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랭이꽃과 신경림 시인
김 재 황
우리에게 가장 낯익은 들꽃이라면, 나는 서슴없이 패랭이꽃을 꼽는다. 그만큼 패랭이꽃을 우리 주위에서 많이 보아 왔기 때문이다. 아니, 많았다기 보다는 그 아름다운 꽃빛깔로 해서, 멀리에서도 우리 시선을 쉽게 끌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한여름의 더위 속에서도 그 아름다운 미소를 잃지 않는 패랭이꽃. 붉은 그 꽃빛깔이 야하다는 느낌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순박하게 우리 앞으로 다가온다. 더욱이 그 꽃 모양이 옛날에 먼 길을 유랑하는 나그네가 썼던 패랭이를 닮았기에 한층 연민의 정을 느끼게 하는 꽃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해서, 패랭이꽃은 서민적인 들꽃이다. 서민 중에서도 가장 땀을 많이 흘리는 농민을 생각하게 한다. 이 땅을 부둥켜안고 뒹굴며 살아가는 사람들, 그 체취가 물씬 풍기는 패랭이꽃의 이미지를 지닌 시인은 누구일까.
나는 그런 시인을 안다. 바로, 신경림(申庚林) 시인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신경림 시인의 면모에서 흙 냄새를 맡을 수가 있다. 어디로 보나 순박함이 그득하다. 그 모습에 걸맞게, 그는 농촌에 묻혀서 살았고, 농민의 삶에 꽤나 사랑을 쏟는다. 그래서 그는 산골에 묻혀 있는 민요를 듣기 위해, 여러 고장을 걸어서 찾아다녔다. 그 모두가 패랭이를 쓴 나그네의 모습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나는 옛 민요를 듣기 위해 여러 고장을 다녔습니다. 굳이 내가 거둔 것을 따진다면 두 가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알려지지 않은 노래를 들을 수 있었던 일이요, 또 하나는 우리 시골 구석구석에서 아직도 쓰이고 있는 순수하고도 아름다운 우리말을 수없이 들을 수 있었던 일입니다.”
그는 민요를 들으며 농민들의 아픈 삶을 대했고, 거기에서 아름다운 우리말을 만나며 뜨거운 조국애로 가슴을 앓았으리라. 불현듯 패랭이꽃의 열띤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꺾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구석에 쳐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라리를 불꺼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꺼나.
------------ 작품 ‘농무(農舞)’ 중에서
패랭이꽃은 산기슭의 풀밭이나 냇가의 모래땅에서 잘 자라는 여러해살이풀이다. 줄기가 곧게 자라나 꼿꼿함을 지녔으며, 줄기 전체에 흰빛이 돌므로 순수함을 보인다. 잎은 선형(線形) 또는 피침형(披針形)으로, 대나무 잎을 흡사하게 닮았다. 그래서 한 명으로는 ‘석죽(石竹)’이라고 부른다. 이것 역시 지사적(志士的)인 풍모를 엿보게 한다.
사람마다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여러 가지로 표출된다. 그 중에 하나가 여행이 아닐까 한다. 조국의 구석구석을 직접 찾아가 보고, 그 곳에서 자연과 사람의 숨결을 가슴으로 느껴 보는 일, 그것은 이 나라를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이 없고서는 결코 실행에 옮길 수가 없다.
신경림 시인은 여행을 자주 떠난다. 홀로 나서는 여행, 터벅터벅 걸어서 시골길을 찾는 여행을 그는 좋아한다. 구름처럼 바람 따라 떠도는 여행, 패랭이를 쓴 나그네의 심정으로 그는 무작정 길에 나서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한 지방을 첫 번째 갈 때보다 두 번째 갈 때가 더 인상이 깊고, 두 번째 갈 때보다 세 번째 갈 때가 더 감회가 깊은 게, 그가 여행에서 느끼는 재미라고 그는 말한다. 두 번째 길에서는 첫 번째 갔을 때의 느낌이, 세 번째 길에서는 첫 번째와 두 번째 갔을 때의 감회까지가 그 지방이 본디 가지고 있는 독특한 맛에 겹쳐지기 때문일 것이라 한다. 그래서 그는 한 번 다녀온 지방을 다시 여행하기를 더욱 좋아한다.
신경림 시인의 첫 여행은 그가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한다.
“나는 내 동무와 책을 사기 위해 육십여 리나 떨어져 있는 읍내까지 가기로 했지요. 우리는 연휴가 딸린 일요일에 길을 떠났습니다. 내 손에는 점심으로 먹을 좁쌀떡이 들려 있었고, 주머니에는 책 몇 권 값과 하룻밤 숙박비가 들어 있었어요. 길은 누렇게 벼가 익은 논 사이로 난 마차 길이었습니다. 길 가에는 들국화와 코스모스가 잔뜩 피어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사오 리쯤 가니, 강이 나왔어요. 우리는 강 언덕에 다리를 뻗고 앉아서 보자기를 풀고 좁쌀떡을 좀 이르게 먹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걸었는데 거기서부터 강과 길은 서로 숨바꼭질을 했지요. 강이 길을 따라 흐르는가 싶으면 이내 길은 산 속으로 접어들고, 길이 산 속으로만 가고 있는가 싶으면 금세 길은 강을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합수머리 나루에 이르렀을 때는 해질녘이 가까워져 있었어요. 읍내는 나루에서도 십리 길이었습니다. 수수밭에 부는 바람 소리에, 객지에 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우리는 가슴이 철렁했지요. 서둘러 읍내에 들어섰을 때는 완전히 밤이었습니다. 우리는 식당을 찾아가서 저녁을 사 먹고, 마침 그 곳에서 만난 친절한 군청 직원의 호의로 그날 밤은 군청 숙직실에서 하룻밤을 잘 수 있었어요. 다음날, 우리는 아침을 사 먹은 다음, 친절한 군청 직원이 알려주는 대로 책방을 찾아 그 많은 책에 압도당하면서 몇 권의 책을 골라 사 들고 어제의 길을 되짚어 집에 돌아왔을 때는 밤이 으슥했지요.”
그 뒤로 그는 한 버릇이 생겼다. 일요일이면 집에 틀어박혀 있을 수가 없어, 도시락을 싸 들고 집을 나서야만 했다. 한두 동무와 함께인 경우도 있었지만, 대개는 혼자였다. 어른이 된 지금에도, 그는 조각배를 타고 강을 건너가 쓸쓸한 강마을을 서성대기도 하고, 버스에서 내려와 술주정과 노랫가락이 흥건한 시골장을 기웃거리기도 하며, 타박타박 걸어서 죽령을 넘으며 소백산의 설경에 넋을 빼앗기는가 하면, 어떤 때는 휴전선 막다른 동리까지 가서 깊은 절망감에 젖기도 한다.
신경림 시인은, 1936년 4월 6일, 충청북도 중원군 소은면 연하리에서 태어났다. 아름다운 고장. 자연이 잘 살아 있는 고향. 어렸을 때, 그는 우물 옆으로 난 쪽문을 밀고 나가, 논둑길을 걸어가서, 도랑물에서 세수를 하곤 했다 한다. 하지만 그 당시가 일제시대였느니만큼, 아무리 자연이 아름답다한들 어찌 마음이 즐겁기만 했겠는가. 그는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일제 교육을 받아야만 했다. 학교에서는 물론이요, 집에서조차도 우리말은 일체 쓰지 못하고 일본말만 쓰도록 강요를 당했다.
늘 술만 마시고/ 미쳐서 날뛰다가/ 마침내 그 녀석은 죽어 버렸다// 내가
살던 고향 동네로/ 넘어가는 그 고갯길/ 서낭당 고목나무// 빨갛고 노란
헝겊을/ 걸어놓고/ 귀신이 되어 도사리고 앉았다// 안개가 낀 자욱한 여름밤/
원통해서 원통해서/ 그 녀석은 운다// 원통해서 원통해서/ 고목나무도 운다
그 녀석은/ 되살아나서 도사리고 앉았고.
----------- 작품 ‘전설(傳說)’ 전문
중학교에 들어가, 그는 처음 고모네 집에서 기숙하였다. 마당이자 봉당인 협소한 집이었지만, 판자 울타리 바깥 골목에는 늙은 살구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그가 중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6․25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이 터졌다고 어른들은 술렁대고 거리에는 군인들이 몰려들어 법석대었지만, 우리들은 수업이 끝나기가 무섭게 하숙방에 모여서 새로 유행하기 시작한 노래를 배우던 일이 생각납니다. 막 중간 시험이 끝났을 때였으니까요. 세상에 큰 변화가 오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깨달은 것은 그 며칠 뒤였습니다. 전교생을 모아 놓고 교단 위로 올라가신 교장 선생님이 말씀하셨어요. ‘전세가 악화되어 부득이 학교는 무기 휴학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용감한 우리 국군이 반드시 적을 무찌를 것이니 머지 않아 다시 개학하게 됩니다. 그 동안 몸조심하고 학생의 본분에 어긋나는 일이 없도록 각별히 주의하기를 바랍니다.’ 대충 이런 말씀이었지요. 논다면 무조건 좋아하는 우리들이었지만, 이 때만은 너무도 분위기가 숙연했기 때문에 아무도 웃거나 소리치지 않았습니다.”
6․25전쟁이 끝나고, 피난살이에서 돌아온 이른 봄, 문학을 지망하던 한 초둥학교 교사가 문학에 대한 미련을 버리기 위해서 가지고 있던 책을 몽땅 내어다 헐값에 넘기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그는 심심해서 그 책들을 뒤적이다가 ‘문예’라는 월간지에서 함형수 시인의 시 ‘해바라기의 비명’을 읽게 되었다.
“그 시를 처음 읽었을 때의 감동은 엄청난 것이었어요. 나는 그 시를 종이에 베껴 가지고 와서 읽고 또 읽고 했습니다. 그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아서 그 며칠 뒤에는 그 시가 들어 있는 ‘문예’를 포함하여 거기 진열돼 있던 20여 권의 책을 몽땅 사고 말았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어쩌면 이것이 내가 문학으로 길을 잡은 첫걸음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구나. 이 때 그의 영혼은 바야흐로 꽃을 피우기 위한 화아분화(花芽分化)를 그 내면에서 준비하고 있었구나.
그 후, 그는 종중에서 사 놓은 집의 방 한 칸을 얻어 고향집을 떠나 동생과 함께 자취를 하며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그 당시 국어 선생님으로부터 교과서에 실리지 않은 많은 시를 배우게 되었다.
패랭이꽃은 줄기나 가지 끝에 한 송이씩 피어난다. 외로움이 깃든 시인의 꽃이 아닐 수 없다. 꽃받침은 원통형이며 끝이 다섯 개로 갈라지고 꽃잎도 다섯 개로 끝이 얕게 갈라지며 흰 무늬와 긴 털을 지닌다. 적자색의 빛깔이, 뜨거운 시인의 열정을 느끼게 한다.
신경림 시인은 1955년 12월에 시 ‘낮달’이, 그리고 1956년 1월에 시 ‘갈대’가, 마지막으로 그해 4월에 시 ‘석상’이 문학예술지에 추천이 됨으로써 문단에 등단하였다. 그는 1960년 동국대 영문과를 졸업하였으니, 이미 대학 1학년 때 시인이 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대학 졸업 후로 건강이 나빠져서 낙향을 하게 되었고, 그 곳에서 요양하면서 틈틈이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주머니에 몇 푼만 들어오면 정류소로 나가 무작정 차를 타고 며칠씩 여행을 떠났다 한다. 아마도 어렸을 적의 그 버릇이 다시 도진 것이리라.
‘그는 한 때 절필하고 있었으나, 60년대 중반에 들어서서 다시 시를 써서 주목할 만한 작품을 발표했다. 특히 ‘가을밤’(한국일보 1965년 4월), ‘농무’(창작과 비평 1971년 가을) 등은 그의 작품 경향을 대표하는 것이다. 이 작품들은 초기의 경향인 인간 존재를 다룬 관념적인 세계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적대상으로서 농촌의 현실을 통한 인간의 정서, 한, 울분, 고뇌 등을 끈질기게 추구하는 것이 하나의 특색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는 이것을 기초로 하여 시를 민중 현실과의 공감대를 형성하려는 시도를 꾸준히 계속하고 있다.’
신경림 시인에 대한 평이다.
패랭이꽃과 같은 심상을 지닌 신경림 시인. 그는 민중 속에서 한 송이의 들꽃으로 피어나 있다. 연약한 듯싶으면서도 끈질긴 삶을 지닌 들꽃들. 그는 이제 민중 모두가 일어서서 영혼의 꽃을 피우기를 바라고 있을 게다. 저 패랭이꽃처럼 끈질기고 뜨거운 열정으로.
어느 날, 그는 평창 근처의 어느 외진 공사장 가까운 마을에서, 한밤중 지붕도 없는 화장실에 가 앉아서 별을 바라보다가, 울컥 어떤 설움 같은 것이 목구멍으로 치솟았고, 그 설움이 다시 시를 써야겠다는 욕망으로 이어져 마침내 한 편의 시를 얻었다.
아편을 사러 밤길을 걷는다/ 진눈깨비 치는 백리 산길/ 낮이면 주막 뒷방에
숨어 잠을 자다/ 지치면 아낙을 불러 육백을 친다/ 억울하고 어리석게 죽은/
빛 바랜 주인의 사진 아래서/ 음탕한 농짓거리로 아낙을 웃기면/ 바람은 뒷산
나뭇가지에 와 엉겨/ 굶어죽은 소년들의 원귀처럼 우는데/ 이제 남은 것은
힘없는 두 주먹뿐/ 수제빗국 한 사발로 배를 채울 때/ 아낙은 신세타령을
늘어놓고/ 우리는 미친놈처럼 자꾸 웃음이 나온다.
----------- 작품 ‘눈길’ 전문
신경림 시인은, 위대한 사상가요 천재적인 사학자요 열렬한 독립운동가였던, 단재 신채호 선생을 존경한다.
“선생은 발해를 우리 역사에서 떼어버린 옹졸한 사대주의들을 원수처럼 미워했습니다. 언젠가는 옛 우리 땅을 되찾아야 한다는 강한 의지가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런데 우리 땅은 좁은 반도나마 허리가 잘려 두 동강이가 되었습니다. 선생의 크고 넓고 매운 생각이 담긴 글들을 읽으면서 이 현실이 더욱 안타깝고 답답해집니다.”
신경림 시인이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 또한 이에 못지않을 성싶다. 산기슭이나 강자락에서 힘차게 돋아나는 패랭이꽃. 그 붉은 단심으로 피어나는 패랭이꽃을 보면서 신경림 시인을 생각하는 것은, 이제 나뿐만의 일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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