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꽃

들꽃5

시조시인 2005. 9. 25. 23:01

 


                     꿈속의 소녀를 그리는 참억새


                                         김 재 황


 

‘억새’라는 이름의 머슴이 있었습니다. 그의 주인은 인색하기로 소문이 난 선비였는데, 어느 날, ‘억새’를 데리고 먼 여행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길을 가다가 길거리에서 팥죽을 팔고 있는 여인을 만났습니다. 두 사람 모두, 점심때가 훨씬 지났으므로, 배가 몹시 고팠던 차에 김이 무럭무럭 나는 팥죽을 보니 군침이 입안에 가득해졌습니다. 하지만 선비는 체면 때문에 참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짐짓 큰기침을 한 번 하고는 지나쳐 갔습니다. 얼마를 갔을까요. 배에서 쪼르륵 소리가 났습니다. 수염이 석 자라도 먹어야 양반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선비는 참다못해 ‘억새’를 불렀습니다.

“억새야, 팥죽 한 사발만 사오너라.“

‘억새’는, 아무리 인색하기로 팥죽 한 그릇이 뭐냐고, 투덜거렸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억새’가 팥죽을 사 들고 오는 걸 보니까, 아, 글쎄 팥죽을 담은 그릇이 다름 아닌 요강이었습니다. 아무리 시장하다고 해도 선비가 요강 속에 든 음식을 먹을 수야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 놈! 너나 먹어라.”

‘억새’는 게 눈 감추듯 팥죽을 맛있게 먹어치웠습니다. 그리고 다시 얼마를 가다 보니까, 이번에는 길거리에서 생(生)굴을 파는 아주머니가 있었습니다. 선비는 침이 목구멍을 넘어갔지만, 역시 체면을 생각해서 얼굴을 돌리고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그렇지만 얼마를 가지 못하고, 또 ‘억새’를 불렀습니다.

“억새야, 굴 한 그릇만 사 오너라.”

이번에는 요강이 아닌 대접에 담아 올 것도 단단히 일렀습니다. ‘억새’는 한 그릇이라는 말에 또 심술이 났습니다. 한참 후에 ‘억새’가 오는 것을 보니까, 대접에 담긴 했는데, 이번에는 젓가락으로 생굴을 휘휘 저으면서 왔습니다.

선비가 물었습니다.

“왜 그리 휘젓는 게냐?”

‘억새’가 대답했습니다.

“잘못해서 제 콧물이 떨어졌는데, 어디 있는지 찾을 수가 없습니다요.”

선비는 입맛을 싹 잃었습니다.

“예끼 이 놈, 그것도 너나 먹어라.”


나는 산이나 들에서 줄기 끝에 술을 내어 흔들고 있는 참억새를 만나면, ‘억새’라는 머슴의 이 이야기가 생각나서 슬며시 나 혼자 미소를 짓곤 합니다. 참으로, 참억새도 ‘억새’를 닮아서 잎 가장자리에 잘고도 날카로운 톱니가 생겨 있으므로, 자칫 잘못 다루었다가는 손가락을 베이기 십상입니다.

참억새는 포아풀과에 딸린 여러해살이 풀입니다. 줄기는 2m 정도이며, 잎이 빳빳해서 척 보아서도 고분고분하지 않을 성싶은 모습을 보입니다. 가을에 이삭이 패면, 그 이삭의 빛깔이 자줏빛을 띤 갈색에서 은백색으로 변합니다.

참억새는 생약명으로 ‘망경’(芒莖) ‘파모’(笆茅) ‘파망’(笆芒) ‘두영’(杜榮)이라고 부르며, 뿌리와 줄기를 약재로 쓰는데, 이뇨와 진해 및 해독 등의 효능이 있어서 오줌이 잘 나오지 않는 중세를 비롯해서 심한 기침과 대하증의 치료에 쓰입니다.

참억새와 같은 종류로는 물억새가 있습니다.  참억새와는 달리, 물억새는 습지에서 무리를 지어 살며, 근경은 땅속을 기고, 키는 2m나 됩니다. 둘의 모습이 아주 비슷하지만, 잔이삭에 까끄라기가 없는 것이 참억새와 구별됩니다.


몇 해 전, 내가 제주도에서 살 때의 일입니다. 하루는 한라산을 오르다가 참억새 풀숲이 있기에 쉬려고 다가가려니까, 갑자기 한두 발짝 앞에서 꿩 한 마리가 날개가 부러진 듯 푸드덕거리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깜짝 놀라 보니, 몸집이 작은 까투리였습니다. 왜 저럴까 하고, 내가 가까이 가려고 하자, 까투리는 조금 멀리 자리를 옮겨서 똑같은 행동을 했습니다. 그 때에서야 나는 눈치를 챘습니다. 그 근처에 까투리가 알을 품고 있던  둥우리가 있는 게 분명했습니다.

나는 얼른 모르는 체하고 그 곳에서 발걸음을 돌려 나왔지만, 지금도 가끔 그 기억을 떠올리면 까투리의 그 지극한 모성애에 콧등이 시큰해져 옵니다.


높아진 하늘의 알몸이

내뻗은 손가락 끝에

수줍고 간지러우니


못내 터뜨린 달의 웃음은

은빛으로 쏟아져 내려

가난한 영혼 적시네


먼 추억을 향해 흔드는 손짓에

세일러 복(服)의 소녀가

꿈속에서 걸어오느니.

          ―졸시 ‘참억새’


얼마 전에는 광릉수목원엘 갔다가 참억새를 만났습니다. 그 꼿꼿한 줄기와 활기찬 잎사귀가 참으로 멋집니다. 참억새는 언제 어디에서 만나도 죽마지우를 해후하는 기쁨이 있어서 좋습니다.

나는 모처럼 참억새를 붙들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운 한 때를 보냈는데, 그 날에는 더욱 잎의 중앙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는 희디흰 맥이, 먼 옛날 어렸을 적에 만났던 세일러 복(服)의 소녀를 생각나게 했습니다. 그녀도 지금쯤은 아이들을 둔 어머니가 되어서 그 까투리처럼 뜨거운 모정을 가슴에 품고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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