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마타리와 김춘수 시인
김 재 황
초여름에 산을 오르다 보면, 운이 좋게도 산등성이에서 노란 꽃을 피우고 있는 금마타리를 만날 때가 있다. 이보다 좀 늦게 꽃을 피우는 마타리에 비해서 키는 작지만, 그 대신 풍성한 잎새를 지니는 금마타리. 나는 이 금마타리의 꽃을 보는 순간, 불현듯 김춘수(金春洙) 시인을 떠올리곤 한다. 왜 그럴까?
깡마른 몸, 안경 속에서 반짝이는 두 눈, 그리고 부드러운 느낌의 콧수염, 겉모습으로는 오히려 마타리를 닮은 이미지를 지녔다. 그런데도 나는 김춘수 시인을 볼 때마다, 금마타리를 연상하게 된다. 그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그의 초기의 문학 경향은 릴케의 영향을 받았으며 시(詩)가 아니고서는 표현할 수 없는 사물의 정확성과 치밀성, 진실성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50년대에 들어서면서 릴케의 영향에서 벗어나, 이른바 의미의 시를 쓰게 되었으며 사실을 분명히 지시하는 산문적인 성격의 문장을 시의 형식으로 도입하였는데, 장시 ‘처용단장(處容斷章)’에서부터는 설명적 요소를 거세해 버린 이미지 작품으로 변모하였다.’
시 대사전에서 밝힌 김춘수 시인의 작품 세계이다. 여기에서 보더라도, 그의 작품 역시 살이 붙지 않고 깡마른 면모를 지녔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눈에 김춘수 시인이 금마타리로 비쳐짐은 다른 어딘가에 그 원인이 있을 성싶다.
서재(序在)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너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눈시울에 젖어드는 이 무명(無名)의 어둠에/ 추억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너는 한밤내 운다// 나의 울음은 차츰 아닌밤 돌개바람이 되어/ 탑(塔)을
흔들다가/ 돌에까지 스미면 금(金)이 될 것이다.
---- 작품 ‘꽃을 위한 서시’ 중에서
금마타리는 산등성이의 바위가 많은 곳에서 자라는 여러해살이풀이다. 줄기가 곧게 서는 의지를 보인다. 뿌리에서 나온 잎은, 잎자루가 길고 손바닥처럼 갈라졌으며 부드러운 털이 돋았다. 일본에 압박을 당하고 있던, 김 시인의 어린 시절을 생각하게 한다.
하지만 줄기에서 나오는 잎은, 잎자루가 짧고, 손바닥이라기 보다는 깃을 지닌 날개를 닮고 있다. 아마도 그것은 해방이 되어서부터 청년 이후로 그가 누려 온 풍성한 삶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한다.
김춘수 시인은, 1922년 11월 25일, 경남 충무시 동호동에서 태어났다.
“내 고향은 경남 충무입니다. 한반도의 가장 남단에 위치하지요. 유자가 결실할 정도로 따스한 고장입니다. 한산도에서 여수로 이어진, 이른바 한려수도로 트인 바다가 이를 데 없이 아름답습니다. 이맘때쯤 해서, 고향 사람들의 식탁에는 봄멸치가 오르지요. 멸치는 회를 해도 좋고 찜을 해도 좋고 지져 먹어도 구워 먹어도 다 그만한 맛을 지니고 있어요. 남쪽 바다의 봄멸치 기름진 것을 먹어 보지 못한 사람은 생선맛을 말할 자격이 없다고까지 나는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방풍은 일종의 산나물입니다. 바닷가의 양지바른 비탈에 초봄이면 잠깐 나타났다가 없어집니다. 아주 향긋한 풀이지요. 살짝 데쳐서 초장에 찍어 먹습니다. 게의 살과 해삼과 이 방풍으로 채를 만들면 일품의 요리가 됩니다. 5월달의 수양버들을 보면 바다의 표정과 비슷한 것을 느낄 수가 있어요. 바닷물이 미묘한 표정을 짓게 되면 식탁에는 또 납새미 도다리가 오르게 됩니다. 사람들은 또 도다리와 뱀장어를 낚는 재미로 바다 한가운데 배를 띄우게도 되지요. 한려수도는 멀리 태평양으로 이어져 있지만 바람이 자면 잔잔한 호수 같기만 합니다.”
긴 잎자루를 지닌 금마타리의 뿌리잎. 아, 그것은 바로 김춘수 시인이 이처럼 풍만한 고향을 지니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의 어머니는 어떠한 분이셨을까. 나는 그것이 정말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의 일이지요. 어머님이 아직 새댁의 티를 벗기 전이요, 조모님도 아직 머리에 흰 털이 그다지 눈에 뜨이지 않았을 때의 일입니다. 하루는 밖에서 아이들과 어울려 놀다가 한 아이가 휘두르는 대꼬챙이에 이마빼기를 찔렸어요. 집에 가면 꾸지람을 들을 것이 겁이 나서 피가 흐르는 이마빼기에다 흙을 마구 문질러 대며 내 이마빼기를 찌른 그 아이를 따라 그 아이의 집에 가서 한참을 함께 놀다가 점심을 얻어먹고 낮잠까지 늘어지게 한잠 자고 나서야 자리를 떴습니다. 그러나 여름해는 너무도 길어서 아직 햇발은 많이도 남아 있었지요. 안대문을 들어서는 나를 보고, 어머님은 눈을 크게 한 번 뜨시고는 많이 기다렸다는 표정으로 마루에 걸터앉은 채로 어서 오라는 손짓을 하셨습니다. 꾸지람은 면했구나 하는 눈치를 어머님의 표정과 동작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어요. 마음이 사뭇 가벼워졌지요. 어머님은 내 손을 이끌고는 대청마루를 건너 뒤청마루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돗자리 위에 커다란 쟁반이 두 개 나란히 놓여 있었습니다. 대숲이 바람을 내고 있었어요. 어머님은 돗자리 위에 나를 앉혀 놓고는 또 우물가로 건너 가셨습니다. 이윽고 부엌아이에게 그만그만한 수박 하나를 들리고 당신은 한쪽 손에 참외 두 개와 식칼을 들고 오셨습니다. 어머니는 수박을 두 쪽으로 가르시고는 그 중에서 제일 먹음직한 한쪽을 들고는 수박살에 소금을 엷게 바른 다음 그것을 나에게 건네주셨습니다. 조금 뒤에 조모님이 돌아오셨지요. 나를 찾으러 가셨던가 봐요. 어머님은 내 이마빼기의 상처를 보고도 할 말이 없으셨던지 말을 하지 않으셨는데, 조모님은 대뜸 ‘거 이마가 뭐냐?’면서 표정이 일그러지셨지요. 수건에 찬물을 적셔 이마를 닦아내고 참기름을 발라 주셨습니다. 어머님은 그 때까지 내 이마빼기의 상처에는 관심이 없는 듯하셨지요. 조모님은 수박을 잡수시면서도 눈은 내 이마빼기에 와 있으셨습니다. 나는 그 따가운 시선을 느끼면서도 한편 그렇게 먹는 것이 가장 맛있게 먹는 것이라는 어머님이 건네주시는 데로 받아먹고 있었습니다.”
바다와 같은 마음을 지니신 어머님. 김춘수 시인은 지금도 그 때에 두 분이 입고 계시던 한산모시의 치마와 적삼, 그리고 바람을 내고 있던 대숲과 화문 돗자리와,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 두 분의 지극한 애정을 못 잊어 하고 있다.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고향에서 통영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로 올라와서 경기공립중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5학년이 되던 해에 자퇴를 하고 도쿄로 건너가서 니혼대학(日本大學) 예술과에 입학하지만, 그 곳에서는 3학년 때에 퇴학처분을 당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1942년 12월이었어요. 도쿄 세다가야의 하숙에서 나는 귀성(歸省)할 짐을 꾸리고 있었습니다. 겨울방학이 막 시작되고 있었지요. 하숙집 아주머니가 그 때 밖에서 누가 찾는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예감이 좋지 않았어요. 나가 보니, 현관 맞은편 길가에 어떤 키 큰 사내가 서 있었습니다. 누구냐고 묻자, 대꾸는 않고 명함을 내놓았습니다. 요꼬하마 헌병대 소속 헌병보라고 적혀 있더군요. 뒤통수가 찡해지고 가벼운 현기증이 왔습니다. 참고로 물어볼 말이 있으니 잠깐 요꼬하마까지 갔다와 달라는 것입니다. 나는 내 방에 다시 올라가 보지도 못하고, 꾸리던 짐을 그대로 둔 채, 입은 옷으로 그를 따라 요고하마까지 끌려갔습니다.
요꼬하마의 헌병대 감방은 독방입니다. 참고로 몇 마디 물어 보고 곧 돌려보내 겠다던 약속은 거짓이었지요. 그것은 그들의 상투 수단이었습니다. 붙들려 간 지 꼭 보름만에 처음으로 불려 나가 취조를 받게 되었습니다. 보름만에 나를 불러낸 헌병군조는 첫마디에 ‘넌 오노모노(巨物)야’하고 소리를 높였습니다. 나는 무슨 영문인지 몰랐어요. 노동판에 나가서 동포 고학생들이며 노동 노무자들과 어울린다는 것은 그 속이 뻔하지 않느냐는 것이었어요. 한 달 만에야 풀려나와 하숙집에 잠깐 머물 사이도 없이, 다음날 이른 새벽녘에 이번에는 세다가야 경찰서의 고등계 형사 세 명에게 붙들려 갔습니다. 세다가야 경찰서 감방에서 반년을 썩어야 했지요. 1월 중순에 수감되어 여름을 바라보며 출감되었으니까 그 동안 계절이 세 번이나 바뀐 셈입니다.”
그렇듯 그가 학교에서 퇴학당하고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일본 본토에서 추방된 것은 1943년의 일이었다. 그는 귀국 후, 1945년 해방이 되기까지 징용을 피해서 두더지처럼 숨어살았다. 마침내 해방이 되자, 그는 본격적으로 문학활동을 시작했다.
“45년 가을에 나는 고향인 통영으로 건너갔지요. 만주에서 귀향한 시인 유치환 씨를 비롯해서 음악가 윤이상, 정윤주, 화가 전혁림, 극작가 박재성, 시인 김상옥 제씨와 ‘통영문화협회’라는 문화단체를 만들어 문화계몽을 했습니다. 한 1년 남짓 되었을 겁니다. 그러는 동안에 인근 부산, 마산, 진주 등지의 문인예술가들과 교류의 다리가 놓이게 되어, 그 때부터 부산에서 소설가 염주용 씨가 내고 있던 ‘예술신문’과 진주에서 설창수 씨가 내고 있던 ‘영문(嶺文)’이란 문학 전문지에 시를 몇 편 싣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46년 무렵으로 기억합니다.‘
김춘수 시인은, 1946년 여름에 해방 1주년 기념사화집(날개: 조선청년문학가협회 경남본부 발행)에 시 ‘애가(哀歌)’를 발표하였고, 대구지방에서 발행된 동인지 ‘죽순(竹筍)’에 시 ‘온실(溫室)’ 외 1편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음해에 첫시집 ‘구름과 장미’를 세상에 내놓음으로써 그는 정식으로 문단에 데뷔하였다.
“그 때는 서정주와 ‘청록파(靑鹿派)’ 삼가시인(三家詩人)들의 시에 압도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들의 영향이 알게 모르게 유형 무형으로 내 습작품에 스며 있었으리라고 짐작됩니다. 나는 제2의 습작기를 그들의 영향 아래서 출발했으니까요. 일종의 아류 시기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그런 류의 습작들을 모아서 염치도 없이 자비로 출판한 것이 나의 처녀시집 ‘구름과 장미’입니다. 5백 부 한정판이었지요.”
아무튼 금마타리가 꽃을 피운 것이다. 금마타리는 5월에서부터 6월에 걸쳐서 꽃을 피운다. 김춘수 시인의 한창 젊었던 시절에 출간된 첫시집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줄기 위쪽에서 황금빛으로 피어나는 꽃은, 작은 꽃들이 조밀하게 달리는 산방화서(繖房花序)를 이룬다. 자세히 꽃을 들여다보면 종(鐘) 모양이고 끝이 5개로 갈라지는데, 4개의 수술과 1개의 암술이 모두 밖으로 나와 있다.
해방을 맞고부터, 김춘수 시인에게 날개가 돋기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금마타리의 풍성한 줄기잎에서 이미 예견되고 있었던 일이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황금빛 영혼의 꿈을 피워낸 것이다. 다만, 김춘수 시인은 문학뿐만 아니라, 교수로서 국회의원으로서 예술원 회원으로서 한국방송공사 이사로서 어찌보면 시인으로서는 너무 많은 것을 얻었기에 그 짐으로 해서 오히려 그가 왜소해진 안타까움이 있다.
누가 죽어 가나 보다/ 차마 다 감을 수 없는 눈/ 반만 뜬 채/ 이 저녁/
누가 죽어 가나 보다// 살을 저미는 이 세상 외롬 속에서/ 물같이 흘러간
그 나날 속에서/ 오직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서/ 애터지게 부르면서 살아온/
그 누가 죽어 가나 보다// 풀과 나무 그리고 산과 언덕/ 온 누리 위에 스며
번진/ 가을의 저 슬픈 눈을 보아라// 정녕코 오늘 저녁은/ 비길 수 없이 정한
목숨이 하나/ 어디로 물같이 흘러가 버리는가 보다.
----- 작품 ‘가을 저녁의 시’ 중에서
황금빛으로 빛나는 꽃을 피운 김춘수 시인. 비교적 풍요로움을 누린 그에게도 이 가을은 이처럼 쓸쓸하게 느껴지는가. 그와는 두터운 교류가 있었던 공초(空超) 오상순(吳相淳) 선생에 대한 그의 회고담이 문득 생각난다.
“공초 선생께서는 만년에 시를 별로 쓰지 않으셨지요. 그 까닭도 소유욕과 같은 레벨의 것으로 생각됩니다. 내가 꼭 써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후배들이 더 잘 쓰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은 공초 선생이 아니라도 해 볼 수는 있을 겝니다. 그러나 선생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시자 시 쓰기를 그만두셨습니다. 쓸쓸하지 않으셨을까? 물론 이런 따위 생각은 내 레벨에서 하는 생각이지만 말입니다. 공초 선생께서는 활짝 트인 전망을 바라보듯 후배들이 쓴 시들을 자기의 것인 양 보셨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개성이니 뭐니 하는 미명 아래 실은 끝없는 소유욕의 충족을 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시작(詩作)이 무슨 재산인 것처럼 말입니다. 익명으로 시를 써야 한다면 그래도 쓰겠다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우리는 시, 그 자체보다도 시외적(詩外的)인 것들, 이를테면 자기 현시와 허영을 위하여 시를 쓰고, 시를 자주 써서 유명해지려고 합니다. 이런 점에서도 공초 선생을 보고 그분의 곁에 있으면 자꾸 빚진 생각이 들었습니다.”
공초 선생은 김춘수 시인에게 또 이런 말씀을 들려 주셨다 한다.
“자네들이 쓴 시라고 자네들만이 썼다고 생각하지 말게나. 한국어가 생긴 뒤의 우리 겨레 전체, 과거와 현재를 물을 것 없이, 모두가 합심해서 쓴 것으로 알게나.”
그 말씀을 결코 잊은 적이 없는 김춘수 시인은, 이제까지 그가 써 온 많은 시들을 우리 모두의 것으로 돌리려는 것일까. 그 가난한 마음이 금마타리의 황금빛 꽃으로 피어나 있다.
'평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입금화와 이탄 시인 (0) | 2014.01.11 |
---|---|
뻐꾹채와 김용오 시인 (0) | 2013.12.24 |
칼잎용담과 류제하 시인 (0) | 2013.12.08 |
패랭이꽃과 신경림 시인 (0) | 2013.11.24 |
들현호색과 박재삼 시인 (0) | 2013.11.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