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문학』 제27호(여름호)에 실린 작품’ 시조평
도리깨질 소리 분명한 내재율
김 재 황
시조에는 흐름(流)이 있고, 굽이(曲)가 있고 마디(節)가 있고 풀림(解)이 있다. 즉, 농촌에서 도리깨질을 할 때에 도리깨를 힘주어 잡는 게 바로 ‘흐름’이고 그 도리깨를 머리 위로 들어 올리는 게 ‘굽이’이며, 들어 올린 도리깨 끝의 휘추리를 공중에서 돌리는 게 ‘마디’이고 그 돌린 휘추리를 냅다 아래로 내려치는 게 ‘풀림’이다. 이 때, 3장에서 ‘흐름’은 초장을 이루고, ‘굽이’는 중장을 이루며, ‘마디’와 ‘풀림’이 종장을 이룬다. 이를 가리켜서 우리 시조의 ‘내재율’이라고 한다. 이렇듯 우리 시조는 그 가형(歌形)이 우연히 이루어진 게 아니라 필연적으로 이루어졌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시조는 우리 생활과 우리 정신의 가장 깊은 골을 밝혀 주는 하나의 심등(心燈)이요 하나의 운사(韻事)이다. 그렇다. 시조는 민족정서의 등불이고 겨레사랑의 꽃밭이다.
이일향 시인의 작품 「바다의 지문」을 본다. 알다시피, 지문은 사람마다 다르며 평생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그 자신을 입증하는 단서가 된다. 그러므로 ‘바다의 지문’은 ‘그게 바다임을 나타내는 증거’라고 해도 과히 틀리지 않을 것 같다.
억만 년 뒤채기하고도
지칠 줄을 모르는가.
때리고 부서지며
뜬 눈으로 새운 바다
갈매기
울음소리만
하늘 끝에 맴돈다.
-작품 「바다의 지문」 첫 수
첫 수의 초장은 ‘지칠 줄 모르는 바다’를 ‘흐름’으로 잡고 ‘뜬 눈 새운 바다’를 ‘굽이’로 잡았다. 그렇게 도리깨를 잡고 위로 들어올렸다. 비로소 종장의 첫 구에서 ‘갈매기 울음소리’로 ‘마디’를 지으며 휘추리를 공중에서 멋지게 돌렸다. 그리고는 종장의 둘째 구가 ‘하늘 끝에 맴돈다.’로 ‘풀림’을 멋지게 만들며 곡식을 내려쳤다. 그렇다. 갈매기 울음소리! 그게 바로 ‘바다의 지문’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둘째 수로 가면, 종장의 첫 구에서 ‘별빛 받은 등대’가 ‘마디’를 지으며 공중에서 멋지게 휘추리를 돌린다. 별빛 받은 등대! 이 또한 ‘바다의 지문’이 분명하다. 등대라고 하면 ‘햇빛 받은 등대’가 아니라 ‘별빛 받은 등대’여야 마땅하다. ‘풀림’으로 그 꿈이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다.
이옥분 시인의 작품 「오래 된 수첩」을 보면, 그 꼼꼼함이 한눈에 들어온다.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 놓는 일도 그렇거니와 그 수첩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있는 일도 그렇다. 이게 바로 시인의 마음이리라. 그리고 김선옥 시인의 작품 「양송원 자목련」을 본다. 첫 수의 종장에서 ‘불덩이로 타는구나.’가 멋진 울림을 준다. ‘탁’하고 내려친 ‘풀림’의 소리이다. 멀리에서 보면 꽃 핀 자목련은 마치 불이 붙고 있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이번에는 홍광식 시인의 작품 「행복」을 만난다.
사는 게 삶이려니 덤덤하게 살아간다
겨운 일에 허리 휘고 흰 머리가 늘어나도
혈육을
보듬은 기쁨
신앙으로 얹힌다.
-작품 「행복」 셋째 수
나이가 들고 나면 자식에 대한 사랑이 더욱 깊어지게 되는 것 같다. ‘논어’에서 누군가 공자에게 ‘효’에 대해 물었을 때, 공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부모는 오직 그(자식)가 병이 날까 걱정이다.”
‘오직 그(자식)가 병이 날까 걱정이다.’는, 한문으로 ‘유기질지우’(唯其疾之憂)라고 한다. 그러니 자식이 된 자는 그 몸을 병들게 만드는 게 가장 큰 불효이다. 부모는 그저 자식이 튼튼하게 자라기만을 바란다. 그 마음이 이 작품에 넉넉하게 담기어 있다. 첫 수에서 ‘월세 단칸방’으로 ‘흐름’을 만들고 ‘잠든 자식’이 ‘굽이’를 이루며 ‘주름진 아비 얼굴’이 ‘마디’를 이루었다가 ‘흐뭇한 미소’가 ‘풀림’을 이룬다. 둘째 수는 ‘가난이 조이는 설움’을 ‘운명’으로 돌리었는가 하면, 셋째 수는 ‘내리사랑’을 ‘신앙’으로 승화시켰다. 모름지기 시조의 도리깨질은 휘추리를 냅다 아래로 내려치는 ‘풀림’이 명쾌하여야 한다.
한상철 시인의 작품 「변산바람꽃 연정」은 아무래도 ‘청산’이 ‘흐름’의 포인트인 것 같고 ‘춘신’이 ‘굽이’를 나타내는 것 같은데, ‘백의 선녀’의 ‘마디’로 휘추리를 돌린 다음, ‘쪽빛 곤지’로 ‘풀림’을 내려친다. 바람꽃이 얼마나 아름다운 꽃인지를 알지 못한다면 결코 이 작품에서 큰 느낌을 얻기 어렵다.
마지막으로 이원식 시인의 작품 「저울과 분동」을 살펴본다.
한 손엔 흰 약봉지
또 한 손엔 귤 한 봉지
지순한 생의 경계를
조율하려 하는지
할머니 야윈 어깨로
내려앉는 벚꽃잎들.
-작품 「저울과 분동」 전문
이 작품 제목에서 ‘분동’이란 ‘천평칭으로 무게를 달 때 한쪽 판 위에 올려놓는 추’라고 알고 있다. 초장의 ‘흐름’에서 ‘약봉지’와 ‘귤 봉지’가 잘 평형을 이루고 있다. 중장에서 그 상황을 다시 한 번 ‘굽이’로 짚었으며 ‘할머니 야윈 어깨’로 휘추리를 돌림으로써 ‘마디’를 이루고 ‘벚꽃잎’이 ‘풀림’으로 ‘탁’하는 여운을 준다. 나는 이 순간, 정신대 할머니를 떠올린다. 왜 그럴까? ‘벚꽃’ 때문일까? 아무튼 아픔을 느낀다.
*김재황 약력
1942년 출생. 고려대학교 졸업. 1987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시조집『묵혀 놓은 가을엽서』『서호납줄갱이를 찾아서』『양구에서 서귀포까지』동시조집『넙치와 가자미』시조선집『내 사랑 녹색세상』외 다수. 세계한민족문학상 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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