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리 꼬부라진 할미꽃
김 재 황
올 봄에도 할머니 무덤 가에
힘드신 숨결이 돋아났구나
나를 등에 업어서 키우시느라
굽으신 허리 여전히 지니셨구나
할머니는 지금도
응석둥이 나를 못 잊으시는가
이 봄내 온 산자락 다 밟으시며
내 이름 크게 불러, 날 찾으시는가
아, 그 흰 머리카락에
나는 공연히 눈이 매워라
―졸시 ‘할미꽃’
할미꽃은 볕이 잘 드는 들이나 산기슭에 자생하는 미나리아제비과에 딸린 여러해살이풀입니다. 뿌리는 굵고 진한 갈색이며, 줄기 전체에 가늘고 흰 털이 가득 나 있습니다. 근출엽은 긴 잎자루가 있고 뿌리에서 뭉쳐납니다. 깃꼴겹입으로 소엽은 이삼 개로 갈라집니다.
4월경에 포엽 중심으로부터 한 개의 꽃자루가 나와서 3cm 가량의 종처럼 생긴 꽃이 줄기 끝에서 밑을 향해 핍니다. 꽃빛은 암흑자색이고 꽃받침조각은 여섯 개며, 바깥쪽에는 긴 흰털이 밀생하고 수술과 암술은 여러 개입니다. 꽃밥은 노란색이지요. 씨방이나 긴 암술대에 털이 밀생합니다.
열매는 긴 달걀 모양으로 꽃자루 끝에 여러 개가 모여서 맺고, 긴 털이 40mm 정도 자라는데, 깃 모양으로 퍼져서 바람에 잘 날립니다.
들이나 산에서 할미꽃을 만나면, 우선 몸 전체에 나 있는 흰털로 인해 백발을 연상하게 됩니다. 게다가 허리가 굽어 있어서 꼬부랑 할머니를 생각하게 됩니다.
어릴 적, 산과 들에서 뛰어놀 때, 이른 봄 마른 풀 사이에 일찌감치 얼굴을 내밀고 있는 할미꽃을 발견하면 할머니를 만난 것처럼 반가웠지요. 할미꽃은 할머니처럼 어린이들에게 더없이 부드럽고 인자한 정감을 줍니다.
뒷동산에 할미꽃, 호호백발 할미꽃
젊어서도 할미꽃, 늙어서도 할미꽃
하하하하 우습다. 꼬부라진 할미꽃
우리들은 아지랑이 깔린 들판을 이 동요를 부르며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그 생김새와는 다르게 큰 암흑자색의 꽃을 정열적으로 피워 내고 있는 할미꽃을 만나면 신기한 마음에 우르르 달려가서 바라보곤 했습니다.
할미꽃을 오래 관찰하여 보면, 처음으로 꽃 필 때에 있던 흰털이 점차 벗겨져서 푸른 몸으로 되어 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할미꽃은 젊어지는 꽃이지요.
할미꽃을 중국에서는 백두옹(白頭翁)이라고 합니다. 겉이 뿌옇고 속이 자색인 화판이 늦은 봄이 되어 떨어지면 기다란 꽃술만이 남게 되는데, 머리 위에 희게 늘어진 그 모양이 흡사 흩날리는 노인의 머리칼과 같아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당나라(唐代)의 이백(李白)이 백두옹을 노래한 시(詩)가 있습니다.
마을길로 취해 들다 들판에서 노래하네
여기저기 푸른 들에 어쩌다 할미꽃을
거울 앞에 꺾어 오니 흰 터럭이 완연코나
적은 꽃을 비웃는 듯 봄바람에 한을 품네.
강희안(姜希顔)의 ‘양화소록’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화왕편(花王編)에 설총이 신문왕(神文王)을 위해서 풍유로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내용을 간추려 보면, 『목단이 화왕(花王)이 되며 장미는 가인(佳人)이 되고 백두옹은 장부(丈夫)가 되었다. 장미는 아양을 부려 임금을 유혹하고 백두옹은 바른 말로 임금에게 충간하였는데, 화왕이 가인에게 반하여 장부의 말을 잘 듣지 아니하므로 장부가 말하기를 ‘나는 본래 임금이 총명하고 의리를 안다 하기로 해서 왔더니 아니로군.’하며 명현의 불우한 것을 탄식하자 화왕이 깨닫고 사과하였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대로 백두옹은 비록 허리가 굽고 머리는 백발이지만 가슴에 감추고 있는 기개가 있어서 장부로 비유될 만한 멋진 들꽃입니다.
할미꽃은 백두옹 외에도 ‘할무대’ 또는 ‘노고초’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모두 늙었다는 의미를 담고 있지요.
옛날 어느 깊고 깊은 산마을에 두 손녀를 키우고 있는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두 손녀는 친자매이었지만, 생김새나 성격이 서로 달랐습니다. 즉, 언니는 얼굴이 예뻤으나 마음씨가 고약했고, 동생은 마음씨가 착했으나 얼굴이 못생겼습니다.
어느 덧 세월이 흘러서 두 손녀는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얼굴이 예쁜 언니는 가까운 부잣집으로 시집을 가게 되었고, 얼굴이 못생긴 동생은 멀고 먼 마을의 가난한 집으로 시집을 가게 되었습니다.
마음 착한 동생은, 늙으신 할머니를 생각해서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를 않았습니다. 멀고 가난한 시집이지만, 할머니를 모시어 가고 싶었지요.
그러나 체면을 생각한 언니가 할머니를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언니는, 체면 때문에 할머니를 자기가 모시겠노라고 하였지만, 얼마쯤 지나자 차츰 귀찮아져서 외면했기 때문에 할머니는 굶는 날이 많아졌습니다.
“작은 손녀나 찾아가야지.”
할머니는 굶다 못해 작은 손녀를 찾아가기 위해 길을 떠났습니다. 할머니는 얼마 걷지 않아서 기진맥진하게 되었지요. 그래도 할머니는 있는 힘을 다해서 비틀거리며 걸었습니다. 마침내 산언덕을 올라가니 멀리 작은 손녀의 시댁이 보였습니다. 하지만 할머니는 너무 지친 나머지 그 자리에 쓰러져서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작은 손녀는, 달려와서 할머니의 시신을 부둥켜안고 통곡하였지요. 작은 손녀는 양지 바른 자리에 할머니를 고이고이 모셨습니다. 이듬해 봄, 이 무덤가에 허리를 구부린 꽃이 하나 피어났는데, 이 꽃이 바로 할미꽃입니다.
할미꽃은 꽃이 진 뒤에도 꽃자루가 자라서 길고. 흰 털이 많이 나며, 긴 달걀 모양의 수과(廋果)도 많이 지니지요.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산등성이에 피어 있는 모습이 애처롭기만 합니다. 나는 해마다 나이를 먹어 가지만, 할머니의 추억은 이 할미꽃으로 해서 더욱 젊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할미꽃의 꽃말은 ‘슬픔’ 또는 ‘추억’입니다.
지금, 비가오는 창 밖을 바라보고 있자니, 산에서 허리 굽히고 있을 할미꽃도 비에 젖고 있으리라는 생각에 더욱 울적한 마음이 됩니다. 나는 슬픔을 털어 버리려고 동요를 흥얼거려 봅니다.
앞동산에 할미꽃, 솜털 돋은 할미꽃
싹 날 때에 늙었나, 흰 수염 난 할미꽃
하하하하 우습다. 수줍은 듯 할미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