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쥬르, 나폴레옹

(41) 우리를 아끼는 사관이다

시조시인 2008. 10. 5. 06:46

(41)

  처음에 병사들은, 장교지만 어린 나폴레옹을 얕잡아보고 자기들끼리 뇌까리곤 했습니다. ‘뇌까리다’는 ‘자꾸 되풀이 말한다.’는 뜻으로 ‘아무렇게나 되는 대로 마구 떠드는 것’을 말합니다.

“어린애에게 명령을 받는 건 싫어.”

“겨우 16살이니 무얼 알고 있겠어.”

그러나 그들의 생각과는 달리, 나폴레옹이 앞장을 서서 궂은일을 하는 데에 병사들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나폴레옹은 우리와 함께 일한다.”

“나폴레옹은 우리를 아끼는 사관이다.”

병사들은 나폴레옹의 올곧은 마음을 진심으로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올곧다.’는 ‘바른 마음을 가지고 정직하게 살아가는 사람의 바르고 곧은 성품’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는, 실의 가닥 가닥을 이루는 올이 곧으면 천이 뒤틀림 없이 바르게 짜인다는 데서 나온 말입니다. ‘무엇이든지 반듯하다.’는 뜻을 지니고 있지요.

여기에서 문득 ‘칠종칠금’(七縱七擒)이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옛날 촉한(蜀漢)의 제갈량(諸葛亮), 즉 ‘공명’(孔明)은 맹획(孟獲)을 일곱 번 사로잡았다가 일곱 번 놓아주었습니다. 그는 다만 맹획의 진심어린 항복을 얻기 위해서였지요. 그러므로 윗사람은 아랫사람의 마음을 얻는 게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사관으로 근무하게 되면 급료를 받게 됩니다. 하급 장교의 그 얼마 되지 않는 급료를 쪼개어서 셋집의 방값을 내야 했습니다. 일반 사병은 부대의 숙소에서 ‘먹고 자는 것’을 제공받습니다. 하지만 장교는, 당직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영내에서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당직’(當直)은 본래 ‘조선 때에 의금부의 도사(都事)가 당직청에 번을 들던 일’을 뜻했으나, 지금은 근무하는 곳에서 숙직이나 일직 따위의 번을 듦, 또는 그 사람‘을 말합니다. 그리고 ‘영내’(營內)는 ‘병영의 안’을 나타냅니다.

또, 아침과 저녁을 해결할 돈도 필요했습니다. 물론, 장교도 낮에는 부대에서 근무해야 하니, 점심은 그 곳에서 해결이 되었겠지요. 여기에서 좀 생각해 볼 게 있습니다. ‘아침’과 ‘저녁’은 때와 끼니를 동시에 일컫는데, 오직 ‘점심’만 끼니 하나를 나타내는 말로 쓰이니 말입니다. ‘아침’이나 ‘저녁’은 순우리말입니다. 그러나 ‘점심’은 한자말입니다.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점심’(點心)은 ‘절에서 스님들이 수도를 하다가 시장기가 돌 때에 마음에 점을 찍듯이 아주 조금 먹는 음식’을 가리키는 말이었답니다. 그래서 ‘마음 심’(心) 자에 ‘점 점’(點) 자를 사용했습니다. 이처럼 점심은 ‘간단하게 먹는 중간 식사’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일반 백성들은 어떠하였을까요? 과연 그들도 그리 점심을 먹을 수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우리나라 일반 사람들이 하루 세 끼의 밥을 먹게 된 것은 극히 근세의 일이라고 합니다. 그 이전에는 아침과 저녁의 두 끼 밥만 먹었다는군요. 그러니 ‘점심’을 의미하는 순우리말이 없을 수밖에요.

우리나라 문헌에 점심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태종 6년의 실록입니다. 그 당시에 심한 가물이 계속되자, 임금이 백성의 급하지 않은 부역을 면해 주고, 각 관아에서는 점심을 폐하라는 전지를 내렸다고 합니다. 점심이라야, 간단한 간식과 ‘다시’(茶時)가 전부였겠으나, 일반 백성이 점심을 먹는다는 일은 생각하기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정조 때의 학자인 이덕무(李德懋)는, ‘앙엽기’(盎葉記)에 ‘한국인은 ‘조석2식’(朝夕二食)으로 한 끼에 5홉씩 하루 한 되를 먹는다.’고 기술하였습니다. 그리고 병조참판이었던 정의양(鄭義養)은, 양식비축을 상소하는 글에서 ‘조석2식’을 기준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하루 두 끼 중에 저녁보다는 아침을 더 중요하게 여겼답니다. 이유가 있지요. 우리나라는 벼농사 중심입니다. 그러니 아침 일찍부터 들에 나가서 일을 하려면 든든히 아침밥을 먹어야 했겠지요.

그렇듯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는 생활이었지만, 나폴레옹은 될 수 있는 대로 돈을 절약해서 어머니에게 보내기 위해 저금을 했습니다. 놀라운 효자입니다. 그 근검저축하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합니다. ‘근검저축’(勤儉貯蓄)은 ‘검소하게 생활하며 부지런하고 알뜰하게 하여서 돈을 모음’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프랑스에는 은행이 있었을지, 자못 궁금합니다.

우리나라에 근대적 은행제도가 도입된 것은, 1878년에 부산으로 일본의 제일은행이 들어오면서부터라고 합니다. 이 때부터 민족자본으로 설립된 은행이 곳곳에 생기기 시작했답니다. 즉, 1897년의 한성은행을 비롯해서 1899년에는 대한천일은행이 문을 열었습니다. 그 이후, 1909년 10월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이 세워지게 되었지요. 그러다가 1911년 3월에 조선은행으로 이름이 바뀌어서 제한된 중앙은행 업무와 일반은행 업무를 함께 보았고, 1950년 5월에 현대적 중앙은행으로서의 기능을 갖춘 한국은행으로 재발족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날마다 일기를 적고 있었습니다. 그 일기에는 그 당시의 어려운 상황이 다음과 같이 적혀 있습니다.

‘군인의 일과가 매우 고달프다. 더욱이 몸도 약해져서 밤에는 잠도 쉽게 들지 못한다. 어제도 오늘도 하루에 한 끼의 식사밖에 하지 못해서 몹시 지쳐 있다. 다만, 나는 군대의 일과 독서의 일로 즐거움을 삼을 뿐이다.’

하루에 한 끼만 먹으며 어찌 그 고된 군대의 일을 해낼 수 있었는지, 그저 놀랍기만 합니다. 나는 상상하기도 어렵습니다. 더군다나 장교의 신분이었으니, 배고픔을 쉽게 내색할 수도 없었을 겁니다. 그야말로, 형극의 길입니다. ‘형극’(荊棘)은 ‘나무의 가시’를 뜻하고, ‘고난’이나 ‘장애’ 따위를 비유하여 이르는 말입니다. 나도 ‘굶기를 밥 먹듯’했던 적이 있습니다. 물어볼 필요도 없이, 우리나라에서 전쟁이 일어났을 때였지요. 그 당시에 나이가 9살이었어요. 나는 부모와 떨어져서 할머니와 단둘이 피란을 하게 되었습니다. 난리가 일어났는데, 먹을 게 있을 리가 만무했습니다. 그 허기를 달랠 길이 없었습니다. ‘허기’(虛飢)는, 굶어서 ‘배가 몹시 고픔’을 이릅니다. 그 때 나는 이식위천을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이식위천’(以食爲天)이란, ‘살아가는 데 먹는 것이 가장 중요함’이라는 뜻입니다. (김재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