통지서가 나오지 않았다.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한가하게 기다리고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궁리 끝에 훈련소로 직접 가서 현지입대를 했다. 나는 마침내 제1훈련소 29연대에 소속되었고, 2달 동안의 피나는 훈련이 시작되었다.
훈련을 무사히 마치고, 헌병학교로 가게 되었다. 그곳은 규율이 아주 엄했다. 벽마다 ‘삼 보 이상은 구보’라고 크게 써 붙여 놓았다. 새벽에 기상하여 십리나 되는 곳의 개울로 뛰어가서 세수하고 돌아왔다. 식사 시간은 30초였다. 나는 열심히 훈련에 임했다. 그 결과, 좋은 성적으로 헌병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그 때문인지, 나는 국방부 본청의 시설경비를 맡게 되었다. 제대 말년에는 국방대학원으로 파견되었는데, 그곳에서 전부터 알고 지내던 배태인 시조시인을 다시 만났다.
1967년 12월, 나는 병장으로 제대했다. 그리고 곧바로 취직시험 준비에 매달려야 했다. 마침 경기도농촌진흥원에서 4급 을류 농촌지도직 공무원을 모집하고 있었다. 나는 매일 중앙도서관으로 가서 문이 닫힐 때까지 시험공부에 몰두했다. 그리고 시험에 합격하여 포천군농촌지도소로 첫 발령을 받았다.
그토록 가고자 했던 시골로 가게 되어, 나는 기뻤다. 자청하여 오지의 책임을 맡고는,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즐겁게 일을 보았다. (200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