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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시인 2005. 9. 22. 14:54
 

                                                       하동 방문기

                                 



                                                              김 재 황



  전화를 받았다. 문인산악회 총무였다. 박경리 선생의 토지문학제에 초청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 순간, 토지문학관 관장의 일을 맡아보았던, 나의 벗 이성선 시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토지문학제’라면 마땅히 원주의 토지문학관에서 실시되리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가 토지문학관 관장의 일을 하게 되었을 때, 그는 나에게 그 곳으로 꼭 한 번은 초청하겠다고 했다. 물론, 나도 찾아가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2001년 5월 7일 낮에, 나는 그의 부음을 들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눈앞이 캄캄해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밤 10시가 지난 시각에 나에게 불쑥 전화를 걸고는 “요즘 작품 많이 써?”하고 묻던 그였다. 그는 떠났지만, 이 기회에 나는 그가 초청하겠다고 약속했던 토지문학관을 가 보고 싶었다.

  2001년 11월 10일 아침 9시, 약속한 서초구민회관 앞으로 갔다. 버스는 대기되어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나와 있었다. 버스가 출발하여 한참을 달리고 난 후에야, 비로소 나는 그날의 토지문학제 개최지가 소설 ‘토지’의 무대인 하동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조금은 실망을 하였다. 그러나 나로서는 하동이 초행이었고, 행사가 열리는 장소가 평사리의 최 참판 댁이라는 말에 그 또한 방문의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오후 5시 경이 되어서야 행사장에 도착했다. 그날은 토지문학제의 전야 공연이 있었다. 불현듯, 무대 앞쪽의 어느 좌석에 이성선 형이 앉아 있을 것만 같은 생각에, 나는 나도 모르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 곳에는 박경리 선생도 있었고, 드라마 ‘토지’에서 서희 역을 맡았던 아역 배우도 앉아 있었다.    

  우리 일행은 공연을 어느 정도 관람한 후에 숙소인 청학동으로 향했다. 한밤중에야 그 곳에 닿았다. 우리는 차를 내려서 캄캄한 밤길을 더듬으며 걸었다. 그 때, 누군가가 말했다.

  “저 하늘의 별이 어쩌면 저리도 크지?”

  나는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들이 고운 눈을 반짝이며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별을 무척이나 사랑한 이성선 시인. 그는, ‘아름다운 사람들은 모두 가서 하늘에 별이 되어 묻혔는데, 외로운 시를 쓰고 나서 다시 풀밭에 나가 별을 쳐다본다’.고 하지 않았던가. 나는, 이성선 시인이야말로 저 하늘로 가서 별이 되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그 반짝이는 별들 중에 하나는 바로 그 친구이며, 그는 지금 나를 내려다보며 빙그레 미소를 머금고 있을 것이라는 느낌도 들었다.

  방을 배정 받고 잠자리에 들었지만, 나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 때를 놓치지 않고 이성선 시인에 대한 그리움이 밀물처럼 몰려들었다. 이성선 시인과 나는 고려대학교 농학과 동기동창 관계이다. 대학 시절에 그와는 ‘동인 아닌 동인 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가 재학 중 학도병으로 입대를 하는 바람에, 우리는 오래 연락이 끊기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늘 그의 모습을 가슴에 지니고 살았다.

  1970년, 그가 시인으로 등단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 후, 내가 문단에 발을 들여놓게 됨으로써 비교적 자주 소식을 주고받았다. 일이 있어서 그가 상경을 했을 때마다 그는 반드시 연락을 주었고, 우리는 봉천 전철역 부근의 찻집에서 녹차를 들며 문학 이야기를 꽃피웠다.

  한 번은 그 곳에서 그와 자리를 함께 했는데, 그는 토지문학관에서 민통선에 대한 주제 발표회를 계흭하고 있다면서 의견을 달라고 했다. 나는 몇 가지를 제시했고, 행사가 열리게 되면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고 말했다.

  청학동의 긴 밤도 지나서 마침내 아침이 되었다. 밖으로 나서니, 먼동이 맑게 열리고 있었다. 아침 햇살이 산자락을 더듬자, 산의 단풍 든 숲이 현란한 빛깔로 웃었다. 아직까지 나는 그토록 자극적인 산의 자태를 보지 못했다. 그뿐만 아니라, 멀리에 큰 감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는데, 그 벗은 가지에 가득 매달린 홍시가 햇살을 받고 환한 등불을 켠 모습은 더욱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게 했다.

  문득, 이성선 시인의 ‘감나무’라는 작품이 떠오른다. 그는 그 작품에서 ‘감나무는 영혼의 나무, 겨울로 가는 길목에 문이 되어 섰다. 깊은 곳에서 허심으로 하늘을 받들고 지상 비치고 하늘을 빛낸다’.고 노래했다. 마치 그 자리에 그가 서서 그 감나무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에게 소곤거리고 있는 듯한 착각에 나는 잠시 빠졌다.

  그 날은 평사리에서 본행사가 열린다고 했다. 갈 길이 바쁘니 그냥 서울로 출발하자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그래도 박경리 선생에게 인사를 하고 떠나는 게 도리라고 의견이 모아졌다. 버스에서 내려서 행사장까지는 대략으로 십 분 정도가 소요되는데, 선배 문인들이 대표로 가면 되겠기에, 몇 사람은 뒤로 빠져서 평사리 마을을 둘러보기로 했다.

  한 농가를 기웃해 보니, 마당에 멍석을 깔아놓고 추수한 곡식을 널어서 말리고 있었다. 그 집 울타리 옆에는 커다란 감나무가 하나 서 있었고, 그 높은 가지 끝에는 열 개 남짓한 홍시를 남겨 놓고 있었다.

  마침, 그 집 주인이 마당에서 일을 하고 있었으므로, 우리는 다가가서 인사를 했다. 주인이 하던 일을 멈추고 일어서서 우리에게 답례를 했다. 그 때, 나는 깜짝 놀랐다. 어쩌면 그렇게도 닮을 수가 있단 말인가. 그 자그마한 체구며, 그 순박한 얼굴이며, 그리고 잔잔한 미소까지, 그 농부는 이성선 형의 이미지를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나는 물었다.

  “저 감나무에 까치밥을 저리 많이 남기신 것입니까?”

  그 주인이 대답했다.

  “손이 안 닿아서 못 딴 것인데, 따서 맛을 좀 보시지요.”

  그 분은 부리나케 뒤꼍으로 가서, 끝에 자루가 달린 장대를 가져다가 우리 앞에 내밀었다. 우리는 고마운 마음으로 그 중 3개를 따서 한 개씩 나누어 먹었다. 이성선 시인과 닮은 분에게 얻어먹는 과일이라 그런지, 보통의 그런 감맛이 아니었다.

  2001년 5월 4일, 이성선 시인은 다른 세상으로 떠났다. 그의 뼛가루는 백담사를 안고 흐르는 개울의 첫 번째 담(潭)에 뿌려졌다. 그의 49제가 있던 날, 나는 그 곳으로 가서 그 물에 그리움을 씻고 돌아왔다.

  전에, 속초에 있는 그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2층에 있는 그의 서재에서는 설악산이 한눈에 들어왔다. 내가 “설악산을 안고 사니, 얼마나 좋으냐”고 말  하자, 그는 그저 함박꽃처럼 웃기만 했다.        

  하동은 아름다운 고장이다. 서쪽으로 섬진강이 흐르고, 지리산 산자락을 깔고앉았다. 이성선 시인이 토지문학관의 일로 하동의 평사리를 들렀는지는 알 수 없다. 아무튼 그가 토지문학관 관장의 일을 맡았던 연유로, 나는 그 곳까지 가게 되고, 그 곳에서 그에 대한 그리움을 되새기게 되었다. 이는, 내가 이번에 하동을 방문한 가장 큰 의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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