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이춘원 시인의 시 세계

시조시인 2024. 3. 29. 19:00

베풂 숲에 다다른 가을 詩人-  이춘원 시인의 시 세계 

 

 김 재 황

 

1. 들어가며

 

그러니까 이춘원 시인이 제6시집 해바라기를 펴낼 때 해설을 썼던 기억이 있다. 그해가 2010년이니 어느덧 13년이 훌쩍 지났다. 그 당시에는, ‘상황문학문인회를 밀고 끌던, 그야말로 그는 새파란 여름을 딛고 살았다. 틈만 있으면 문학기행에 나셨던 정말 신바람 나던 삶의 시기였다. 얼마나 즐거웠던가. 그 후로, 그는 5권의 시집을 더 펴냈고, 공직에서 정년을 맞이하였으며, 여전히 시인과 종교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금 펴내려는 시집은 제12시집 깊은 밤에도 나무는 푸른 꿈을 꾼다인데, 또 해설을 쓰게 되었으니, 감회가 새롭다. 그런데 그도 스스로 그러하게 나이가 지긋이 들었다. 인생의 가을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러나 가을은 슬픈 계절이 아니다. 오히려 베풂이 충만한 시기이다.

누가 지금까지 읽은 책 중에서 가장 좋은 책을 말하라면, 물론 성경이다. 그리고 그다음으로 내세울 만한 책으로는 노자도덕경이 있다. 정확한 책명은 노자의 도경과 덕경이다. 이 책을 통하여 노자는,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인, ‘’()베풂’()을 밝혔기 때문이다. 시인에게 있어서 를 쓰는 일이 바로 그 이요 그 길을 가면서 을 아끼는 일이 바로 그 베풂이다.

삶에 있어서 봄에 꽃이 피고 여름에 열매를 키우는 일이 모두 성실한 의 일이지만, 특히 가을은 여문 열매를 내주는 베풂의 일을 행한다. 그도 이제 인생에서 베풂의 계절인 가을의 문턱을 넘었다. 이는, 의식을 지니든 안 지니든, 그가 내놓은 작품들에 그 빛깔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러면 지금부터 가을이 묻어 있는 그 작품들을 하나하나 꺼내어서 살펴보고자 한다.

 

 

2. 가을 숲의 이야기들

 

그 모습을 우두커니

바라보노라니

스쳐 간 인연들이 생각나

눈이 젖는다

땅이 온통

황금빛 눈물바다다.

작품 나무의 서사시중에서

 

이 작품에는 나는 은행나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그리고 맨 아래에는 아산시 배방읍에 맹사성 21대손이 사는 고택에는 700년 된 은행나무가 늠름하다.’라고 씌어 있다. ‘황금빛 눈물바다!’ 이는, 떨어져 쌓여 있는 은행나무 잎에 대한 슬픈 느낌이다. 왜 슬픈가? 스쳐 간 인연들이 그립기 때문이다. 그게 황금빛으로 값을 지닌다.

시인의 느낌이야 그렇더라도, 나무가 가을에 잎을 떨어뜨리는 것은 다가올 겨울을 대비하는 베풂이다. 스스로 떨어져서 나무의 부담을 덜어 주는 일도 눈물겨운 베풂이지만, ‘추위를 견디어야 하는 뿌리위에 푹신한 덮개가 되어 주는 일도 크나큰 베풂이 아닐 수 없다. 고전 노자도덕경을 본다.

 

높은 베풂은 베풂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베풂이 있다. 낮은 베풂은 베풂을 잃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므로 베풂이 없다. 높은 베풂은 함이 없으면서 함을 생각함이 없고, 낮은 베풂은 이를 하면서 함을 생각함이 있다. 높은 어짊은 하면서도 함을 생각함이 없고, 높은 옳음은 하면서도 함을 생각함이 있으며 높은 몸가짐은 하면서도 따르지 않으면 곧 팔을 걷어붙이고 억지로 하게 한다.(上德不德 是以有德. 下德不失德 是以無德. 上德無爲而無以爲 下德爲之而有以爲. 上仁爲之而無以爲 上義爲之而有以爲 上禮爲之而莫之應 則攘臂而扔之.)[노자도덕경 38장 중에서]

나는 떨어진 은행나무 잎을 보며 높은 베풂을 생각한다. 결코 의도적인 게 아니라 스스로 그러하다. 베풂을 베풂이라고 생각하는 바가 없으니 그 큼이 있다.

 

어느 날, 먼 나라 전설처럼 서 있던

상수리나무가 파랗게 질려 있다

(도토리거위벌레가 톱날을 들이댄 것이다)

무참히 잘려 나간 어린 가지가

풋열매를 달고 속절없이 떨어져 버린 날

감당할 수 없는 상처를 안고

상수리나무가 하르르 떨고 있다

-작품 상수리나무를 만나다중에서

 

상수리나무는 비교적 큰 나무들이 많다. 그 이유가 분명히 있다. 재목으로 쓸모가 없는 나무라고 생각하여 사람들이 벌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고전 장자에 담겨 있다.

 

큰 목수인 이란 사람이 제나라로 가다가 곡원이라는 곳에 다다라서 땅의 신을 모시는 사당에 자라고 있는 상수리나무를 보았다. 그 크기는 수천 마리의 소를 (그늘로) 덮을 만하고 (그 둘레가) 일백 아름이나 될 성싶었으며, 그 높이는 산을 내려다보고, (땅에서부터) 열 길이 지나서야 가지가 있는데 배를 만들 만한 곁가지가 열댓 개나 되었다. 보려는 사람이 마치 저잣거리처럼 많았지만 큰 목수인 은 돌아보지도 않고 가던 길을 그대로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장석의) 제자는 그 나무를 실컷 보고 나서 큰 목수 에게로 달려가서 말했다. “제가 도끼를 잡고 스승님을 따른 이래로 아직 일찍이 이처럼 훌륭한 재목을 본 적이 없습니다. 선생님은 제대로 보시지도 않으시고 그대로 걸음을 멈추지 않으시니, 어찌 된 까닭입니까?” (장석이) 말했다. “아서라, 그런 말은 꺼내지도 마라! 쓸모없는 나무인데, 배를 만들면 가라앉고 관의 곽을 짜면 빨리 썩으며 그릇을 만들면 쉽게 헐고 문짝이나 지게문을 만들면 나뭇진이 흐르고 기둥을 만들면 좀이 슬어 버린다. 이것은 재목감의 나무가 못 되니, 씀에 마땅한 바가 없었다. 그런고로 이처럼 오래 살 수 있었다.”(匠石之齊, 至於曲轅, 見櫟社樹. 其大蔽數千牛, 絜之百圍, 其高臨山十仞而後有枝, 其可以爲舟者旁十數. 觀者如市, 匠伯不顧, 遂行不輟. 弟子厭觀之, 走及匠石, 自吾執斧斤以隧夫子, 未嘗見材如此其美也. 先生不肯視, 行不輟, 何邪?” 已矣, 勿言之矣! 散木也, 以爲舟則沈, 以爲棺槨則速腐, 以爲器則速毁, 以爲門戶則液樠, 以爲柱則蠹. 是不材之木也, 無所可用, 故能若是之壽) [장자 제4]

이런 이유로 사람들의 벌채는 면했으나, 벌레들이 톱날을 들이대니 어찌 떨지 않을 수 있겠는가. 목숨을 가진 이상, 나무든 사람이든 근심이 끊일 날이 없다.

 

속절없이 늙어가는 몸

깊은 주름살에

달콤한 맛이 들고

이 가을에

빙긋이 미소 짓는

세월이

바람 곁에 서 있다

-작품 가을대추중에서

 

이 시의 내용으로 보아서 나무 자체가 아니라, 열매를 가리키고 있는 게 분명하다. 핵과(核果)인 대추 열매는 길둥글거나 공 모양이고 9~10월에 적갈색(赤褐色) 또는 암갈색(暗褐色)으로 익는다. 열매는 먹을 수는 있지만 과육이 적다. ‘동의보감에 의하면, 묏대추나무 씨 속에 든 알맹이는 산조인’(酸棗仁)이라고 하여 속이 답답해서 잠을 잘 자지 못하는 증상, 배꼽의 위아래가 아플 때, 피가 섞인 설사 증상, 식은땀이 날 때 등에 효과가 있다.’라고 한다. 그래서 간의 기능을 보호하며 힘줄과 뼈를 튼튼하게 한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병을 치료하는 효능을 지녔으니 그 어찌 베풂이 크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가을대추는 군자의 나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고전 논어를 본다.

 

공자가 말했다. “군자는 베풂을 생각하고 소인은 땅을 생각하며, 군자는 형벌을 생각하고 소인은 은혜를 생각한다. (子曰 君子 懷德 小人 懷土, 君子 懷刑 小人 懷惠) [논어 이인 11]

 

여기에서 잠깐, 작품 중 바람 곁에 서 있다를 본다. 이 문장에서 말하는 바람다의어’(多義語, polysemy)이다. 이처럼 다의적인 것을 시어의 애매성(曖昧性, ambiguity)이라고 한다. , 이 바람은 부는 바람’()마음에 지니는 바람’(所望)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시에서 괄호 안에 한자를 넣으면 안 된다. 그게 바로 독자에게 고정관념(固定觀念)을 심어 주게 된다. 독자는 작품을 읽으며 마음껏 상상의 날개를 펼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오히려 시의 특성이며 중요한 자산이다. 시가 일반 산문처럼 길지는 않다. 하지만 그 이상의 많은 의미와 감정을 담을 수 있다. 이는, 바로 이 애매성때문이기도 하다.

 

늦은 아침

아파트 현관을 나서는데

싸한 바람 한 줄기가

빠른 걸음으로 들어온다

 

한 손에 들려 있는

붉은 감잎 하나

가을빛이 물들었다

-작품 가을빛 감잎에 들다중에서

 

붉은 감잎은 그냥 잎이 아니다. 수줍음에 물든 순이의 낯빛이다. 그렇다면 가을은 순이의 모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듯 가을은 시인의 품으로 안겨든다. 그러니 어찌 사랑스럽지 아니하겠는가. 그러나 붉은 감잎 속에는 순이만 들어 있는 게 아니다. 친구도 들어 있고 형제도 들어 있다. 고전 논어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제자인 자로가 어떻게 하면 선비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여쭈니,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정성스럽고 자상하면 가히 선비라고 이를 것이니, 곧 친구에게는 정성스럽고 자상하며 형제간에는 기뻐하고 기뻐하라.”라고 하셨다.(子路 問曰 何如 斯可謂之士矣. 子曰 切切偲偲 怡怡如也 可謂士矣 朋友 切切偲偲 兄弟 怡怡)[논어 자로 28]

여기에서 절절성의를 다하여 권하는 모양을 가리키고, ‘시시자세히 고하는 모양을 나타낸다고 한다. 물론, ‘붕우라고 한다면 그냥 아무 곳에서나 막 사귄 사람이 아니라, 함께 공부한 학우정도로 여러 사람이 이해하고 있다.

 

나뭇잎은 나무의 생명이고

나무는 나뭇잎의 고향

 

나는

나뭇잎이고

너는

한 그루 나무다

-작품 나무와 나뭇잎

 

나무와 나뭇잎이 한 몸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런데 내가 나뭇잎이고 너는 한 그루 나무라니! 이건 무슨 말인가. 나와 너는 지극히 가까운 사이이고 나는 언제든지 너를 위해 내 목숨을 희생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닐까. 그런데 시경에는 다음과 같은 노래가 있다.

 

蘀兮蘀兮 낙엽이여 낙엽이여

風其吹女 바람이 너에게 불고 있네

叔兮伯兮 삼남이여 장남이여

倡予和女 나에게 노래하면 너에게 응답하리.

 

蘀兮蘀兮 낙엽이여 낙엽이여

風其漂女 바람이 너에게 떠서 흐르네

叔兮伯兮 삼남이여 장남이여

倡予要女 나에게 노래하면 너에게 화답하리.

- 정풍 중 탁혜전문

 

놀랍게도 고전인 여기에서는, 낙엽이 총각처녀의 마음을 대변한다. 평석(評釋)을 보면, ‘이것은 비교적 오래된 일 것이다. 바람에 불려 떨어지는 나뭇잎의 필연성(必然性), 부르기만 하면 달려갈 애정(愛情)을 불러일으킨 것이라고 되어 있다.

 

나는 어머니의 꽃이었을까

어머니에게 어떤 열매였을까

바람 부는 날 행여 떨어질세라

노심초사 깊은 한숨이었을까

 

어머니가 떠나시고

가을하늘이 더 높아진 것은

때늦은 후회에 눈물 흘리는

자식의 한숨, 그 아득함이라

- 작품 가을하늘이 높은 이유중에서

 

어머니에게 자식은 꽃이고 열매며, 그 삶의 전부일 터이다. 논어를 보면 자식에 대한 부모의 마음이 한마디로 표현되어 있다. 그야말로 일발필중’(一發必中)이다.

 

맹무백이 효를 물으니,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부모는 오직 자식들이 아플까 봐 걱정한다.”

(孟武伯 問孝. 子曰 父母 唯其疾之憂) [논어 위정 6]

특히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사랑은 절대적이다. 그런데 이게 내리사랑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어떤 자식이 어머니의 이 지극한 사랑을 반이라도 갚을 수 있겠는가. 그런가 하면, 고전 맹자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있다.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길은 가까운 데 있음에도 멀리서 찾고, 일은 쉬운 데 있음에도 어려운 데서 찾는다. 사람과 사람이 자기 부모를 부모로 섬기고, 자기 어른을 어른으로 섬기면 천하는 화평해진다.”(孟子曰 道在爾而求諸遠 事在易而求諸難 人人 親其親 長其長 而天下平)[맹자 이루 장구 상 11]

 

사람은 그 열매로

됨됨이를 알 수 있다는데

오늘, 나는 무슨 열매를 맺고 있는가.

바람을 만나면 어떤 노래를 부를까

나는, 어떤 열매를 맺는 나무인가,

오늘 부른 나의 노래는 무엇일까.

-작품 양철나무중에서

 

양철나무양철로 만든 나무일 성싶다. 찌그러진 열매를 달고 있을 뿐만 아니라, 바람이 불면 덜그럭덜그럭 노래를 부른다. 하지만, 열매로 말하자면, ‘아주 못생겼는데, 노래는 무척이나 향기로운나무가 있다. 그 나무는 바로 모과나무이다. 시인이라면 누구나 모과나무를 닮고자 할 것이다.

모과, 보기에 아름답지 않지만, 큰 믿음성을 지니고 있다. 귀한 약재로 쓰이며 아름다운 향기를 풍기고 있다. 게다가 모과, 벌레 먹고 못생긴 것일수록 향기가 높다. 그 반면에, 잘생긴 것은 가치가 낮다.

모과는 우리를 네 번 놀라게 한다. 처음에는, 모과가 찌그러지고 일그러졌기 때문에 보는 이마다 어쩌면 저리도 못생겼을까 하고 놀란다. 그렇지만 잘 익은 모과의 냄새를 맡아 보고는 그 향기로움에 또 한 번 놀라게 된다. 그렇다면 맛은 어떨까 하여 먹어 보고는 몹시 시어서 다시 놀란다. 그리고 나중에는 이 모과가 한방에서 매우 귀한 약재로 쓰인다는 사실에 또다시 놀라게 된다.

모과는 익을 무렵에 따서 적당하게 썬 다음, 햇볕에 말린 후, 약재로 쓸 때는 다시 잘게 썬다. 모과에는 타닌’(tannin)이 많이 함유되어 있다. 그 밖에도 사포닌’(saponin)비타민C’ 사과산구연산등이 풍부하게 들어 있다고 한다. ‘진해’ ‘거담’ ‘지사’ ‘진통등의 효능이 있어서 백일해’ ‘천식’ ‘기관지염’ ‘폐렴’ ‘가슴막’ ‘각기’ ‘설사’ ‘신경통’ ‘근육통’ ‘빈혈증등에 쓰인다. 동의보감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갑자기 토하고 설사를 하면서 배가 아픈 위장병에 사용하면 좋으며, 소화를 잘 시키고 설사 뒤에 오는 갈증을 멎게 한다. 또 힘줄과 뼈를 튼튼하게 하고 다리와 무릎에 힘이 빠지는 것을 낫게 한다.’

모과차도 즐겨 마시는데, 모과를 얇게 썰어서 설탕을 넣고 조려 두었다가 뜨거운 물을 부어서 마신다. ‘모과주, 하룻밤쯤 그늘에 말려서 얇게 썰어 놓은 모과 1킬로그램과 설탕 200그램 정도를 섞은 후에 소주를 부어 두었다가 마시게 된다. 이 차와 술은 피로 해소에 좋다고 한다. ‘모과시경에도 등장한다. 향기가 한몫한다.

 

投我以木瓜 나에게 모과를 던져 주기에

報之以瓊琚 어여쁜 패옥으로 갚아 주었지

匪報也 갚자는 게 아니라

永以爲好也 오래 좋게 지내보자고.

-작품 위풍 모과중에서

 

이는, 그 당시에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향기로운 과일을 던지면 이쪽은 이쪽대로 구슬을 던지고---. 남녀의 즐거운 시시덕거림이 눈에 보이는 듯싶다고 적어놓았다. 말하자면 그 향기로 사랑을 얻는다는 말이다. 정말이지, 사람들도 짝의 선택은 여자가 하는 게 옳다. 그게 자연의 법칙이다. 장끼가 아름다운 깃털을 세우고 언덕 위에서 멋지게 목소리를 내면, 풀숲에 숨은 까투리가 그 모양을 보고 마음에 들어야(건강한 게 멋지기에) 그 가까이 간다. 왜 그럴까? 까투리는 오직 튼튼한꺼병이를 원하기 때문이다.

 

비 오시는

가을 아침

오색 빛 고운 옷을 입은

사람들이

햇살 한 줌을 마음에 품고

산길에 서 있습니다.

 

관악산을

속 깊게 하는 언어가

고운 그림을 만나

산길을 물들이고

 

오가는 사람들

마음 마음에

그리움 한 움큼씩 뿌리고 갑니다.

- 작품 시가 그림을 만나다전문

 

맨 아래에 ‘2018. 10. 1. 관악산 시화전에서라는 글이 첨부되어 있다. 그러므로 시가 그림을 만남시화전을 뜻한다는 걸 알겠다. 그림과 언어가 만나 산길을 물들이고, 이를 보는 사람들에게는 마음에 그리움을 남게 한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왜 시화전은 가을에 열어야만 하는가?’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 해답이 고전 노자도덕경에 있다.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 물은 모든 것에게 잘 보탬이 되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고, 뭇사람이 꺼리는 곳에 머무른다. 그 까닭에 길과 거의 가깝다.

앉는 곳은 땅이 좋아야 하고, 마음은 깊어야 좋으며, 주는 것은 어질어야 좋고, 말은 믿음이 있어야 좋으며, 본보기는 다스림이 좋아야 하고, 일은 잘해야 좋으며, 움직임은 때가 좋아야 한다. 무릇 오직 다투지 않는다. 그 까닭에 허물이 없다.

(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故幾於道. 居善地 心善淵 與善仁 言善信 正善治 事善能 動善時. 夫唯不爭 故無尤) [노자도덕경 제8]

 

이 글 중에서 특히 움직임은 때가 좋아야 한다.’를 주의 깊게 보아야 한다. 시화전을 열려면 장소도 중요하겠지만, 특히 때를 잘 골라야 한다. 한여름에 시화전을 개최한다거나 한겨울에 시화전을 개최한다면 누가 그 시화전을 보려고 가겠는가. 봄이라고 해도 꽃을 보려고 떠나는 사람을 막기 어렵다. 가을에 시화전 개최를 정했기에, 비가 오는 날인데도 관람객이 왔다고 본다.

 

주산지 왕버들

차가운 물 속에 발을 담그고

명상이 깊다

 

가는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다 숨을 멈춘다

서서히 침잠하는 순간

온몸이 물속에 잠긴다

-작품 투영중에서

 

맨 밑에 부언으로 ‘2919. 11. 2. 주왕산 주산지의 수령 150여 년의 왕버들을 보다라는 글귀가 있다. 왕버들은 누구나 무척 좋아하는 나무이다. 특히 농촌에서 어렸을 적에는 나이 많은 왕버들을 타고 놀기도 한다. 지금도 언제나 많은 사람이 보라매공원의 물가에 서 있는 왕버들 그늘을 찾는다. 그 앞에는 멋진 팔각정이 있다. 이 고목 왕버들을 만나면 모두가 늘 어린아이처럼 된다. 물론 오래전의 일이지만, 문우들과 주산지의 왕버들도 만난 적이 있다. 물속에 발을 딛고 있으니, 첨벙첨벙 찾아 들어가서 함께 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동심을 일으키는 왕버들! 고전 맹자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대인은 그 어린이 때의 마음을 잃지 않는다.”(孟子曰 大人者 不失其赤子之心者也) [맹자 이루장구 하 12]

여기에서의 적자지심어린이 그대로의 순진한 마음을 나타낸다. , 맹자의 참고’(參考) 난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담겼다.

티 없이 순진한 마음의 소유자가 대인이란 말이다. 맹자는, ‘사람은 원래 나면서부터 선하다.’라고 주장하신 분이다. 선한 본성을 그대로 지니고 사는 사람이면 대인이다. 조기(趙岐), 대인을 군주(君主)로 보고 적자(赤子)를 백성으로 보았다. 그리고 군주가 백성을 어린아이 사랑하듯이 하면 백성들이 따르게 될 것이니, 대인의 일은 이런 것에 불과하다고 해석하였다.”

 

육십여 년을 짊어지고

참으로 먼 길을

동행하던 배낭이

 

오늘

돌아보니

많이 낡았습니다.

-작품 낡은 배낭중에서

 

여기에서 말하는 배낭은 아마도 시인 자신의 을 가리키는 성싶다. 실제로 하나의 배낭을 육십 년 동안 맬 수도 있겠지만, 시에서의 은유를 무시하면 무미건조해진다. ‘낡은 배낭’, 다시 말해서 늙은 몸을 보면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고전 노자도덕경을 보면, 우리의 몸에 관한 이야기가 적나라하게 적혀 있다.

 

귀염받음과 미움받음이 두려움과 같고, 큰 근심이 몸과 같이 빼어나다. 어찌 귀염받음과 미움받음이 두려움과 같은가? 귀염받음은 아래를 잘 되게 함이니 그걸 얻어도 두려움과 같고 그걸 잃어도 두려움과 같다. 이를 일컬어서 귀염받음과 미움받음이 두려움과 같다.’라고 한다.

어찌 큰 근심이 몸과 같이 빼어나다고 일컫는가?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까닭은 나에게 몸이 있다.’라고 하기 때문이다. 내가 몸이 없음에 이르면 나에게 무슨 근심이 있겠는가.

그 까닭에 몸을 빼어나게 여기는 마음으로 하늘 아래를 빼어나게 여긴다면 하늘 아래를 부쳐도 옳을 것 같고, 몸을 아끼는 마음으로 하늘 아래를 아낀다면 하늘 아래를 맡겨도 옳을 것 같다.’(寵辱若驚 貴大患若身 何謂寵辱若驚? 寵爲下 得之若驚 失之若驚 是謂寵辱若驚 何謂貴大患若身? 吾所以有大患者 爲吾有身 及吾無身 吾有何患. 故貴以身爲天下 若可奇天下 愛以身爲天下 若可託天下) [노자도덕경 제13]

 

내가 몸이 없음에 이르면 나에게 무슨 근심이 있겠는가.’라는 말이 우레 소리로 내 가슴에 와 닿는다. 모든 일이, 몸을 잘 지키기 위해 일어나지 않는가. 몸이 없다면 근심도 없겠지만 즐거움도 없게 된다. 넋이 있다고 한들 그게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살아 있는 동안에 무엇보다도 몸을 빼어나게 여겨야 한다.

 

사람마다 공평하게 가진 것이

자신의 이름이다

부모의 소망과 꿈을 담은 이름

그 이름을 지키며 사는 것이

정명이다.

-작품 정명론중에서

 

이 작품의 아래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붙어 있다. “‘정명’(正名)은 논어에 나오는 君君臣臣父父子子이름을 바로잡다.’라는 의미인데 ‘~답게로 표현할 수 있다.” ‘군군신신부부자자라는 이 글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지니고 있다. 고전 논어를 본다.

 

제경공이 공자께 정치를 물으니, 공자께서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아버지는 아버지답게 아들은 아들답게 할 것입니다.”라고 하셨다. 제경공이 참 좋은 말씀입니다. 진실로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고, 아버지가 아버지답지 못하고, 아들이 아들답지 못하면 비록 곡식이 많이 있어도 내 어찌 그것을 먹을 수 있겠습니까.”하였다. (齊景公 問政於孔子 孔子 對曰 君君臣臣父父子子. 公 曰善哉. 信如君不君 臣不臣 父不父 子不子 雖有粟 吾得而食諸)[논어 안연 11]

 

, 이름에 관한 이야기는, 고전 노자도덕경에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길은 늘 그러한 이름이 없으니, 통나무 같은 수수함은 비록 작으나 하늘 아래 그 누구도 신하로 삼을 수 없다. 작은 나라의 임금이 만약에 잘 지킬 수 있으면 모든 것이 앞의 어느 때에 스스로 따르게 한다. 하늘과 땅이 서로 모이고 이로써 달콤한 이슬이 내린다. 나라 사람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고르다. 처음으로 만들 때 이름이 있으니, 이름 또한 이미 있으면 대저 이 또한 어느 때에 그칠 줄 알아야 한다. 그칠 줄 안다면 말 그대로 틀림없이 위태롭지 않다. 빗대어 말하건대 길이 하늘 아래 머물러 있음은 골짜기의 냇물이 강과 바다로 흘러듦과 비슷하다. (道常無名 樸雖小 天下莫能臣也. 候王若能守之 萬物將自賓. 天地相合 以降甘露 民莫之令 而自均. 始制有名 名亦旣有 夫亦將知止 知止 可以不殆. 譬道之在天下 猶川谷之於江海) [노자도덕경 제32]

 

옴팡진 자리에 묻혀

느슨하게 몸을 풀고

모락모락 커피 향을 마시며

느릿느릿한 템포에 맞춰

누르스름한 종이에

시의 말을 나열하다가

 

, 바로 이거야

가슴을 탁 트이게 하는

언어 한 조각 얻는다면

-작품 입추에 부르는 노래중에서

 

시를 쓰는 마음이 ’()에 드는 방법임을 아는 사람은 다 안다. 공자는 이 어짊에 드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지적했다. 그 이야기가 고전 논어에 담겨 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안회는 그 마음이 석 달을 지나도 어짊에 어긋나지 않았는데, 그 나머지는 하루 한 번이나 한 달에 한 번을 어짊에 이르고 만다.”(子曰 回也 其心 三月不違仁 其餘則日月至焉而已矣.)[논어 옹야5]

그런가 하면, 어짊’()의 실마리에 관한 이야기가 고전 맹자에 다음과 같이 씌어 있기도 하다.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은 누구나 차마 남에게 어떠한 일을 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 옛날의 어진 왕들(先王)차마 남에게 어떠한 일을 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어서 또한 남에게 차마 남에게 어떠한 일을 하지 못하는 정치를 하였다. 그러니 차마 남에게 어떠한 일을 하지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 차마 남에게 어떠한 일을 하지 못하는 정치를 한다면, 천하를 다스리기는 손바닥 위에서 물건을 움직이기처럼 쉬운 일이다. ‘사람들이 모두 차마 남에게 어떠한 일을 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라고 말하는 까닭은 이러하다. 이제 사람들이 우물에 빠지려는 어린아이를 문득 보았다고 하면, 모두 깜짝 놀라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일어나게 된다. 그 까닭은 그 어린아이의 부모와 사귐이 있어서도 아니고 동네 사람과 벗들에게 칭찬받으려는 것도 아니며 구해 주지 않았다는 소리를 듣기 싫어서도 아니다.”(孟子曰 人皆有不忍人之心. 先王有不忍人之心, 斯有不忍人之政矣. 以不忍人之心, 行不忍人之政, 治天下可運於掌上. 所以謂人皆有不忍人之心者, 今人乍見孺子 將入於井 皆有怵惕惻隱之心 非所以內交於孺子之父母也, 非所以要譽於鄕朋友也, 非惡其聲而然也.) [맹자공손추 장구 상 6. 중에서]

 

억새꽃에 갈바람이 불었습니다

숲은, 또 다른 꿈을 위해

고운 꽃빛 옷을 입었습니다

살아 온 날들을 생각하니

참 아득합니다

- 작품 가을꽃이 되다중에서

 

이 작품은 부제로 김순기 님을 생각하며가 붙어 있고, 작품 끝에는 김순기 님은 북서울꿈의숲에서 색연필로 야생화를 그리시던 분이라는 설명이 있다. 그 모습이 억새꽃에 어울려서 아련하게 나타나는 느낌이 든다. , 하늘공원의 억새가 아름다웠다! 그 억새 숲 안에 숨은 야고는 잘 있는지! 이런 곳으로 가면, 무엇보다 눈이 호사를 누리게 된다. ‘눈이 보는 것은 바로 마음의 움직임이다. 그 마음이 그림으로 다시 나타난다. 고전 대학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마음이 여기 있지 않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으며 먹어도 그 맛을 알지 못한다. (心不在焉 視而不見 聽而不聞 食而不知其味)[대학 장구28]

 

그뿐만 아니라, 고전 맹자에는 다음과 같은 눈에 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에게 갖추어져 있는 것 가운데 눈보다 착한 것이 없으니 눈동자는 그 사람의 악을 가리지 못한다. 마음속이 바르면 눈동자가 맑고 마음속이 바르지 못하면 눈동자가 흐리다. 그 말을 듣고 그 눈동자를 보면 사람이 어찌 그 본심을 속일 수 있겠는가?”(孟子曰 存乎人者 莫良於眸子 眸子 不能掩其惡 胸中 正則眸子 瞭焉 胸中 不正則眸子 眊焉. 聽其言也 觀其眸子 人焉廋哉.)[맹자 이루 장구 상 15]

 

이와 맥을 같이하는 또 한 작품을 본다.

 

미사리 숲 은사시나무 위에서

솔부엉이 한 마리가

나를 바라본다

황금빛으로 감싸인 까만 눈동자

-작품 시선중에서

 

이 작품을 읽으면, “아무리 어두운 세상일지라도 저 부엉이의 황금빛으로 감싸인 까만 눈동자처럼 맑고 바르게 살아야 하겠다.”라는 마음을 갖게 된다.

 

여기에서 다시 잠깐, 시에 있어서 시인이 자기의 느낌을 그림 그리듯이 글로써 디자인하는 일이 있다. 이를 형상화’(形象化)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형상화, 어떤 감동의 단서를 시인이 어떤 생각에 따라 예술적으로 다시 창조하는 것을 가리키는 성싶다. 더 쉽게 말하면 시인이 모든 감각기관을 통하여 어떤 느낌을 받았을 때, 그것을 그림을 그리듯 설명이 아닌 묘사로 나타내는 것을 이른다. 이는, 시를 꽃으로 만드는 핵심적 요소이다. 거기에서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도 있고 아름다운 소리도 들을 수 있으며 향기로운 냄새도 맡을 수 있고 좋은 맛도 즐길 수 있다. 게다가 촉감까지 느낄 수 있다. 이게 바로 시의 형상화이다. 그렇기에 화가는 시인과 가장 가깝다.

 

가을이 저물어 갑니다

초승달이 서쪽으로 기울고

노인과 늙은 개는

낙엽 길을 바스락바스락 걸어가고

 

초로의 사내가 깊은 한숨을 쉬고

차가운 벤치에

낙엽 한 잎 누워 있습니다.

-작품 노인과 늙은 개중에서

 

물론, 여기에서 초로의 사내는 시인 자신일 성싶다. 그가 벤치에 앉아서 걸어오고 있는 노인과 늙은 개를 바라보고 있다. 그 모습이 벤치에 누워 있는 낙엽과 오버랩된다. 그런데 왜 그는 한숨을 쉴까? 어쩌면 그도 싯다르타처럼 사람은 왜 늙어야만 하는가?’를 묻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또 어쩌면 노인은 미래의 시인 자신이고 늙은 개는 두려움의 그 그림자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미래의 내 모습을 조금 더 떳떳하고 당당하게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열심히 일한 만큼 노인은 존중받아야 한다. 지금의 이 나라는 그런 노인들이 만들어 놓은 게 아닌가. 그런 뜻에서 늙은 개와는 달리, 긍정적으로 등장하는 게 부엉이이다.

 

억새 바람 스산한 숲속에

텅 빈 마음으로 사색하는

솔부엉이 한 마리

매운바람 속에서

또 한 세월을 견디고 있다.

-작품 사색하는 부엉이중에서

 

여기의 솔부엉이도 시인 자신으로 본다. ‘세월을 견딘다는 말세월에 맞선다는 말이기도 하다. 사색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당당히 앞으로 나선다는 뜻이다. 과거에 우리가 밤잠을 덜 자고 일했던 것처럼, 다시 부엉이가 되겠다는 각오이기도 하다. 모름지기 언제든 자기 자신을 잊으면 안 된다. 문득 고전 맹자에 들어 있는 한 구절이 떠오른다.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사람들이 항상 하는 말이 천하국가라고 하는데, 천하의 근본은 국가에 있고 국가의 근본은 가정에 있으며 가정의 근본은 자기 자신에 있다.”(孟子曰 人有恒言 皆曰天下國家 天下之本 在國 國之本 在家 家之本 在身.) [맹자 이루 장구 상5]

 

사랑하는 아우가

연둣빛 환자복을 입고

나뭇잎에 스치는 가을바람처럼

가느다란 숨소리로 시간을 부여잡고 있다

- 작품 아우를 보며, 병상에서중에서

 

이 작품의 아래에는 ‘2018. 1. 25. 아우와 함께 신장이식 수술에 들어가다.’라는 글귀가 있다. 이춘원 시인은 아우에게 신장이식을 해주었다. 참으로 그 형제애가 뜨겁다. 형제가 정을 나누며 사는 게 마땅한 일인데, 세상 사람 모두가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이 시집에는 이와 관련된 작품이 몇 편 더 있다. 작품 7번 방 앞에서」 「병원 가는 길그리고 퇴원을 준비하며등이다.

시의 원류인 시경에는 형제애에 대한 시가 다음과 같이 들어 있다.

 

儐爾籩豆 맛있는 안주를 차려 놓고

飮酒之飫 배부르게 술을 마시어도

兄弟旣具 형제가 모두 모여야

和樂且孺 어린애처럼 화목하고 즐겁다네.

 

妻子好合 아내도 자식들도 뜻이 맞아서

如鼓瑟琴 금과 슬이 어울리듯 하려면

兄弟旣翕 형제가 다 모여 앉게 된 후에야

和樂且湛 깊은 물처럼 화목하고 즐겁다네.

- 시경 소아 녹명지십 상체중에서

 

상체’(常棣)라는 나무는, 우리나라에서 산사나무라고 부른다. 산사나무는 그 학명이 Crataegus pinnatifida이다. 속명(屬名)‘Crataegus’는 희랍어 ‘kratos’(:)‘agein’(갖다)의 합성어라고 한다. 이 나무의 꽃은 연인을 생각나게 하고, 이 나무의 열매는 형제를 생각하게 한다. 산사나무의 열매는 작고 둥근 적색인데 우애 좋은 형제처럼 모여서 매달린다. 이 열매를 산사자(山査子)라고 하는데 신맛이 있으며 약용 및 식용한다.

 

길이 없는 곳에

길을 열어 인도하신

그곳에

우리 하나님

활짝 웃고 계십니다

-작품 꽃으로 찾아오신중에서

 

이 작품을 읽으면 쉽게 구절초가 떠오른다. 하얗게 웃고 있는 구절초! 이 구절초는 가을의 꽃이다. 여러 사람이 구절초를 무척이나 좋아하는데, 이따금 그분이 구절초의 모습으로 나타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처럼 순결한 모습의 꽃이라니, 정말이지 참된 마음을 지녔을 듯싶다. 이에 관한 이야기가 고전 중용에 다음과 같이 들어 있다.

 

참된 마음인 바로 그것은 하늘의 길이다. 그리고 참된 마음을 지니려고 하는 것은 사람의 길이다. 참된 마음인 바로 그것은 힘쓰지 않아도 들어맞고 바라지 않아도 얻게 되며 차분하고 찬찬해도 길에 알맞으니 거룩한 이라고 할 수 있다. 참된 마음을 지니려고 하는 것은 착함을 골라서 굳게 잡는 사람의 일이다.’(誠者 天之道也. 誠之者 人之道也 誠者 不勉而中 不思而得 從容中道 聖人也. 誠之者 擇善而固執之者也.)[중용 제20장 애공문정장 75]

 

이춘원 시인이 신앙인인 만큼, 이 시집에 실린 모든 작품에 그 믿음이 담겨 있다. 그러나 작품 꽃으로 찾아오신은 본격적인 신앙 시라고 할 수 있다. 작품 방패연」 「익투스, 몽골에 가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성탄절 아침의 노래」 「주님, 딸이 떨고 있어요」 「그물을 씻고 있을 때」 「요셉의 구덩이」 「절망의 언덕에서」 「가나안 땅을 향하여」 「여리고성을 넘어서」 「찬양하는 사람들, 익투스등이 모두 그렇다.

 

하늘로 낸 창을 닫아걸고

땅만 바라보고 걷느냐고

언제까지 세상만 바라보고 살 거냐고

호통치는 소리가 들린다

 

비 오시는 날

우산을 펼쳐 들고 거리를 걸으면

하늘에서 내리는 음성이 들린다

-작품 우산중에서

 

이 작품의 맨 아래를 보면, ‘2018. 4.23. 병원 가는 길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하니, 시인이 하늘의 호통 소리를 들었을 때는 분명히 봄이다. 그러나 이 작품을 읽으며 가을비를 생각한다. 그리고 아침에 내리는 비가 아니라, 저물녘에 내리는 비를 생각한다. 이때 우산을 받고 걸어가는데 호통치는 하늘 소리를 듣는다면 더욱 무서울 터이다. 인생의 가을! 낙엽처럼 하늘로 갈 날이 얼마 안 남았으니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그러나 하늘 소리는 다른 말로는 천명이다. 스스로 천명을 제대로 따랐다면 또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스스로 최선을 다했으면 묵묵히 하늘의 처분을 기다리면 된다. 문득 고전 맹자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자기의 마음을 다하는 사람은 자기의 본성을 알고, 본성을 알면 하늘을 알게 된다. 자기 마음을 보존하여 본성을 기르는 것은 하늘을 섬기는 것이요, 단명하거나 장수하거나 개의치 않고 몸을 닦아서 천명을 기다림은 천명을 온전히 하는 것이다.”(孟子曰 盡其心者 知其性也. 知其性則知天矣. 存其心 養其性 所以事天也. 殀壽 不貳 脩身以俟之 所以立命也.)

 

엊그제 사랑하는 분이 떠나가셨다

가을바람 부는 쓸쓸한 언덕 너머로

먼 길 떠나신 그분은 어디쯤 가고 계실까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리라

나의 영혼은 어디로 갈까?

육체가 그러하듯 온 곳으로 되돌아간다면

그 길은 어디일까 생각해 본다

- 작품 본향 찾아가는 길중에서

 

이 작품의 맨 아래를 보면 빈소를 다녀오며라고 되어 있다. 가까이 지내던 분을 멀리 보내고 나면 쓸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누구나 다 가는 길이기에, 본향을 찾아간다고 노래했다. 고전 대학에는 이런 글귀가 있다.

 

시는 이른다. “아아, 떠난 임금을 잊지 못하네.” ‘베풂이 높은 사람은 그 어짊을 어질게 여기고 그 가까움을 가깝게 여기며, ‘마음이 작은 사람은 그 즐거움을 즐겁게 여기고 그 이로움을 이롭게 여긴다. 이 때문에 세상을 떠났는데도 잊지 못한다. (詩云 於戱() 前王不忘君子 賢其賢而親其親 小人 樂其樂而利其利. 此以沒世不忘也.)[대학장구 전3. 20.]

 

그 어짊을 어질게 여기고 그 가까움을 가깝게 여기는 것’! 그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나타낸 작품도 있다.

 

몽골에서

죽음은

자연으로부터 와서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

주검으로 넓은 바위에 누워

배고픈 새들을 기다리는 것

- 조장중에서

 

본향을 찾아가는 길은 바로 죽음을 가리키고, 그게 자연으로부터 와서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시신까지도 배고픈 새들에게 내주는 일이야말로 진정한 어짊이 아니겠는가. 또한, ‘새들도 어엿한 우리의 가까운 이웃이니 무엇을 아끼겠는가.

 

 

3. 나가며

 

가을에 숲이 아름다운 까닭은, 떠날 때가 가까워진 잎들이 착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를 가리켜서 유종(有終)의 미()’라고 하는 성싶다. 이는 한번 시작한 일을 끝까지 잘하여 끝맺음이 좋음을 일컫는 말이다. 그러니 시인은, ‘한번 시작한시작(詩作)을 마지막 그때까지 잘하여 끝맺음이 좋아야 한다. 이게 바로 천명(天命)이니 어쩔 수 없다.

그뿐만 아니라, 시인은 또한 선비이니 마지막 그 순간까지 수신’(修身)을 게으르게 하여서는 안 된다. 그리고 또 수신의 방편(方便)이 곧 시작(詩作)이기도 하다. 게다가 어짊에 머무르는 방법이 여기에 있고 베풂또한 여기 있으니, 시작(詩作)이야말로 일석사조’(一石四鳥)가 아니겠는가.

아름다운 단풍이 우리에게 전하는 말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본다. 착한 잎들이 마지막으로 전하는 말! 그것은 단음절로 ’()일 거라는 믿음이 있다. 공자가 제자 자공에게 일평생 가슴에 품고 살라고 이르신 단 한 글자’! 이 글자를 아주 쉽게 풀면,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렇다. 이렇듯 아끼는 마음이 시에 나타날 터이다. 이춘원 시인의 단풍처럼 눈부신 베풂을 기대해 마지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