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꽃

들꽃7

시조시인 2005. 9. 27. 23:53

 

 

 

                       끈질긴 삶을 사는 질경이


김 재 황


 

고등학교 시절의 일이었습니다. 키도 작고 몸집도 작을 뿐만 아니라, 아주 약골로 보이는 '훈이'라는 같은 반 친구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점심시간이었다고 기억되는데, 우리 반에서 가장 덩치가 크고 주먹도 가장 세어서 ‘곰’이라는 별명을 가진 녀석이 같은 반의 친구 하나를 괴롭히고 있었지요. 그러나 모두들 보고만 있을 뿐이지, 감히 누구 하나 정의롭게 나서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였지요. 누군가가 버력 고함을 질렀습니다.

“이봐, 점잖게 있을 수 없겠어?”

모든 아이들의 시선이 소리 난 방향을 향해 일시에 쏠렸습니다. ‘훈이’였습니다. ‘곰’을 노려보고 있었지요.

‘곰’이 마주 소리쳤습니다.

“어떤 놈이야!”

‘훈이’는 말없이 ‘곰’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갔습니다.

“방과 후에 밖에서 만나자.”

그의 당당한 모습에 우리는 마음속으로 박수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방과 후의 결과는 너무나 비참했습니다. ‘훈이’는 코피가 터지고 눈두덩이에는 퍼런 멍이 들었습니다. 게다가 얼굴이 부어서 차마 눈뜨고 바로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훈이’는 기가 죽지 않았습니다.

며칠이 지나서 상처가 거의 아물어 가자, ‘훈이’는 또 ‘곰’에게 결투 신청을 했습니다. 역시 결과는 전과 같았지만, 여전히 ‘훈이’는 굴하지 않았습니다. 며칠이 지난 후에 다시 결투가 있었고, 그 결과도 전과 마찬가지였지요. 그러나 어쩐 일인지, 그 때부터 오히려 ‘곰’이 차츰 기가 꺾이는 눈치였습니다. 이렇게 결투의 횟수가 거듭되자, 마침내 ‘곰’이 항복의 백기를 높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훈이’는 우리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나는 산이나 들의 길을 가다가 단단한 땅에 뿌리를 박고 있는 질경이를 만나게 되면, 불현듯 고등학교 때의 ‘훈이’를 떠올리게 됩니다. 이 질경이야말로 밟히고 또 밟혀도 조금도 굴복하지 않고 다시 힘차게 일어나는 끈질긴 삶을 보여 줍니다.

질경이는 우리 민족을 닮았습니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여러 나라 사이에 끼여 있는 우리 나라는 전쟁의 말발굽에 질경이처럼 수없이 밟혀야만 했지요.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고난을 꿋꿋이 견뎌 내고, 지금 이렇게 힘찬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질경이는 질경이과에 딸린 여러해살이풀입니다. 우리 나라의 들이나 길가에서 흔히 볼 수 있지요. 잎은 길둥근 모습인데, 뿌리에서 뭉쳐 나고 비스듬히 누운 채로 서로 얼싸안습니다. 잎줄기가 깁니다. 세로로 평평하게 예닐곱 개의 잎맥이 마치 주름살처럼 파였고, 잎가장자리는 물결 모양입니다.

꽃은 여름에 잎 사이로부터 긴 꽃줄기가 나와서 그 끝에 이삭을 닮은 흰 꽃을 보입니다. 꽃부리는 깔대기 모양을 하고 있으며 4개로 갈라져 있고, 꽃받침 또한 4개로 갈라지지요. 수술은 4개이고, 암술은 1개인데, 화관보다 암술이 길게 밖으로 뻗어납니다. 열매는 삭과로서 그 종자는 흑갈색이며, 젖으면 점액을 분비합니다.

질경이나 민들레처럼 뿌리에서 나오는 잎을 지닌 식물을, 학술적으로 로제트 식물이라고 부릅니다. 로제트(rosette)는 원래 장미(rose)에서 유래된 말로, 즉 장미 모양의 무늬를 의미하지요. 근출엽(根出葉)을 달고 있는 모습을 위에서 내려다보면 흡사 장미 형상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로제트 식물은 꽃줄기를 낼 때 외에는, 결코 땅 위로 줄기를 내지 않는 특성이 있습니다.

로제트 식물의 세계적인 분포를 보면, 온대부터 한대까지 생육하고 있으며, 고산대에도 많이 살고 있습니다. 건조지에 살고 있는 로제트 식물은 햇볕이 잘 드는 초원(草原)이나 습원(濕原) 또는 황원(荒原)같은 데 많고, 산림 속에는 적게 살고 있습니다.

로제트 식물은 보통 밝고 트인 장소를 좋아하지요. 밝고 트인 장소는 자연적으로 건조지의 초원이나 한냉한 '툰드라' '습원' '고산대' 등의 자갈밭 같은 곳이 있으며, 가축을 기르는 초지나 골프장 및 도로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특히 질경이는 몸이 땅에 찰싹 들러붙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쩌다가 그 일대에 불이 난다고 하여도, 땅거죽 가까운 자리는 그리 온도가 높아지지 않기 때문에, 지경이는 훌륭히 살아 남을 수 있지요.

이러한 끈질긴 삶으로 해서 많은 시인들이 질경이를 노래했습니다. 그 중 몇 편을 소개해 볼까요?


흙을, 사는 땅을, 지구를

거꾸로 떠받치고 있는

잎 속의 뿌리

움켜쥔 손가락뼈 벌린

질경이풀 한 포기의 힘

밟히면서 키우고 있다.

어디서나

―유경환 시인의 ‘질경이풀’ 중 제2연


한결같이 끈질긴 인고(忍苦)를 짓씹으며

먼 지심(地心)의 목이 멘 가만한 울림으로

천의(天意)를 따라가는

마음씨들

―이서인 시인의 ‘질경이꽃’ 중 제4연


행길가

아무데나 자리잡은 질경이

예나 지금이나

풋내나 피우면서 근근히 살아가는 질경이

누가 뭐래도

얼굴 하나 붉히지 않는 질경이

밟히고 밟혀도 죽지 않고

고개 쳐들고 살아가는 질경이

―한병호 시인의 ‘질경이’ 전문


앞에 소개한 시(詩)들 중에서 ‘움켜쥔 손가락뼈’라든지 ‘천의를 따라가는 마음씨’, 또는 ‘아무데나 자리를 잡았다’는 이야기가 질경이의 이미지를 잘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 아픔이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우리의 또 다른 얼굴이 바로 질경이이기 때문이지요. 또 하나, 소개하고 싶은 작품이 있습니다.


밟혀도 짓밟혀도

지천으로 널린 목숨

오욕이 끝난 자리

숨죽이며 참았다가

오연히 눈 틔운 잎맥

웃음으로 뒤채는가.


척박한 불모의 땅

뿌리를 곧추 세워

내 터전 내 하늘만을

끈질기게 지키더니

삼동(三冬)의 긴 몸살 끝에

불 댕기는 생(生)과의 언약.


홍오선 시인의 ‘질경이’라는 시입니다. 이 작품에서는 ‘오연히’라는 단어가 강조의 의미를 지닙니다. ‘오연하다’의 뜻은 ‘오만스럽다, 거만한 듯하다’이지요. 그 하나가, 밟히면서도 숨죽이며 척박한 불모의 땅을 지키는 질경이의 뜨거운 삶을 잘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수없이 밟히면서도

질기게 살아 남은 목숨


풍상을 새기듯

내미는 이마마다

깊이 팬 주름살


땀 흘려

일하는 즐거움으로


그저 묵묵히

더위를 머리에 이고

하늘에 입맞춤을 보낸다

          ―졸시 ‘질경이’


질경이과는 꽃식물 쌍덕잎식물문(門)과에 딸린 한 과로서, 온 세계에 3속 200여 종이 살고 있는데, 우리 나라에는 '갯질경이' '긴잎질경이' '왕질경이' 등으로 1속 10여 종이 분포되어 있을 뿐입니다.

질경이는 ‘부이’(不苡) ‘차피초’(車皮草) ‘야지채’(野地菜) ‘차화’(車花) ‘우모채’(牛母菜) 등의 이름이 있으며, 길에서 잘 자란다고 하여 ‘길짱귀’ ‘길장구’ 등의 이름을 얻었는가 하면, 잎사귀의 생김새가 개구리의 배와 흡사하여 ‘배부쟁이’ ‘배짜개’ 등의 이름이 생겼고, 개구리가 기절하였을 때 덮어 놓으면 다시 살아난다고 하여 ‘배합조개’ ‘뱀조개’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한방에서는 질경이의 풀 전체를 ‘차전초’(車前草)라고 부르는데, 이는 질경이가 마차바퀴 자국이 난 자리에서도 잘 자라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또한, 생약명으로 질경이의 씨를 ‘차전자’(車前子)라고 하였으며, 그 잎은 ‘차전’(車前)이라고 합니다.

‘차전자’는 완화작용(緩和作用)과 항지간작용(抗脂肝作用)을 하는 성분이 들어 있기에, 만성간염(慢性肝炎)과 동맥경화증(動脈硬化症) 등에 효과가 있을 뿐만 아니라, '방광염' '요도염' '임질' '설사' '기침' 등에 치료약으로 쓰인다고 하지요.

허준이 쓴 ‘동의보감’에서는 간장편에 ‘차전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차전자는 간을 튼튼하게 하며 가루로 만들어 복용하여도 좋고, 볶아서 달여 마셔도 좋다.’ ‘차전’은 오줌이 잘 나오지 않는 증세를 비롯하여 '감기' '기침' '기관지염' '인후염' '황달' 등에 유효하다고 전합니다.

그래서 질경이의 잎과 씨를 말려서 차(茶)로 만들어 마시기도 하는데, 기침을 멈추게 하고 소화액 분비를 촉진시켜 주는 효능이 있습니다.


아주 오래된 옛날 옛적 이야기입니다. 중국에서 아주 의술이 뛰어난 의원 하나가 우리나라로 온다는 소문이 쫙 퍼졌습니다. 이 소문을 들은 길목의 마을 사람들은, 이제나 오나 저제나 오나 하고, 매일같이 길로 나가서 목을 빼고는 그 의원을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의원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오늘은 어디에서 머물렀으며, 또 몇 사람의 앓는 목숨을 살려 냈다는 소문만 바람결에 들려 올 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마을 사람들이 아침에 눈을 떠보니, 기막힌 이야기가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온 마을 사람들이 목이 마르게 기다리던 바로 그 의원이, 글쎄 간밤에 그 마을을 그냥 지나쳐 버리고 말았다지 뭡니까?

마을 사람들의 실망이야 말할 수 없이 컸겠지요. 그들 중에 몇 사람은 의원을 뒤쫓아가 보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가 닿는 마을의 사람들 역시, 그 위원이 그 동네를 그냥 지나쳤다는 소문만 들었을 뿐, 그 의원의 얼굴은커녕 그림자도 보지 못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희한한 일입니다. 그 의원이 타고 지나간 수레바퀴 자국에 이상한 풀이 돋았는데, 그 풀만 먹으면 모든 병이 깨끗이 낫는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병이 있는 사람은 모두 달려갔지요. 그리고는 그 풀을 따서 달여 먹었더니, 과연 신기하게도 모든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고 합니다. 그 풀이 바로 질경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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