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서 길을 밝히는 초롱꽃
김 재 황
산으로 올라가서 등불을 켜고
들로 내려와서 종을 울린다
눕고 일어나는 때를 알려
세상을 새로 태어나게 한다
어디에나 있는 문이
오늘은 땀 맺힌 초롱꽃에서 열린다
빛과 소리가 날개를 달고
천사처럼 사랑을 전한다
―졸시 ‘초롱꽃’
종지기 노인이 있었습니다. 젊었을 때, 그는 싸움터에 나갔다가 무릎을 다쳐서 돌아왔습니다. 그 후부터 줄곧 종을 지키며, 아침과 점심과 저녁으로 하루에 세 번, 그는 때를 맞춰서 종을 쳤습니다.
어찌나 그 시간이 정확했던지, 마을 사람들은 이 종소리에 따라 성문을 열고 닫았을 뿐만 아니라, 식사나 모든 일까지도 거기에 맞춰서 했습니다.
그 노인에게는 가족이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다만 이 종에게 그의 사랑을 몽땅 쏟았습니다.
“착하구나. 그래 더 크게 울어!”
그는 종을 칠 때마다, 아들이나 손자를 대하듯 중얼거렸습니다. 그에게는 이 종이야말로 그의 가족이요, 이 세상을 살아가는 유일한 위안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마을에 새로운 원님이 왔는데, 그는 종소리를 무척이나 싫어해서, 종치는 일을 그만두도록 명령했습니다. 종지기 노인은 슬펐습니다. 종을 치지 못한다면, 세상을 살 필요도 없다는 생각으로 높은 종각 위에서 몸을 던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가 죽은 자리에서 언제부터인가 풀이 돋아나서 꽃을 피웠습니다.
그래서 초롱꽃은 일명 ‘종꽃’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한여름, 줄기 끝에 서너 송이의 희거나 자줏빛 꽃이 종과 같은 모양으로 아래로 늘어져서 핍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바람이 불 적마다, ‘땡그렁 땡그렁’ 금방이라도 종소리를 낼 것만 같습니다.
나는 누른빛이 도는 흰 색 바탕에 안쪽으로 자주색의 반점들이 있는 초롱꽃을 좋아합니다. 순결성이 있지요. 종 모양의 꽃부리는 끝이 얕게 다섯 개로 갈라져 있고, 다섯 개의 꽃받침조각 사이에는 뒤로 젖혀진 부속체마저 있어서, 차마 손으로 만질 수 없는 두려움을 갖게 합니다. 수술은 다섯 개이고 암술은 한 개이며, 암술머리는 세 개로 갈라져 있습니다.
초롱꽃은 초롱꽃과에 달린 여러해살이풀입니다. 중부지방의 산기슭이나 풀밭에서 잘 자랍니다. 줄기는 곧게 서고 온 몸에 거친 털이 흩어져서 돋아나 있으며, 가지를 거의 치지 않습니다.
잎은 마디마다 서로 어긋맞게 납니다. 생김새는 달걀처럼 길둥근 모양으로 끝이 뾰족하고, 윗부분의 것은 자루가 없으며, 가장자리에는 고르지 않은 톱니가 보입니다. 열매는 삭과로 9월에 익지요.
초롱꽃은 ‘자반풍령초’(紫斑風鈴草), 또는 ‘풍령초’(風鈴草) 등으로 불리웁니다. 약효가 있어서 '천식' '경풍' '한열' '보폐' '편도선염' '인후염' 등의 약재로 쓰입니다. 꽃이 크고 많이 달리기 때문에 관상용으로 재배하기도 합니다.
초롱꽃과는 쌍떡잎식물 통꽃류에 딸린 한 과로, 전세계에 약 90속 1천5백여 종류가 있는데, 우리나라에는 ‘초롱꽃’을 비롯하여 ‘수염가래꽃’, ‘금강초롱’, ‘잔대’, ‘모시대’, ‘영아자’, ‘도라지’, ‘소경불암’, ‘더덕’, ‘숫잔대’, 등 45개 종류가 살고 있습니다.
초롱꽃의 꽃말은 ‘정의’ 또는 ‘소원’입니다.
다른 꽃들이 모두
하늘로 고개를 바짝 쳐들고
아침 햇볕을 받기 위해
세상을 제것으로 하기 위해 눈부시게
다투어 일어서
소리 지르는 시간
너는
땅으로 머리를 숙이고
흙을 숨쉬고 있느냐
모두가 제 주장으로 나서서
저마다 옳고
그렇게 각기 흩어져
이 어두운 분열의 땅에
너는 혼자
온 몸이 초롱등불 되어
여기 동해 바닷가
산자락 끝에 와 섰느냐
옛 사람인 듯
수수한 그러나 매우
수척한 너의 모습
눈물 맑은
네 영혼의 빛이 오늘 더 외롭고
아프게 눈부시다
이성선 시인의 ‘초롱꽃’이라는 시입니다. 동해 바닷가에 서 있는 초롱꽃을 보며 현실을 가슴 아파하는 시인의 마음이 곱게 담겨 있습니다.
한 나그네가 활을 메고 산길을 걷고 있을 때였습니다. 어디에선가 까치들의 울음소리가 자지러지게 들려 왔습니다.
나그네는 걸음을 멈추고 소리가 나는 쪽을 보니까, 높은 고목 위에서 커다란 구렁이 한 마리가 까치집 속에 웅크리고 숨어 있는 까치 새끼 세 마리를 막 잡아먹으려 하고 있었습니다.
“저런, 가엽기도 해라!”
나그네는, 약한 것을 도와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얼른 어깨의 활을 벗어들고 구렁이를 겨냥해서 시위를 당겼습니다. 바람을 가르며 날아간 화살은 보기 좋게 구렁이의 머리에 꽃혔습니다.
몇 달이 지난 후, 나그네는 그 길을 다시 가다가 산에서 날이 저물었습니다. 하룻밤 묵어갈 만한 곳이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피곤한 다리를 끌며 계속해서 부지런히 걷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했듯이, 숲 속 멀리에서 작은 불빛이 반짝이고 있는 게 아닙니까.
“이제는 살았구나!‘
나그네는, 기쁨이 넘쳐서, 뛸 듯이 불빛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다다라보니, 오래되기는 했으나 제법 큰집이었습니다. 나그네는 대문 앞에 서서 주인을 찾았습니다. 얼마 후, 문이 열리고 주인인 듯한 한 여인이 나타났는데, 소복을 하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는 나그네입니다. 하룻밤 묵어갔으면 합니다.”
나그네가 정중하게 부탁하자, 여인은 덤덤한 표정으로 대답했습니다.
“누추합니다만, 그렇게 하십시오.”
여인이 안내한 방으로 들어간 나그네는, 이 큰집에 여인 혼자만이 사는 게 이상한 느낌이 들었지만, 워낙 피곤하였으므로 자리에 눕자마자 그대로 깊은 잠에 곯아 떨어졌습니다.
나그네가 얼마를 잤을까요. 가슴이 답답하여 눈을 떴더니, 이게 웬일입니까. 커다란 구렁이 한 마리가 자기 몸을 친친 감고는 붉은 혀를 널름거리고 있었습니다. 나그네는 기겁을 하여 소리쳤습니다.
“으악, 사람 살려!”
구렁이가 날카롭게 말했습니다.
“네가 내 남편을 죽였으니, 원수를 갚아야겠다.”
나그네는 이제 꼼짝없이 목숨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바싹 정신을 가다듬고 구렁이에게 애원했습니다.
“제발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무슨 일이든 하겠습니다.”
그 말을 듣고 구렁이가 말했습니다
“저 산 위의 종이 오늘밤 안으로 세 번만 울게 한다면, 죽은 남편의 영혼이 좋은 곳으로 갈 수 있지. 어떤가?”
불가능했습니다. 이제 얼마 안 있어 동이 틀 것이니 더욱 그렇지요, 그런데 그 때였습니다. 신기하게도 종이 세 번 울었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구렁이는 슬며시 사라졌습니다.
날이 밝자, 나그네는 종이 있는 곳으로 찾아갔습니다. 거기에는 세 마리의 까치가 죽어 있었습니다. 나그네와 까치는 ‘참사랑’을 실천했습니다. 죽은 까치들은, 아마도 초롱꽃으로 다시 피어났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