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문학』 제28호(가을호)에 실린 작품’ 시조평<겨울호 (29호) 게재용>
일발필중과 언단의장의 포시법
김 재 황
시조는 정형시이다. 그러므로 시조가 살아남으려면 무엇보다 ‘기본율’에 잘 맞아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 가락인 ‘내재율’이 그 안에 잘 흘러야 한다.
그리고 ‘포시법’(捕詩法)이라는 말을 들어 보았는가.
문득 생각나는 말이 있다. 일컫기를 “중국 사람은 ‘농부’와 같고 일본 사람은 ‘어부’와 같으며 우리나라 사람은 ‘사냥꾼’과 같다.”라고 한다. 그렇기에 ‘포시법’은 우리나라 사람과 아주 잘 어울리는 말일 성싶다. 짐승을 잡을 때는 ‘잡는 방법’이 따로 있다고 한다. 이를테면, 멧돼지를 잡으려고 할 때는 아무렇게나 잡는 게 아니라 멧돼지가 잘 다니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그놈이 어슬렁거리며 나타나면 ‘일발필중’(一發必中)으로 화살을 쏘아서 맞혀야만 된다고 한다. 섣불리 맞혔다가는 멧돼지에게 도리어 화를 당하게 된다고 한다.
이 멧돼지가 바로 시재(詩材)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그 단발의 ‘적중어’(的中語)야말로 강한 감동을 맛보게 한다. 그렇다고 포시법에 일발필중만 있는 게 아니라고 한다. 한 어린아이가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잠자리에게로 살금살금 다가가서 그 날개를 살짝 잡는 것과 같은 포시법도 있다고 한다. 아마도 이런 작품일수록 언단의장(言短意長)의 긴 울림을 나타내는 것 같다. 이를 가리켜서 ‘언외언’(言外言)이라고 하는 듯싶다.
송길자 시인의 작품 ‘행운열차’를 본다. 사람은 누구나 ‘행운열차’에 탈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런데 그걸 타게 되기가 쉽지 않다. 송길자 시인은 그 까닭을 첫 수에서 ‘자신이 간이역에 서 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행운은 급행열차 무정거로 지나간다
간이역이 지정석이라 따라갈 수 없었지만
문자를 날려 보내니 답신을 보내 왔다.
-송길자, 「행운열차」 첫 수
아무래도 이 작품의 ‘시재’는 ‘행운’일 성싶다. 그리고 이 작품에서의 ‘적중어’는 ‘급행열차’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행운’은 무엇이 그리 급한지 ‘기다리고 있는 사람’ 앞을 그냥 지나쳐 버리기 일쑤이다. 야속하기 그지없다. 그 서운한 마음을 ‘급행열차’로 나타내고 있다.
다음으로 이영주 시인의 작품 ‘승부역 평설’을 보면, 무엇보다도 먼저 ‘승부역’에 대한 사전지식이 반드시 필요하다. 승부역은 경상북도 봉화군 석포면 승부리에 있는 철도 ‘영동선’의 한 정거장 이름이라고 한다. 역사 가까운 곳에 작은 마을이 있을 뿐이어서 그 동안 우리나라의 오지로 알려져 왔다고 한다.
굽이친 철길 따라 허위허위 오시게나
푸르른 승부역사 녹음에 잠겨 보면
부풀던 소망의 꿈이 자박자박 여물겠네.
-이영주, 「승부역 평설」 셋째 수
우리나라 말과 글을 풍성하게 만드는 것은 ‘어찌씨’라고 여겨진다. 이는, 세계적으로 다른 나라의 추종을 허락하지 아니한다. 이영주 시인의 이 작품에서도 이 ‘어찌씨’가 잘 나타나 있고 여기에서 ‘언단의장’의 긴 울림을 찾아야만 될 것 같다. 초장의 ‘허위허위’는 알다시피 ‘힘겨운 걸음걸이로 애써 걷는 모양’을 가리킨다. 승부역이 얼마나 오지에 있는지, 이 하나의 말로 누구나 금방 알 수 있다. 긴 생각을 일으킨다. 그러니 ‘언외언’이다.
그리고 최광림 시인의 작품 ‘동백 앞에서’는, 첫 수가 ‘새벽에 발코니 앉아서 창문 너머의 동백 두어 송이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발코니 창문 너머 붉은 동백 두어 송이
첫날밤 초경 같은 하혈하는 몸짓이다
파르르
푸른 입술이
경련하는 이 새벽.
-최광림, 「동백 앞에서」 첫 수
동백나무가 꽃을 빚었으니 아직은 겨울을 벗어나지 못하였고 더욱이 새벽이라니 으슬으슬한 한기마저 느끼게 만든다. 그런데 최광림 시인은 따뜻한 발코니 창문 안에 편안하게 앉아 있다. 어찌 나무에게서 아픔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아픔을 ‘하혈하는 몸짓’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나무의 푸른 입술’이 경련한다. ‘붉은 피’(하혈)와 ‘푸른 입술(잎사귀)’이 멋진 대조를 이룬다. 그리고 ‘송이’는 ‘꽃봉오리’를 이르는 성싶다. 그렇다고 보아서 ‘첫날밤 초경’을 ‘적중어’로 내세운 것 같다.
姜映淑 시인의 작품 ‘일낙엽 지천하추’와 최지형 시인의 작품 ‘세월·8’은 모두 ‘세월’을 그 주제로 삼았다. 정말이지, 시인이라면 누구든지 세월을 노래한 작품을 쓰지 않은 이는 없다고 본다. 그렇기에 이를 소재로 개성 있는 일발필중의 적중어를 찾기가 매우 어렵다.
그런 중에도 姜映淑 시인은 ‘세월’ 앞에서 ‘낙엽’을 생각한다. 그것도 그냥 ‘낙엽’이 아니라 ‘물든 낙엽’이고 ‘물든 낙엽’은 ‘아픈 사연 같다.’라고 했다. 그런가 하면, 최지형 시인은 ‘세월’ 앞에서 ‘죽음’을 생각하는 듯싶다. 그래서 한 올 한 올 다듬고 이승 떠날 때는 웃음 밟고 가기를 원한다. 세월처럼 서러운 게 어디 또 있겠는가.
‘세월’과 마찬가지로 ‘사랑’을 노래한 작품들도 수없이 많다. 그러나 세월이 슬픔이라면 사랑은 기쁨이니 많다고 나쁠 게 없다. 전경 시인의 작품 ‘나팔꽃 사랑’에서 ‘시재’라면 ‘속마음’이 아닐까 한다. 다르게 말하면 ‘수줍음’이다. 나팔꽃이라면 남들이 모두 듣게 나팔을 불어야 마땅한 일이건만, 수줍어서 ‘가슴으로 울릴’ 뿐이다.
마지막으로 조성제 시인의 작품 ‘바람벽’을 본다. ‘바람벽’이라고 하면 ‘방을 둘러막은 둘레’를 가리킨다. 이는, 방 안과 방 밖을 엄격히 구분한다. 그러니 바람이 오가지 못한다. 절망이 앞을 가로막는다.
지구촌에 하나 남은 휴전선 저 DMZ
솔로몬도 가늠 못할, 디지털도 풀 수 없는
엇나간 마음의 빗금 출렁이는 물너울.
-조성제, 「바람벽」 셋째 수
그렇다. 바람벽으로 가장 큰 것을 꼽는다면 단연코 DMZ이다. 이는, 적중어가 될 것 같다. 아무리 큰 지혜를 지녔다고 하더라도 가늠 못 하고, 또 아무리 높은 현대기술이라고 하더라도 풀 수 없는 장벽이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허물어야 할 바람벽이기도 하다.
*김재황 약력
1942년 출생. 고려대학교 졸업. 1987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시조집『묵혀 놓은 가을엽서』『서호납줄갱이를 찾아서』『양구에서 서귀포까지』동시조집『넙치와 가자미』시조선집『내 사랑 녹색세상』외 다수. 세계한민족문학상 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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