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거울 속의 천사’ - 그 우연과 인연
김 재 황
*안으로 들어가며
2019년 11월 19일, 나는 동방문학 발행인 이시환 사백으로부터 한 통의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제목은 ‘김재황, 김관식 초대 점심식사’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동방문학 관련 좋은 문장으로써 도움을 많이 주시고 계실 뿐만 아니라, 문학적 대화를 즐기는 풍류가 있으시기에 두 분을 초대하여 같이 점심 식사를 하고자 합니다.’ 물론, 나는 흔쾌히 찬성했다. 그리고 점심 초대를 받았으니 간단한 선물을 준비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무엇이 좋을까? 나는 이것저것을 궁리하다가, 내 첫 시집인 ‘거울 속의 천사’를 선물해야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 책에 내 초심이 들어 있기에 그 뜻을 두 분에게 밝히고 싶었다.
그날 12시에 만남이 이루어졌는데(그날, 서승석 박사도 합석하였고 즐거운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두 분에게 내 첫 시집 ‘거울 속의 천사’를 선물하면서 여담으로 김춘수 시인께서도 타계하시기 3년 전에 똑같은 제목의 시집을 펴내셨다는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그 말을 들은 이시환 사백께서는 즉석에서 그 이야기에 대한 원고를 청탁하였다. 나는 며칠을 망설이다가 그 뜻을 받아들이고, 여기에 그 전말을 적고자 한다.
(1)
1989년 8월 1일, 나는 첫 시집 ‘거울 속의 천사’를 도서출판 ‘반디’를 통하여 펴냈다. 나는 이 책의 맨 앞에서 이렇게 내 뜻을 밝혔다.
‘마음에 긴 여운을 남기는 시를 써야 하겠다는 소망을 늘 품고 있었다. 정작 이번에 작품을 모아서 시집 한 권을 내놓으려고 하니, 불타는 의욕에 비해 내 역량이 너무 미흡하고 또 노력이 부족하였다는 자책이 앞선다. 하지만 잠자리가 하늘을 날게 되기까지 열 번 이상 탈피를 해야 하듯 나도 이것을 시발로 하여 더욱더 발전된 상태로 껍질을 하나씩 벗어 나가려고 한다. 다만, 이 시가 누구인가의 가슴에 닿아서 삶을 음미해 보는 하나의 계기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이 시집은 제1부 분수 앞에서, 제2부 수수밭을 보면, 제3부 당신의 손은, 제4부 고슴도치풀, 제5부 엉겅퀴, 제6부 과원 일기 등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모두 89편의 시가 실려 있다. 그 중의 시 한 편 ‘못’을 본다.
애초부터/ 어디엔가 박혀야 될 운명이라면/ 그대 가슴에 파고들어가/ 믿음의 의미가 되고 싶다/ 그리하여/ 그대 안에서 뼈대 같은/ 사랑으로 서고 싶다.
-졸시 ‘못’ 전문
나는 이 시집의 끝자락에 ‘나의 시세계’를 밝혔는데, 이게 내 초심이라면 초심일 수가 있겠다.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나의 시는 ’거울 속의 천사‘를 만나서 나누는 대화이다. 천사와 만나는 일은 두 가지 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먼저 나 스스로 거울 앞에 서게 되었을 때 거울 속에서 천사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하며, 그 다음에는 이 세상에 있는 천사들을 내 마음의 거울 속에서 만날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가슴 속에는 악한 마음과 선한 마음이 함께 살고 있다. 진실이라는 이름의 거울을 통해 보면, 악한 마음은 머리에 뿔이 돋았고 긴 꼬리를 달고 있는 흉한 악마의 몰골이지만, 선한 마음은 은빛 날개를 반짝이며 미소를 짓고 있는 아름다운 천사의 모습을 하고 있다. 보통 ‘몹시 화가 났다.’라는 것을 ‘크게 뿔났다.’라고 표현하며, ‘기분이 아주 좋아서 행복하다.’라는 의미를 ‘하늘로 날아갈 것 같다.’라고 말하는데, 이것이 모두 그 이야기이다.
악한 마음과 선한 마음의 힘이 비슷하면 늘 싸우게 된다. 우리는 그것을 ‘갈등’(葛藤)이라고 지칭한다. 악한 마음이 말한다. “남의 것이라도 빼앗아야 내가 살 수 있는 거야.” 그러면 선한 마음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든다. “무슨 소리야, 굶는 한이 있더라도 올바르게 살아야지.” 이렇게 말다툼이 시작되어 나중에는 한바탕 결전이 벌어지게 된다. 이 싸움에서 어느 쪽이 이기느냐에 따라 악한 사람도 되고 착한 사람도 된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의 모습을 직접 볼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를 잊고 있을 때가 많다. 자기의 추한 모습을 깨닫지 못한다.
지금이라도 당장, 거울 앞에 서 보아라. 거울 속에 어떤 모습의 자신이 있는가? 악마의 모습인가? 천사의 모습인가? 남에게 못된 짓을 하며 살았다면 거울 속에 흉한 악마가 서 있을 게다. 그러나 이웃을 사랑하며 언제나 정의롭고 바르게 살았다면 은빛 날개가 반짝이는 아름다운 천사가 미소를 가득 머금고 있을 게다.
햇살이 풀밭에 내린다./ 풀들이 눕는 바람 속에서/ 홀로 피어나는 꿈/ 지순의 고운 얼굴로/ 이제 한 꺼풀씩 그늘을 벗겨/ 하얀 미소를 보이고 있다.// 울지 않는 아이가 있다/ 아무도 듣지 않는 노래를/ 부르는 아이가 있다/잠든 들을 깨우지 않고/ 떠난 나비를 찾지도 않고/ 떠다니는 노래만 잡아다가/ 채색을 하는 아이.// 은빛 날개 없어도/ 이미 날고 있는 세상/ 살아 있음으로 해서 정다운/ 말들이 날아와/ 꽃의 이름이 되고 있다/ 영혼이 아름다운 천사여/ 차라리 울고 싶은 사랑이었다.
-졸시 ‘우리들의 천사’ 전문
모든 사람은 아름답게 되기를 바란다. 다른 사람의 눈에 천사처럼 보이기를 꿈꾼다. 그러면서도 천사처럼 되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다. 또한, 한 번 천사의 모습을 하기는 쉬울지 몰라도 항상 천사의 모습을 간직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악마는 매우 교활한 놈이어서 천사에게 항복을 하였으면서도 항상 허술한 틈을 노리고 있다. 그러므로 방심은 금물이다. 조금이라도 악한 마음이 들지 못하도록 ‘귀로는 아름다운 말만 듣고, 손으로는 아름다운 일만 하고, 입으로는 향기로운 이야기만 해야 된다.
악마는 어둠을 좋아하고 빛을 두려워한다. 사람이 항상 밝은 마음을 지니고 긍정적으로 살아간다면 악마가 발붙일 곳이 없게 된다. 만약 마음속에 걱정과 근심이 있다면 하늘에 검은 구름이 끼어 있는 ‘흐린 날’과 같아서 악마는 꼬리를 치며 활동할 태세를 갖출 게다. 이럴 때일수록 용기로 시름을 떨어내고 밝은 하늘을 되찾아야 한다.
영국의 스티븐슨이 지은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라는 소설이 있다. 박학하고 인자한 의사인 ‘지킬’ 박사는 인성(人性)의 선악을 약품으로 분리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약품을 만들어서 스스로 복용한다. 그 결과, 추악한 악마인 ‘하이드 씨’로 변하게 된다. 그는 거듭 실험을 계속하는 동안에 점차 약품을 안 쓰고도 ‘하이드 씨’가 되곤 한다. 이어서 살인을 하게 되고 쫓기다가 자살을 하면서 그 모든 사실을 유서로 고백한다.
여기에서는, 착한 사람도 어떤 계기로 말미암아서 얼마든지 악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끊임없이 착한 일만 행하면 비록 과거에 악했던 사람일지라도 천사의 모습을 한 성자(聖者)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인도의 ‘자반’이라는 사람은 청소부로서 ‘몸을 스치기만 해도 부정을 탄다는’ 천민 계급에 속해 있었다. 한때 나쁜 친구를 따라 ‘찬두’라는 마약으로 만든 담배를 피우다가 중독이 됨으로써 어머니와 장모의 돈을 훔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후에 ‘피터’라는 의사의 병원 일을 돕게 되면서부터 부드럽고 선한 마음을 갖게 된다. 그는 어머니를 만나러 갔다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자기를 필요로 하는 곳으로 떠나게 된다. 길에서 만난 우유 배달부에게 그가 말한다. “나는 산골짜기에서 온 사람인데, 병이 들었는데 약을 구할 수 없거나 병원에 갈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하여 이곳까지 왔습니다. 나는 그러한 사람들을 보살필 수가 있습니다. 돈을 벌려고 그러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사람들에게 봉사하고 싶을 따름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곳 병원에서 일을 하게 되었고, 열심히 봉사하여 많은 사람들의 신뢰를 얻게 된다. 하지만 의사의 시기로 다시 방랑을 하게 된다. 그러다가 ‘뭇쑤리’라는 고장에서 교회와 절과 사원을 청소하는 일을 맡는다. 계속해서 봉사하는 ‘자반’의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그를 ‘바가트지’라고 부르게 되었다. ‘바가트지’란 ‘신에게 귀의한 사람’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그는 그렇게 낮에는 청소를 하고 밤에는 닭장에서 잠을 잤다.
그리고 눈이 몹시 내리던 어느 크리스마스 날 밤, 그가 잠들어 있던 달장이 눈의 무게에 눌려서 무너졌다. 의사가 그의 죽음을 확인하고, 경찰은 그의 소지품을 정리했다. 그때 그의 낡은 옷에서 종이쪽지 하나가 나왔다. 그런데 그 내용이 놀랍게도 그날 그가 죽을 것을 일 년 전에 예언한 것이었다.
-‘자반’이 죽었을 때 어떤 기념비도 어떤 절이나 교회도 그의 이름으로 세워지지 않았다. 그러나 ‘자반’을 한 번이라도 만난 적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가슴 속에 그의 이름으로 된 사원을 간직했다.-
이것은 이 소설의 말미에 적혀 있는 글이다. 남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깨끗하고 편편한 마음의 거울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바른 마음의 거울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이 세상 만물의 참된 모습을 제대로 비춰 볼 수 없다. 더구나 요철이 심한 마음의 거울이라면 아름다운 천사의 모습까지 자칫 흉한 악마의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는 일이다.
이 땅에는 아름다운 천사들이 많이 있다. 그 천사들은 진실이라는 거울 속에 들어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천사를 볼 수 없는 이유는 자신의 마음에 있는 거울을 깨끗하고 편편하게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깨끗한 마음의 거울로 이 세상을 비춰 보면 산이며 강이며 숲에서 천사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나는 숲으로 천사를 찾아간다. 나는 작은 천사들을 무척이나 사랑한다. 숲에는 달맞이꽃, 제비꽃, 나리꽃, 홀아비꽃대, 처녀치마 등 많은 풀들이 있다. 이 모두가 작은 천사들이다.
이렇게 많은 천사들을 볼 수 있는 것은 그래도 쉬운 일이다. 하지만 마음의 거울 속으로 들어가서 천사와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진실의 거울 속으로 들어가려면 무엇보다 먼저 허영과 위선의 옷을 벗어 버리고 알몸이 되어야 한다. 그런 다음에 정열적으로 불타오르는 ‘사랑의 불새’가 되어야 한다. ‘불새’와 ‘천사’의 만남, 그리고 ‘불새’와 ‘천사’의 대화는 모두 진실의 거울 속에서 은밀하게 이루어진다.
나의 기립은/ 거울에서도 기립이었고/ 나의 표방은/ 거울에서도 표방이었다./ 꽃을 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진실을 거울은 갖고 있다.
-졸시 ‘거울’ 전문
깃을 다듬지 않으면/ 날지 못한다./ 목을 늘이지 못하면/ 울지 못한다./ 잠들지 않으면/ 꿈을 보지 못한다./ 혼을 깨우지 않으면/ 살지 못한다.
-졸시 ‘새’ 전문
천사는 종교적으로 볼 때 천국에서 인간 세계에 파견되어 신과 사람과의 중간에서 ‘신의 뜻을 사람에게 전하고 사람의 기원을 신에게 전하는’ 사자를 말한다고 한다. 하늘에는 우리 영혼을 주관하는 분이 계셔서 항상 우리를 내려다보시다가 우리를 질책도 하시고 위로도 하시기 위해 천사를 지상으로 보내신다고 한다.
얼굴을 들고 하늘을 보라. 하늘에 떠 있는 무지개 한 자락이나 구름 한 조각도 결코 무의미한 것은 없다. 하늘에 계시는 분이 보내신 천사는 거울 저편까지 와서 나를 손짓해 부르신다. 나는 거울 속 천사의 부름을 결코 거절하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항상 ‘불새’가 될 태세를 갖추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내 영혼의 ‘불새’는 절대로 울지 않는다. 다만, 노래만을 부를 뿐이다. ‘불새’가 부르는 노래는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나야 한다. 색깔은 고상한 자태를 수반해야 하고 자태는 은근한 향기를 머금고 있어야 하며 믿음은 빛나는 사랑을 보여주어야 한다.
사랑은 신앙이다. 하늘에 계신 분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이웃과 나누는 사랑, 그것이 바로 삶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불새’가 되어서 거울 속으로 날아 들어간 나에게 천사는 모든 진리를 알려준다. 인내를, 순리를, 그리고 받은 것보다 더 많이 베푸는 사랑을 몸짓으로 일러준다. 나는 천사의 가르침을 따른다. 침묵으로 견디는 인내를, 자연을 닮는 순리를, 그리고 끝없이 베풀어야 하는 사랑을 따른다.
자, 우리 모두 숲으로 가지 않겠는가. 숲으로 가서 뜨거운 영혼의 ‘불새’가 되지 않겠는가. ‘불새’의 춤을 보았는가. ‘불새’의 춤은 거울의 문을 열기 위한 기도이다. 나는 이미 숲속에 와 있다. 금세 열이 오르기 시작한다. 겨드랑이에 어느 틈에 날개가 돋아나고 목이 길게 늘어난다. 점점 여위어 가서 가늘어진 다리, 나는 날개를 활짝 펴고 목을 길게 뽑는다. 다리를 겅중거리며 몸을 흔든다. 슬픈 듯 기쁜 듯 너울거리는 환희 춤, 순수의 안개가 피어오른다. 몸이 빛나면서 고고한 음악이 사방으로 퍼진다. 드디어 거울 속에서 손짓하고 있는 천사를 향해 날아간다. 거울의 문은 벌써 열려 있다.
아, 진실의 거울 속에서 천사와 만나는 ‘불새’의 기쁨, 은밀한 대화가 뜨겁게 이루어지다. 이것이 바로 나에게는 한 줄의 시(詩)가 된다. 나는 오늘밤을 또 하얗게 밝혀야만 되는가 보다.>
(2)
2001년 4월 25일, 김춘수 시인은 제15시집으로 ‘거울 속의 천사’를 도서출판 ‘민음사’를 통하여 펴냈다. 나는 이 소식을 접하게 된 순간, 깜짝 놀랐다. 내 첫 시집과 제목이 같은 시집을 만나게 되다니! 이 시집의 제목이 그리 흔하지도 않은데, 어찌 김춘수 시인은 어찌 이를 택한 것일까. ‘우연의 일치’라고 그냥 넘기기에는 내 가슴이 너무 뛰었다. 이런 일도 있는가. 그래서 나는 즉시 한 편의 시를 지었다.
참 이상한 일이다.// 나는 1989년에 첫 시집으로/ '거울 속의 천사'를 펴냈는데/ 김춘수 시인은 2001년에/ 제15시집으로 '거울 속의 천사'를 펴냈다.// 나는 김춘수 시인을/ 먼발치로는 여러 번 보았으나/ 단둘이 만난 적은 없고// 김춘수 시인의 시집과 수필집을 읽고/ 무작정 좋아하기 시작해서/ 1998년에야 김춘수 시인에게/ '금마타리'라는 들꽃을 선물한 게 전부인데// 내가 처음으로 떠올린 시집 제목을/ 12년이나 지난 다음에/ 김춘수 시인은 왜 제15시집 제목으로 내놓았을까.// 거울 속에서 나는 나를 만나려고 했으며/ 김춘수 시인은 떠난 아내를 다시 만났지만//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졸시 ‘나는 알지 못한다’ 전문
우연의 일치! 섬뜩하다. 우연(偶然)의 뜻을 찾아본다.
<필연에 반대되는 말이다. 필연이 '반드시 그러한 것'을 의미하는 데 대해 '예기치 않게 일어난 것'을 가리키는데,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우연이 곧 이러한 의미이다. 스토아 학파는 우연을 ‘원인을 알 수 없는 것’으로 규정했으며 기계론적 유물론자들도 마찬가지로 파악했는데, 그 입장에서는 우연은 객관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그러나 우연은 객관적으로도 존재하고 이런 의미에서의 우연은 원인을 알 수 없는 것이거나 원인이 없는 것이 아니며, 어떤 인과계열 또는 법칙이 이들 자신에게서 생기지 않은 것을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는 우연이란 무엇에 대해서 우연인가를 떠나서 규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 어떤 인과계열이나 법칙은 현실 속에서 활동하는 다양한 작용과 관계없이 순수하게 작용할 수는 없다. 그러나 거기에는 변함없이 어떤 방향으로 작용하는 필연적인 법칙이 있어 그 법칙은 많은 곡절과 변형을 겪으면서도 결국 실현되는 방향으로 나타나야 한다.(다음 백과)>
참으로 어렵다. 머리에 쏙 들어오지 않는다. 나는 이 ‘우연’의 뜻을 쉽게 ‘뜻하지 않은 일이 저절로 됨’ 정도로 이해하고 우선은 다음으로 넘어가기로 한다. 김춘수 시인이 펴낸 시집 ‘거울 속의 천사’를 펼치면 그 첫머리에 ‘이 시집을 아내 淑瓊의 영전에 바친다.’라는 글이 적혀 있다. 그리고 차례를 보면 1 大峙洞의 여름, 2 에필로그, 3 흔적, 4 上下左右 등으로 모두 89편의 시가 실려 있다. 여기에서 나는 다시 한 번 크게 놀란다. 내 시집 ‘거울 속의 천사’에 실린 시의 편수가 89편인데, 김춘수 시인의 시집 ‘거울 속의 천사’에 실린 시의 편수도 89편이라니! 어찌 놀라운 일이 아니란 말인가. 이 또 우연인가. 김춘수 시인의 시를 몇 편 본다.
거울 속에도 바람이 분다./ 강풍이다./ 나무가 뽑히고 지붕이 날아가고/ 방축이 무너진다./ 거울 속 깊이/ 바람은 드세게 몰아붙인다./ 거울은 왜 뿌리가 뽑히지 않는가,/ 거울은 왜 말짱한가,/ 거울은 모든 것을 그대로 다 비춘다 하면서도/ 거울은 이쪽을 빤히 보고 있다./ 셰스토프가 발한/ 그것이 천사의 눈일까.
-작품 ‘거울’ 전문
천사가 길을 떠난다./ 이내가 내리고/ 천사는 손을 흔들지 않는다./ 먼 산 들매나무가 잎을 떨군다./ 천사는 허름한 재킷을 걸치고 있다./ 술 취한 사람이/ 아무데서나 마구 갈긴다, 그러나/ 오줌발은 몹시 약하다./ 천사가 떠난 성당의 지붕 위를/ 해가 얼른 저문다.
- 작품 ‘또 日暮’ 전문
거울 속에 그가 있다./ 빤히 나를 본다./ 때로 그는 군불아궁이에/ 발을 담근다, 발은 데지 않고/ 발이 군불처럼 피어난다./ 오동통한 장딴지,/ 날개를 접고 풀밭에 눕는다./ 나는 떼놓고/ 地球와 함께 물도래와 함께/ 그는 곧 잠이 든다./ 나는 아직 한 번도/ 그의 꿈을 엿보지 못하고/ 나는 아직 한 번도/ 누구라고 그를 불러보지 못했다.
-작품 ‘천사’ 전문
이 시집의 ‘후기’를 읽어 보면, 이 시집이 어떻게 하여 탄생되게 되었는지를 더 정확하게 알 수 있게 된다. 그 ‘후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내가 내 곁을 떠난 지 꼭 2년이 됐다. 그 동안 아내는 나에게 소중한 것들을 알게 해줬다. 인연은 우연이 아니라는 것, 헤어짐은 만남의 다른 모습이라는 것- 이런 것들을.
나는 어릴 때 호주 선교사가 경영하는 유치원에 다니면서 천사란 말을 처음 들었다. 그 말은 낯설고 신선했다. 대학에 들어가서 나는 릴케의 천사를 읽게 됐다. 릴케의 천사는 겨울에도 꽃을 피우는 그런 천사였다. 역시 낯설고 신선했다. 나는 지금 세 번째의 천사를 맞고 있다. 아내는 내 곁을 떠나자 천사가 됐다. 아내는 지금 나에게는 낯설고 신선하다. 아내는 지금 나를 흔들어 깨우고 있다. 아내는 그런 천사다.
이 시집에 실린 여든아홉 편의 시들 모두에 아내의 입김이 스미어 있다. 나는 그것을 여실히 느낀다. 느낌은 진실이다.
내 나이 올해 여든이다. 이런 나이에 이만큼 많은 시를 단시일(2년)에 쓸 수 있었다니 믿기지 않는다. 아내가 그렇게 이끌어준 것 같다.(일부 생략)>
김춘수 시인은 생전에 모두 16권의 시집을 펴냈다. 그렇다. 김춘수 시인의 이 시집 ‘거울 속의 천사’는 제15시집이다. 알려져 있다시피 제16시집은 ‘쉰 한 편의 悲歌’(2002년 4월 펴냄)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제16시집은 제15시집인 ‘거울 속의 천사’의 후속 편쯤으로 느껴진다. 말하자면 ‘보충 설명’과 같은 것이다. 그 까닭이, 그 시집 ‘쉰 한 편의 悲歌’에 실린 첫 번째 시에 담겨 있다. 그 시를 본다.
여보, 하는 소리에는/ 서열이 없다./ 서열보다 더 아련하고 더 그윽한/ 구배(句配)가 있다, 조심조심/ 나는 발을 디딘다, 아니/ 발을 놓는다./ 웬일일까 하늘이 모자를 벗고/ 물끄럼 물끄럼 나를 본다./ 눈이 부신 듯/ 나를 본다, 새삼/ 엊그제의 일인 듯이 그렇게/ 나를 본다./ 오지랖에 귀를 묻고/ 누가 들을라,/ 사람들은 다 가고 그 소리 울려오는/ 여보, 하는 그 소리/ 그 소리 들으면 어디서/ 낯선 천사 한 분이 나에게로 오는 듯한.
-작품 ‘제 01번 비가(悲歌)’ 전문
내 느낌에 충실히 따른다면, 시집 ‘거울 속의 천사’가 김춘수 시인의 마지막 시집이 된다.(물론, 김춘수 시인에게는 유고 시집 ‘달개비꽃’도 있지만, 이는 사후 시집일 뿐.) 참 놀랍다. ‘내 첫 시집’의 제목을 왜 김춘수 시인이 ‘마지막 시집의 제목’으로 택했을까? 이게 과연 우연이었을까? 결코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3)
1998년 4월, 나는 도서출판 ‘서민사’를 통하여 산문집 ‘들꽃과 시인’을 펴냈다. 이 책에는 모두 25명의 시인과 25종의 들꽃이 소개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어느 시인이 어느 들꽃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는지, 한 시인과 한 들꽃을 연결 지어 놓았다. 그 중에는 ‘김춘수 시인과 금마타리’를 연결 지은 것도 있다. 그 원고의 제목은 ‘금마타리와 김춘수 시인’이다. 그러면 그 내용을 본다.
<초여름에 산을 오르다 보면, 운이 좋게도 산등성이에서 노란 꽃을 피우고 있는 금마타리를 만날 때가 있다. 이보다 좀 늦게 꽃을 피우는 마타리에 비해서 키는 작지만, 그 대신 풍성한 잎새를 지니는 금마타리. 나는 이 금마타리의 꽃을 보는 순간, 불현듯 김춘수(金春洙) 시인을 떠올리곤 한다. 왜 그럴까?
깡마른 몸, 안경 속에서 반짝이는 두 눈, 그리고 부드러운 느낌의 콧수염, 겉모습으로는 오히려 마타리를 닮은 이미지를 지녔다. 그런데도 나는 김춘수 시인을 볼 때마다, 금마타리를 연상하게 된다. 그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그의 초기의 문학 경향은 릴케의 영향을 받았으며 시(詩)가 아니고서는 표현할 수 없는 사물의 정확성과 치밀성 및 진실성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50년대에 들어서면서 릴케의 영향에서 벗어나게 됨으로써 이른바 의미의 시를 쓰게 되었으며 사실을 분명히 지시하는 산문적인 성격의 문장을 시의 형식으로 도입하였는데, 장시 ‘처용단장(處容斷章)’에서부터는 설명적 요소를 거세해 버린 이미지 작품으로 변모하였다.’
‘시 대사전’에서 밝힌 김춘수 시인의 작품 세계이다. 여기에서 보더라도, 그의 작품 역시 살이 붙지 않고 깡마른 면모를 지녔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눈에 김춘수 시인이 금마타리로 비쳐짐은 다른 어딘가에 그 원인이 있을 성싶다.
서재(序在)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너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눈시울에 젖어드는 이 무명(無名)의 어둠에/ 추억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너는 한밤내 운다.// 나의 울음은 차츰 아닌밤 돌개바람이 되어/ 탑(塔)을
흔들다가/ 돌에까지 스미면 금(金)이 될 것이다.
- 작품 ‘꽃을 위한 서시’ 중에서
금마타리는 산등성이의 바위가 많은 곳에서 자라는 여러해살이풀이다. 줄기가 곧게 서는 의지를 보인다. 뿌리에서 나온 잎은, 잎자루가 길고 손바닥처럼 갈라졌으며 부드러운 털이 돋았다. 일본에 압박을 당하고 있던, 김 시인의 어린 시절을 생각하게 한다.
하지만 줄기에서 나오는 잎은, 잎자루가 짧고, 손바닥이라기보다는 깃을 지닌 날개를 닮고 있다. 아마도 그것은 해방이 되어서부터 청년 이후로 그가 누려온 풍성한 삶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한다.
김춘수 시인은, 1922년 11월 25일, 경남 충무시 동호동에서 태어났다.
“내 고향은 경남 충무입니다. 한반도의 가장 남단에 위치하지요. 유자가 결실할 정도로 따스한 고장입니다. 한산도에서 여수로 이어진, 이른바 한려수도로 트인 바다가 이를 데 없이 아름답습니다. 이맘때쯤 해서, 고향 사람들의 식탁에는 봄멸치가 오르지요. 멸치는 회를 해도 좋고 찜을 해도 좋고 지져 먹어도 구워 먹어도 다 그만한 맛을 지니고 있어요. 남쪽 바다의 봄멸치 기름진 것을 먹어 보지 못한 사람은 생선 맛을 말할 자격이 없다고까지 나는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방풍은 일종의 산나물입니다. 바닷가의 양지바른 비탈에 초봄이면 잠깐 나타났다가 없어집니다. 아주 향긋한 풀이지요. 살짝 데쳐서 초장에 찍어 먹습니다. 게의 살과 해삼과 이 방풍으로 채를 만들면 일품의 요리가 됩니다. 5월의 수양버들을 보면 바다의 표정과 비슷한 것을 느낄 수가 있어요. 바닷물이 미묘한 표정을 짓게 되면 식탁에는 또 납새미 도다리가 오르게 됩니다. 사람들은 또 도다리와 뱀장어를 낚는 재미로 바다 한가운데 배를 띄우게도 되지요. 한려수도는 멀리 태평양으로 이어져 있지만 바람이 자면 잔잔한 호수 같기만 합니다.”
긴 잎자루를 지닌 금마타리의 뿌리 잎. 아, 그것은 바로 김춘수 시인이 이처럼 풍만한 고향을 지니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의 어머니는 어떠한 분이셨을까. 나는 그것이 정말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의 일이지요. 어머님이 아직 새댁의 티를 벗기 전이요, 조모님도 아직 머리에 흰 털이 그다지 눈에 뜨이지 않았을 때의 일입니다. 하루는 밖에서 아이들과 어울려 놀다가 한 아이가 휘두르는 대꼬챙이에 이마빼기를 찔렸어요. 집에 가면 꾸지람을 들을 것이 겁이 나서 피가 흐르는 이마빼기에다 흙을 마구 문질러 대며 내 이마빼기를 찌른 그 아이를 따라 그 아이의 집에 가서 한참을 함께 놀다가 점심을 얻어먹고 낮잠까지 늘어지게 한잠 자고 나서야 자리를 떴습니다. 그러나 여름 해는 너무도 길어서 아직 햇발은 많이도 남아 있었지요. 안대문을 들어서는 나를 보고, 어머님은 눈을 크게 한 번 뜨시고는 많이 기다렸다는 표정으로 마루에 걸터앉은 채로 어서 오라는 손짓을 하셨습니다. 꾸지람은 면했구나 하는 눈치를 어머님의 표정과 동작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어요. 마음이 사뭇 가벼워졌지요. 어머님은 내 손을 이끌고는 대청마루를 건너 뒤청마루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돗자리 위에 커다란 쟁반이 두 개 나란히 놓여 있었습니다. 대숲이 바람을 내고 있었어요. 어머님은 돗자리 위에 나를 앉혀 놓고는 또 우물가로 건너 가셨습니다. 이윽고 부엌아이에게 그만그만한 수박 하나를 들리고 당신은 한쪽 손에 참외 두 개와 식칼을 들고 오셨습니다. 어머니는 수박을 두 쪽으로 가르시고는 그 중에서 제일 먹음직한 한쪽을 들고는 수박 살에 소금을 엷게 바른 다음에 그것을 나에게 건네주셨습니다. 조금 뒤에 조모님이 돌아오셨지요. 나를 찾으러 가셨던가 봐요. 어머님은 내 이마빼기의 상처를 보고도 할 말이 없으셨던지 말을 하지 않으셨는데, 조모님은 대뜸 ‘거 이마가 뭐냐?’면서 표정이 일그러지셨지요. 수건에 찬물을 적셔 이마를 닦아내고 참기름을 발라 주셨습니다. 어머님은 그 때까지 내 이마빼기의 상처에는 관심이 없는 듯싶으셨지요. 조모님은 수박을 잡수시면서도 눈은 내 이마빼기에 와 있으셨습니다. 나는 그 따가운 시선을 느끼면서도 한편 그렇게 먹는 것이 가장 맛있게 먹는 것이라는 어머님이 건네주시는 데로 받아먹고 있었습니다.”
바다와 같은 마음을 지니신 어머님. 김춘수 시인은 지금도 그 때에 두 분이 입고 계시던 한산모시의 치마와 적삼, 그리고 바람을 내고 있던 대숲과 화문 돗자리,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 두 분의 지극한 애정을 못 잊어 하고 있다.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고향에서 통영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로 올라와서 경기공립중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5학년이 되던 해에 자퇴를 하고 도쿄로 건너가서 니혼대학(日本大學) 예술과에 입학하지만, 그 곳에서는 3학년 때에 퇴학처분을 당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1942년 12월이었어요. 도쿄 세다가야의 하숙에서 나는 귀성(歸省)할 짐을 꾸리고 있었습니다. 겨울방학이 막 시작되고 있었지요. 하숙집 아주머니가 그 때 밖에서 누가 찾는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예감이 좋지 않았어요. 나가 보니, 현관 맞은편 길가에 어떤 키 큰 사내가 서 있었습니다. 누구냐고 묻자, 대꾸는 않고 명함을 내놓았습니다. 요꼬하마 헌병대 소속 헌병보라고 적혀 있더군요. 뒤통수가 찡해지고 가벼운 현기증이 왔습니다. 참고로 물어볼 말이 있으니 잠깐 요꼬하마까지 동행해 달라는 것입니다. 나는 내 방에 다시 올라가 보지도 못하고, 꾸리던 짐을 그대로 둔 채, 입은 옷으로 그를 따라 요고하마까지 끌려갔습니다.
요꼬하마의 헌병대 감방은 독방입니다. 참고로 몇 마디 물어 보고 곧 돌려보내겠다던 약속은 거짓이었지요. 그것은 그들의 상투 수단이었습니다. 붙들려 간 지, 꼭 보름 만에 처음으로 불려 나가서 취조를 받게 되었습니다. 보름 만에 나를 불러낸 헌병군조는 첫마디에 ‘넌 오노모노(巨物)야’하고 소리를 높였습니다. 나는 무슨 영문인지 몰랐어요. 노동판에 나가서 동포 고학생들이며 노동 노무자들과 어울린다는 것은 그 속이 뻔하지 않느냐는 것이었어요. 한 달 만에야 풀려나와 하숙집에 잠깐 머물 사이도 없이, 다음날 이른 새벽녘에 이번에는 세다가야 경찰서의 고등계 형사 세 명에게 붙들려갔습니다. 세다가야 경찰서 감방에서 반년을 썩어야 했지요. 1월 중순에 수감되어 여름을 바라보며 출감되었으니까 그 동안 계절이 세 번이나 바뀐 셈입니다.”
그렇듯 그가 학교에서 퇴학당하고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일본 본토에서 추방된 것은 1943년의 일이었다. 그는 귀국 후, 1945년 해방이 되기까지 징용을 피해서 두더지처럼 숨어살았다. 마침내 해방이 되자, 그는 본격적으로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45년 가을에 나는 고향인 통영으로 건너갔지요. 만주에서 귀향한 시인 유치환 씨를 비롯해서 음악가 윤이상, 정윤주, 화가 전혁림, 극작가 박재성, 시인 김상옥 제씨와 ‘통영문화협회’라는 문화단체를 만들어 문화계몽을 했습니다. 한 1년 남짓 되었을 겁니다. 그러는 동안에 인근 부산, 마산, 진주 등지의 문인예술가들과 교류의 다리가 놓이게 되어, 그 때부터 부산에서 소설가 염주용 씨가 내고 있던 ‘예술신문’과 진주에서 설창수 씨가 내고 있던 ‘영문(嶺文)’이란 문학 전문지에 시를 몇 편 싣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46년 무렵으로 기억합니다.‘
김춘수 시인은, 1946년 여름에 해방 1주년 기념사화집(날개: 조선청년문학가협회 경남본부 발행)에 시 ‘애가(哀歌)’를 발표하였고, 대구지방에서 발행된 동인지 ‘죽순(竹筍)’에 시 ‘온실(溫室)’ 외 1편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음해에 첫 시집 ‘구름과 장미’를 세상에 내놓음으로써 그는 정식으로 문단에 데뷔하였다.
“그 때는 서정주와 ‘청록파(靑鹿派)’ 삼가시인(三家詩人)들의 시에 압도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들의 영향이 알게 모르게 유형과 무형으로 내 습작품에 스미어 있었으리라고 짐작됩니다. 나는 제2의 습작기를 그들의 영향 아래서 출발했으니까요. 일종의 아류 시기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그런 류의 습작들을 모아서 염치도 없이 자비로 출판한 것이 나의 처녀 시집 ‘구름과 장미’입니다. 5백 부 한정판이었지요.”
아무튼 금마타리가 꽃을 피운 것이다. 금마타리는 5월에서부터 6월에 걸쳐서 꽃을 피운다. 김춘수 시인의 한창 젊었던 시절에 출간된 첫 시집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줄기 위쪽에서 황금빛으로 피어나는 꽃은, 작은 꽃들이 조밀하게 달리는 산방화서(繖房花序)를 이룬다. 자세히 꽃을 들여다보면 종(鐘) 모양이고 끝이 5개로 갈라지는데, 4개의 수술과 1개의 암술이 모두 밖으로 나와 있다.
해방을 맞고 나서부터, 김춘수 시인에게 날개가 돋기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금마타리의 풍성한 줄기 잎에서 이미 예견되고 있었던 일이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황금빛 영혼의 꿈을 피워낸 것이다. 다만, 김춘수 시인은 문학뿐만 아니라, 교수로서 국회의원으로서 예술원 회원으로서 한국방송공사 이사로서, 어찌 보면 시인으로서는 너무 많은 것을 얻었기에 그 짐으로 해서 오히려 그가 왜소해진 안타까움도 있다.
누가 죽어 가나 보다/ 차마 다 감을 수 없는 눈/ 반만 뜬 채/ 이 저녁/
누가 죽어 가나 보다// 살을 저미는 이 세상 외롬 속에서/ 물같이 흘러간
그 나날 속에서/ 오직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서/ 애터지게 부르면서 살아온/
그 누가 죽어 가나 보다// 풀과 나무 그리고 산과 언덕/ 온 누리 위에 스며
번진/ 가을의 저 슬픈 눈을 보아라// 정녕코 오늘 저녁은/ 비길 수 없이 정한
목숨이 하나/ 어디로 물같이 흘러가 버리는가 보다.
- 작품 ‘가을 저녁의 시’ 중에서
황금빛으로 빛나는 꽃을 피운 김춘수 시인. 비교적 풍요로움을 누린 그에게도 이 가을은 이처럼 쓸쓸하게 느껴지는가. 그와는 두터운 교류가 있었던 공초(空超) 오상순(吳相淳) 선생에 대한 그의 회고담이 문득 생각난다.
“공초 선생께서는 만년에 시를 별로 쓰지 않으셨지요. 그 까닭도 소유욕과 같은 레벨의 것으로 생각됩니다. 내가 꼭 써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후배들이 더 잘 쓰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은 공초 선생이 아니라도 해 볼 수는 있을 겁니다. 그러나 선생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시자, 시 쓰기를 그만두셨습니다. 쓸쓸하지 않으셨을까? 물론 이런 따위 생각은 내 레벨에서 하는 생각이지만 말입니다. 공초 선생께서는 활짝 트인 전망을 바라보듯 후배들이 쓴 시들을 자기의 것인 양 보셨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개성이니 뭐니 하는 미명 아래 실은 끝없는 소유욕의 충족을 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시작(詩作)이 무슨 재산인 것처럼 말입니다. 익명으로 시를 써야 한다면 그래도 쓰겠다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우리는 시, 그 자체보다도 시외적(詩外的)인 것들, 이를테면 자기 현시와 허영을 위하여 시를 쓰고, 시를 자주 써서 유명해지려고 합니다. 이런 점에서도 공초 선생을 보고 그분의 곁에 있으면 자꾸 빚진 생각이 들었습니다.”
공초 선생은 김춘수 시인에게 또 이런 말씀을 들려 주셨다 한다.
“자네들이 쓴 시라고 자네들만이 썼다고 생각하지 말게나. 한국어가 생긴 뒤의 우리 겨레 전체, 과거와 현재를 물을 것 없이, 모두가 합심해서 쓴 것으로 알게나.”
그 말씀을 결코 잊은 적이 없는 김춘수 시인은, 이제까지 그가 써 온 많은 시들을 우리 모두의 것으로 돌리려는 것일까. 그 가난한 마음이 금마타리의 황금빛 꽃으로 피어나 있다.>
* 밖으로 나가며
문득, 당나라 시인 왕유(王維)의 시 ‘입산기성중고인’(入山寄城中故人, 산에 들어 성 안에 있는 옛 벗에게 보내다.)이 생각난다. 그 내용을 본다.
中歲頗好道 晩家南山陬 興來每獨往 勝事空自知
(중세파호도 만가남산추 홍래매독왕 승사공자지)
行到水窮處 坐看雲起時 偶然値林叟 談笑無還期
(행도수긍처 좌간운기시 우연치임수 담소무환기)
이는, <중년이 되어서 조금 ‘길에 관한 학문’을 좋아하였고, 늘그막에는 남산 근처에 집을 마련하였네. 흥겨움이 일 때마다 홀로 가는데, 나은 일은 성실하게 스스로 안다네. 가다가 물이 다한 곳에 이르게 되면, 앉아서 구름이 피어날 때를 지킨다네. ‘뜻하지 않은 일이 저절로 되듯’ 숲 속 노인을 만나서, 웃으며 이야기하느라고 돌아갈 줄 모른다네.’라는 뜻이다.
여기에서 ‘우연치임수’에 주목한다. ‘우연’이 과연 존재할까? 나는 전철이나 버스를 타고 갈 때 언제나 느끼는 일인데, 옆자리에 앉는 ‘사람들 모두’가 결코 ‘우연’이 아닐 것 같다.
싯다르타의 깨달음은 이러했다.
<연기란, 사물이 존재하는 방식이 반드시 ‘연’(緣)하여 ‘기’(起)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연한다.’는 원인을 말하고, ‘기한다.’는 결과를 나타낸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인과’(因果)라고도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생각나는 게 ‘인연’(因緣)이다. ‘인’(因)은 인도말로 ‘hetu'를 가리키는데 ‘직접적인 원인’을 뜻하고, 여기에서의 ‘연’(緣)은 인도말로 ‘pratyaya'인데 ‘직접적인 원인을 형성하는 주변의 조건이나 간접원인’을 뜻한다. 쉽게 설명하면, 쌀과 보리 등의 농작물에 있어서 그 씨는 ‘인’이고, 노력이나 날씨나 거름 등은 ‘연’이라는 말이다. 싯다르타는 ‘인연’을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다.’라고 풀이했다. 이처럼 ‘태어남이 있기 때문에 그에 따라 늙고 병들며 죽게 되는 일이 일어난다.’는 생각을, ‘아누로마’(anuloma)라고 한다. ‘아누’는 ‘따라서’의 의미이며 ‘로마’는 ‘순서’ 또는 ‘틀’ 등의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이를 한역하여 ‘순관’(順觀)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나와 김춘수 시인은 무관하지 않다. 내가 모르는 어떤 끈이 묶이어 있다. 그걸 소중하게 오늘에야 비로소 확인하게 되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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