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현호색과 박재삼 시인
김 재 황
봄이 되어, 고향의 들길을 걷노라면, 어렵지 않게 만났던 들꽃이 있다. 그 이름은 들현호색. 그 여인의 입술을 닮은 꽃잎도 꽃잎이려니와, 그 빛깔이 아직도 추운 겨울바람을 입에 물고 있는 듯하여 애틋함을 가슴에 안게 한다.
나는 들현호색을 만날 때마다 갈 길을 돌려서 가까이로 다가가 본다. 참으로 꽃잎 하나 하나가 귀엽기 이를 데 없다. 하지만, 그 꽃잎을 한참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그 입술에서 느끼는 아픔으로 해서, 핏빛 울렁울렁 하늘 밖이 집히는 슬픔을 맛보게 된다.
무엇이라고 꼭 집어내서 말하기 어려운 어떤 ‘정한(情恨)’을 이 들현호색에서 느낀다고나 할까. 그러고 보니, 이 들현호색은 바로 박재삼(朴在森) 시인의 이미지를 지녔다. 그는 우리의 정한을 애련한 가락으로 엮고 있는 대표적인 우리 시인이기에.
그뿐만이 아니다. 박재삼 시인은 오랫동안 병을 앓는 아픔을 지니고 있어서 그 꽃잎이 보이는 자줏빛 슬픔을 생각나게 한다.
“나는 병하고는 인연이 깊어 고혈압을 세 번, 위궤양을 두 번 앓았습니다. 그래서 병원 신세를 많이 진 셈이지요. 마지막에는 고혈압에 위궤양이 병발적으로 오더니, 이제는 언어 신경이 약간 마비되고 말았어요. 고혈압을 세 번이나 앓았어도 다행히 반신불수는 면하여, 보행에도 별 지장을 안 느끼고 있습니다. 약간 쥐가 내린 듯한 기미를 오른손과 발에 느끼는 정도지요. 그래서 가령 글을 써 놓고 보면, 물론 무슨 글자라는 것은 남이 다 알지만, 내가 보기에는 옛날의 내 글씨가 아닙니다. 즉, 획을 긋는데, 여의치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몇 년 전에 들려준 말이다. 박재삼 시인이 처음 병들어 누운 것은 서른 다섯 살 때, 신문기자 생활을 하던 중에 일격을 받았다. 다행히 6개월 동안 치료를 하고 일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십여 년이 지나, 이른바 괘사증(喎斜症)을 겪었다. 그 때는 미리 병이 온다는 것을 알고, 대처하여 쉽게 막았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십여 년 전, 그는 고혈압에 위궤양이 겹쳐서 병원 생활을 했으며, 그 다음해에도 한 달 열흘을 병원 신세를 지어야만 했다.
들현호색은 양꽃주머니과에 딸린 여러해살이풀이다. 땅속줄기가 옆으로 뻗는데 곳곳에 여러 개의 덩이줄기를 만들어 번식한다. 그 모습이, 아픔 덩이를 가슴에 간직하고 어렵게 가족을 부양하고 있는, 안타까움을 연상시킨다. 줄기는 보통 홀로 선다. 어긋나게 자리하는 그 잎은 잎자루가 길고 세 개의 잎조각이 모여서 하나의 잎을 구성한다. 잎조각은 달걀꼴로 정감을 지니고 있지만, 가장자리에 고르지 않은 톱니가 있어서 아픔을 겪는 유년을 생각하게 한다.
박재삼 시인은 1933년 4월 10일 일본 동경에서 태어났다. 그 후, 네 살 때에 어머니의 고향인 삼천포시(市)로 왔으며, 그 곳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17년 동안을 살았다. 말하자면, 경남 삼천포시는 바로 박재삼 시인의 고향이다. 물론, 그가 자라던 어린 시절에는 읍이었고, 자연이 잘 살아 있어서 자연 공부의 산 학습장이었다. 그 경험이, 박 시인을 사랑 받는 서정시인으로 성장시킨 원동력이 되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열 몇살 때던가/ 제비떼 재재거리는/ 여학교 교문 앞을/ 발이 떨리던 때는/
그런대로 그 비틀걸음에는/ 가락이 실려 있었다// 찬란한 은행잎을 달고/
찬송가나 유독 출렁거리던/ 마음 뒤안에 깔린 노을을……// 아직도 그 여학생
들의/ 옷태가 머리태가 좋으면서,// 이제는 너무 멀리/ 그 교문 앞을
지나와버린/ 부끄러움도 가락도 없는/ 내 발걸음이 섭섭할 뿐이다.
----------- 작품 ‘열 몇살 때’ 전문
“그 당시, 우리 집이 가난해서 소학교를 나오자 일찍이 신문 배달로 나섰지요. 그 신문 배달이 인연이 되어, 나는 또 고향 여학교의 사환 일을 보게 되었어요. 여학생들은 모두 나이가 나와 같은 또래였습니다. 퍽 수줍음이 많았던 나는, 더욱 외로웠습니다. 한 소녀를 생각하면 또 다른 소녀가 갸웃이 고개를 들이밀고 나타나곤 했어요.”
그는 해방과 함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그렇듯 사환 노릇을 하며 돈을 모아서 한 해 늦게 중학교에 입학하였다. 남들보다 어렵게 학교에 들어간 탓에, 그는 향학열에 불타서 고등학교까지 전교 수석을 차지했다 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는 무작정 상경하여 직장을 잡았다. 그리고 열심히 공부하여 남들보다 삼 년 늦게 고려대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그는 고향에 들렀다가 고생하시는 아버지를 목격하고, 자신이 허울과 위선 속에 싸여 있다는 죄책감을 느낀 나머지 삼년 중퇴를 하고 말았다.
박재삼 시인의 어머니는 정식으로 학교 교육은 받지 않으신 분이었지만, 그에게 살아 있는 가르침을 많이 주셨다 한다.
‘옛날부터 이야기는 거짓말이란다. 그러나 노래는 참말이라고 한다. 참말을 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바르고 곱게 가져야 한다.’
그가 시인이 된 후, 그의 어머니가 그에게 당부하신 이 말씀을 그는 결코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
그의 아버지는 하루 종일 일만 하시는 분이셨다. 그분 또한 열심히 일하는 모습으로 무언의 가르침을 주셨으며, 그 호인성(好人性)을 그는 존경하였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겉으로는 학생이었지만, 안으로는 집이 가난하여 하교 후에는 집안 일을 거드느라고, 아버지 어머니가 해산물 장사를 하는 그것을 도왔습니다. 즉, 지게를 지고 그 해산물, 우렁쉥이를 집에까지 나르는 것이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학생의 신분에 짐을 진다는 것을 창피하게 생각했어요. 집이 가난하면 노동하는 것 따위는 얼마나 신성하고 빛나는 일인데 말입니다.”
그처럼 넉넉하지 못했던 집안 형편 때문에, 그는 비바람 몰아치는 들판에서 야생초처럼 자라야 했다. 그러니, 한 포기 들현호색으로 이 봄에 이렇게 아름다운 영혼의 꽃을 피울 수 있지 않았겠는가.
들현호색의 꽃은 총상꽃차례로 줄기 끝에 달린다. 꽃받침조각이 두 개이지만 뚜렷하지 않고, 꽃잎은 네 개이지만 밖의 두 개는 크고 한쪽 끝에 아래로 구부러진 거(距)를 지닌다. 수술은 여섯 개, 암술은 한 개. 이른봄에 다른 꽃들보다 앞서 피어난다. 이 또한 박재삼 시인이 일찍이 문단에 나온 것을 상기하게 한다.
박재삼 시인은 1953년 ‘문예’에 시조 ‘강물에서’를 첫 추천 받은 후, 1955년 ‘현대문학’에 시 ‘정적(靜寂)’과 시조 ‘섭리(攝理)’가 천료되어 등단하였다. 그는 ‘현대문학’의 창간과 더불어 편집 사원으로 근무했으며 ‘문학춘추사’, ‘대한일보’, ‘삼성출판사’를 거치고 1961년 ‘60년대 사화집’ 동인시에 참여했으며, 1974년에는 한국시인협회 사무국장으로 피선되기도 했다.
해와 달, 별까지의/ 거리 말인가/ 어쩌겠나 그냥 그 아득하면 되리라//
사랑하는 사람과/ 나의 거리도/ 자로 재지 못할 바엔/ 이 또한 아득하면
되리라// 이것들이 다시/ 냉수사발 안에 떠서/ 어른어른 비쳐오는/ 그 이상을
나는 볼 수 없어라// 그리고 나는 이 냉수를/ 시방 갈증 때문에/
마실밖에는 다른 작정은 없어라.
---------- 작품 ‘아득하면 되리라’ 전문
“문단에 발을 막 들여놓았을 당시에 두 분과의 잊지 못할 일이 있습니다. 하나는 1954년 초봄으로 생각되는데, 그 때 나는 임시 수도가 와 있던 부산에 살았습니다. 동광동 3가 8번지, 나는 그 때 민의원으로 재직하시던 정현주 선생의 사서 겸 비서로 일했어요. 그런데 밤에 누가 찾아왔다는 것이었습니다. ‘누구십니까?’했더니, ‘내다 청마다.’하는 대답이 돌아왔지요. 그리고 계속해서 ‘영도 선생 시조집이 나와서 가지고 왔다.’ 하면서 이영도 시조집 ‘청저집(靑苧集)’을 전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 때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지요. 누추하지만 들어오시라니까, 바빠서 그냥 가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걸음으로 바래다 드린 형국이었는데, 저만치 보아하니 이영도 씨가 어느 집 처마 밑에 있었습니다. 청마 선생은 부지런하고 또한 다정다감한 분이었지요. 지금 세상처럼 체면만 중시하는 경향을 생각한다면 격세지감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1955년 ‘현대문학’이 창간되고 내가 거기에서 일할 때였어요. 을지로 입구의 흥사단이 있던 곳에 대성 다방이 있었고, 거기가 문인들이 많이 나오는 다방이었지요. 김말봉 선생님은 늘 거기에 자주 나오셨습니다. 막내 따님인 듯싶은 경기여고의 교복을 입은 학생이 자주 나왔었고, 사위되는 정하은 씨도 대위 계급장을 단 군복을 입고 간혹 나왔습니다. 그 다방에서 어느 날 무슨 잡담 끝에 나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해서 공연히 김 선생님의 신경을 건들였습니다. 즉, 우리나라의 경우, 지역적으로 보아서 시는 주로 남쪽 사람이 잘 쓰는 것 같고소설은 주로 북쪽 사람이 잘 쓰는 것 같더라. 거기 비하면 북에서는 김소월이 나왔고 남에서는 김동리가 난 것은 특수한 듯이 느껴진다. 대충 이런 요지에 입각해서 말했었고, 그것은 나대로 즉흥적으로 본 것을 말한 데 불과했지요. 그런데 김 선생님이 ‘내가 어디 대중소설이나 쓰지, 순수소설은 안 쓴다 이거지. 훌륭한 시인과 소설가만 택해 만나세요. 잘해 보세요.’ 이렇게 말하시더니 다방이 날아갈 듯 화를 내시고는 나가 버리는 것이었어요. 나는 왜 그런 말을 했던가 싶어 후회막급이었이었습니다. 영 그른 말을 한 것은 아니었으나, 한 선배의 비위를 거슬러 놓아도 단단히 했다 싶어 나는 어쩔 줄 몰랐습니다. 소설을 하는 사람 앞에 ‘당신은 일류 소설가가 아니오.’와 같은 말을 했으니, 그것도 새파란 청년이 한 것이 더욱 자극을 드렸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 후에 사과를 하고, 그 일은 적당히 무마를 할 수 있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그런 말을 지금 같으면, 남의 눈치를 보아 가며 할 것인데, 그 당시는 마구 한 셈이었어요. 젊어 있었고, 요는 기분파의 심정만이 있었다고 할까요.”
박재삼 시인은 사십대 초에 월급쟁이를 그만두었다. 물론, 병발적으로 오는 고혈압에다 위궤양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러나 그는 다행히 적은 수입이라 하여도 다달이 고정급으로 받는 것으로 되어 있는 게 있었다. 그것은 일간지에 쓰는 바둑 관전기(觀戰記)였다. 그런 일을 맡게 된 연유는 이러했다.
그는 문학잡지 기자 노릇을 십년 남짓했다. 그러고는 무슨 사연이 있어서 직장을 떠났다. 그런데 그 때 마침 바둑 잡지의 편집장을 하던 분이 자리를 비우게 되어, 그가 우연이 발탁이 되었다. 글쎄,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다. 그의 바둑 실력이 3급 정도라니, 그 당시에 그리 흔한 편이 아니라는 점도 참고가 되었을 것이었다. 그는 그 직장을 서너 달 나가고 그만두었다. 그 때 생각이 바둑 라이터가 될 구석도 조금 있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어떤 일간지의 바둑 관전기를 쓰던 사람이 원양선을 타게 되어, 그 자리를 그가 차지하게 된 것이었다.
노래는 흘러흘러/ 흥타령 속 능수버들을 타고 갔건만/ 설움은 빠져나갈 데도
없는가/ 이 환한 봄날일수록/ 간장 웅덩이에 흥건하게 고이네// 천 날 만 날/
별을 보는 눈물 비친 눈을/ 달을 보는 한숨 섞인 가슴을/ 하늘의 은동앗줄이
내린/ 밤마다 물결에나 맺어 보내자한들/ 내 산발은 더욱 가닥가닥 얽히어/
아내여, 어린 것들이여/ 옷을 입고/ 오, 지랄병을 가릴 수도 없고/ 별과 달을
그냥 손짓할 수 없어라.
----------- 작품 ‘인연의 노래’ 전문
그러나 박재삼 시인은, ‘이 세상에는 아는 사람보다 미지(未知)의 사람이 무척 많은데 나를 살려줘서 그 미지의 사람과 만나고, 그 중에서도 착한 사람을 만나고 갈 수 있는 호기(好機)가 주어진 게 고맙다. 그렇게 살아간다는 것은 미지의 만남에 조우(遭遇)하는 것이니 이 얼마나 선택된 인연인가. 따지고 보면 우리가 산다는 것은 이 미지에 대한 만남에 뜻이 있다면, 나를 살려준 것은 그 혜택을 좀더 맛보라는 것이 아닐 수 없다.’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는 지금 고향을 그리워한다. 비린내가 나는 바다. 그리고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하는 봄을 그리워한다.
“시냇물 흐르는 소리는 어느 철에나 맑고 카랑카랑하게 들렸습니다. 그러나 봄에 그것은 주위의 공기에 그렇게 울리는 걸로 느끼는 것이지요. 그것은 겨울이라는 춥고 얼어붙은 계절감이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봄을 느끼는 것도 겨울을 철저하게 느끼는 데서 파생했다고 볼 수 있어요. 겨울을 봐 오던 눈이나 귀에는 그것은 새로운 경이(驚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렇기에, 봄에 피는 들현호색의 꽃이 그처럼 신비하게 다가오는 것일 게다. 그 꽃의 생김새와 빛깔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추위를 이기고 새롭게 피어나는 그 생명의 숨결로 해서 새삼 환희를 맛보게 되는 것일 게다.
들현호색은 진통과 진정의 효능이 있고, 그밖에도 진경(鎭痙), 활혈(活血)과 자궁 수축의 작용이 있어, 산후 어혈(瘀血)로 배가 아프거나 산후 출혈로 정신이 혼미할 때에 약재로 쓰인다. 이 모두가 사랑이다.
“여자 앞에서는 캄캄해집니다. 이것은 꽃 앞에서 캄캄해진다는 것과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보아도 여자란 확실히 알 수가 없고, 꽃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알 수 없으면서 항상 새로운 눈을 뜨게 해주는 것이 여자이자 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자의 깨끗함이 곧 꽃의 깨끗함이요, 여자의 아름다움이 다름 아닌 꽃의 아름다움입니다.”
참으로 시인다운 아름다운 마음이 아닐 수 없다. 들현호색의 아름다운 심성을 여기에서 다시 한 번 엿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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