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대리 방문기
이성선 시비 제막식
김 재 황
2002년 5월 3일, 오늘은 이성선 시인의 시비 제막식이 거행되는 날이다. 장소는,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성대리 256 번지, 바로 이성선 시인의 생가가 있는 마을이다. 아침 7시에 강변역 앞에서 문우들이 이미 만나기로 했고, 시비건립추진위원회에서 버스도 준비해 놓았다. 지난 저녁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아침이 되어도 그치지 않았으나, 약속시간이 가까워 오자, 여러 문우들이 모여들었다. 버스는 7시 20분이 조금 지나서 출발하였다.
나의 벗 이성선 시인이 이 세상을 떠난 지도 벌쩌 일년이 되었다. 그와 나는 고려대학교 농학과 동기동창이다. 학창 시절, 우리는 ‘동인 아닌 동인’ 생활을 했다. 그러나 이성선 형과 함께 하였던 기간은 그리 길지 못하였다. 대학에 입학하고 난 이듬해인 1962년 5월, 그가 훌쩍 학도병으로 입대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 후, 이성선 시인과는 오래 소식이 끊기기도 했지만, 내가 문단에 발을 들여놓게 됨으로써 다시 연락을 주고받았다. 타계하기 며칠 전에도, 밤 10시가 지난 시각에 나에게 전화를 불쑥 걸고는 “요즘 작품 많이 써?”하고 물었다.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겼다가 밖을 보니, 구불구불 내린천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문득 이성선 형의 작품 ‘물길’이 떠오른다. ‘물에는 별과 나무와 구름과 사람의 그림자. 우리 모두는 물길에 실려 그런 속삭임으로 흐른다. 흐르며 은밀히 서로를 숨쉬고 눈짓하고 지절거린다.’
내린천 최상류는 오대산 북대골이다. 그 곳만 하더라도, 열목어와 금강모치 등을 비교적 쉽사리 만날 수 있다. 이들은 냉수성 어종인데, 특히 열목어는 수온 18℃ 이하의 찬물에서만 살 수 있다. 내린천 하류에서는 눈동자개와 동사리 등을 볼 수 있다. 이들은 이미 한강에서는 사라진 지가 오래다. 또 중류로 올라가서 인제군 상암면 하남리에 이르면, '누치' '쉬리' '모래무지' '쏘가리' '묵납자루' '갈겨니' 등을 어렵사리 만날 수 있다. 이들은 물의 오염에 견디기 힘든 어종들이다. 그러니 내린천은 그 자연이 살아 있는 지역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성선 시인 역시, 얼마나 맑은 물을 갈망했던가.
어느덧 차는 목적지에 닿았다. 차에서 내리니, 멀찍이에서 신선봉(神仙峰)이 우리를 반겼다. 신선봉은 설악산 북쪽에 위치해 있으며, 금강산의 가장 남쪽 봉우리에 해당된다. 신선봉 아래의 아담한 마을. 이 마을에서 이성선 시인이 태어나고, 또 멀리 떨어져 있는 초등학교를 비롯해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친구가 없어 혼자 다녔구나 하는 생각에 콧등이 시큰해졌다. 물론, 이성선 시인이 이 마을에서 중학교를 다닐 때만 하더라도, 그의 이름은 이진우(李珍雨)였다. 그 다음에 수복지구 호적복원에 따라 이성선(李聖善)으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
시비가 세워져 있는 곳으로 가는 도중, 나는 붉은 꽃을 피우고 있는 ‘해당화’를 만났다. 아, 이성선 시인이 ‘바다에 발가벗고 벌거숭이 해를 껴안아 아파요 아파’라고 노래했던 바로 그 해당화가 웃고 있었다. 해당화는 바닷가 모래밭에 뿌리를 박고 서 있기에,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 애틋함이 있다. 또한, 강변에 살고, 작약처럼 큰 꽃과 살구 같은 열매를 지니며 향기도 아름답다. ‘나는 어둠이야, 너도 어둠이야’라는 그의 시구(詩句)에서 아직 잠이 덜 깬 ‘해당수미족’(海棠睡未足)의 미를 더듬어 볼 수도 있다.
그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아늑한 자리에, 흰 보를 쓴 채로, 수줍은 신부처럼 시비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자리를 잡고, 제막식은 시작되었다. 마침내 흰 보가 벗겨지는 그 순간, 이성선 시인의 주옥 같은 시 한 편이 얼굴을 내밀었다. 작품 ‘미시령 노을’이었다.
‘나뭇잎 하나가// 아무 기척도 없이 어깨에/ 툭 내려앉는다// 내 몸에 우주가 손을 얹었다// 너무 가볍다’
이 작품은 시집 ‘내 몸에 우주가 손을 얹었다’ 속에 수록되어 있다. 그는 이 시집을 나에게 우편으로 보내고는, 늦은 저녁에 전화를 주었다. “내 시집 읽어 보았어? 어떤 작품이 좋아?” 나는 웃으며 ‘모두 좋다’고 했더니, 그는 굳이 좋은 작품의 제목을 말해 달라고 했다. 나는 하는 수 없어서 생각나는 대로 ‘잎사귀 그릇’이란 작품이 좋더라고 대답했다. 그제서야 그는 “그래? 그 작품이 좋아?“ 되묻고는 전화를 끊었다.
식은 진행되어, 유족인사가 있었다. 이 행사를 맡아서 하고 있는 그의 동생은 “시를 잘 모르기 때문에 얼마나 형이 시인으로 위대한지를 실감할 수 없다”.라고 솔직히 말했다. 또한 그 자리에 참석한 이성선 형의 부인은 “언제인가 함께 여행을 할 때, 조지훈 시인의 시비를 보고 너무 좋아하기에 내가 시비를 세워 주겠다고 했더니, 시비는 그렇게 마음대로 세우는 게 아니라고 했는데, 이렇게 시비가 세워지게 되어서 기쁘다”.라고 말했다.
조지훈 시인은 우리의 스승이다. 나와 이성선 시인은, 농학과에 적을 두고 있었으므로, 그 스승의 강의를 도강(盜講)하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그렇게 문학의 꿈을 키웠다.
식이 모두 끝났다. 이성선 시인의 부인은, 큰아들이 서울대학교에 입학시험을 치를 때에 우리집에서 묵었노라고, 다른 사람들에게 말했다. 나는 까맣게 잊고 있었던 일인데, 그러고 보니 그런 적이 있기는 있었다. 경오년도 다 저물어 가는 12월 초순이었다. 저녁에 전화가 요란하게 울었다. “17일에 묵을 여관방 하나만 알아봐 주게.” 이성선 시인이었다. 그는, ‘그의 아들이 서울대학교에 입학시험을 치르게 되어, 부부가 함께 상경하려고 한다’.는 뜻을 밝혔다. 17일이라면, 너무 촉박하여 방을 구하기는 불가능했다. 입시 때면 으레 겪는 일이기도 했다. 이미, 모든 방이 예약되어 있을 게 뻔하였다.
그렇지 않더라도, 친구 내외를 여관방에서 재우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 기회에 그들 부부와 하룻밤을 함께 보내고 싶었다. 게다가 서울대학교는 우리집에서 버스로 겨우 두 정거장 거리밖에 안 되지 않는가. 나는 못을 박았다. “방을 알아볼 게 뭐가 있겠나? 누추하지만, 우리집에서 묵으면 되지.”
그날이 되자, 우리 부부는 먼 곳에서 찾아오는 친구 부부를 위하여 내 딴에는 준비를 하느라고 했다. 하지만 그 부부는 17일 밤에 10시가 넘어서야 우리집을 찾았고, 다음날에는 새벽 5시에 일어나서 우리집을 떠났다. 나는 식사 한 끼 제대로 대접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유족들과 인사를 나누고, 천천히 시비를 둘러보았다. 보면 볼수록 시비를 세운 자리가 아늑해 보였다. 누군가, 명당자리를 잡았다고 말하는 소리도 들렸다. 시비가 세워진 옆에는 나이 많은 졸참나무가 서 있었다. 그 나무는 이성선 시인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고 있을까? 막 돋아나온 신록의 잎사귀들이 의미 있는 미소를 머금은 듯 반짝인다.
내가 그 곳 부락 사람에게 이성선 시인이 태어난 집을 묻자, 그는 시비가 세워져 있는 아래쪽의 기와집이라고 알려주었다. 나는 그 집을 찾아가서 요모조모 살펴보았다. 한지 살문이 눈에 들어왔다. 그 때, 이성선 형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내가 자란 집은 한지 살문이었다. 이 곳에는 언제나 나무와 산그림자가 걸려 있었다. 달빛에 은은히 젖어서 혹은 오후의 적요한 햇살에 비쳐서, 그 때 그 위로 새 날개 그림자도 지나갔다. 벌레 소리도 걸렸다. 그런데 이 그림자들은 혼자 한지문에 은은히 비쳐 떨다 갈 뿐, 내 가슴에 향기를 뿌릴 뿐, 우리집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았다.”
바로 그 집이 이 기와집이 아닌가. 나는 고개를 들었다. 이번에는 먼 산이 아무 말없이 눈에 들어왔다. 다시 이어지는 듯한 이성선 형의 목소리---.
“나는 문에 와 떨던 그 산으로 가고 싶었다. 그 산이 그리웠다. 그래서일까. 지금도 산만 보면 마음 두근거려 합장한다. 그리고 벌써 10년 가까이 새벽이면 일어나 산을 향해 삼배한다. 산은 이제 멀리 있지 않다. 내게로 와서 나와 하나가 되었다.”
그래서 그는 그리 서둘러서 그 산으로 떠났을까.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시인으로 깨끗하게 살기 어려운 이 세상에서 훌쩍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이 어쩌면 큰 행운일지도 모른다. 시람의 일생이란, 얼마나 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에 그 의미가 있다. 더군다나 삶과 죽음은 별개가 아니라고 한다. 육신은 유한하여 태어났다가 소멸되지만, 마음은 영원하여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우주 속에 상주하다가 인연에 따라 다시 몸을 얻음으로써 환생한다고 하지 않던가.
이성선 시인은 속초에서 시를 창작했다. 한 번은 그의 집을 방문했는데, 2층 그의 서재에서 밖을 바라보니, 설악산이 한눈에 들어왔다. 내가 그에게 ‘설악산을 안고 사니 얼마나 좋으냐?’라고 물었으나, 그는 그저 하얗게 웃기만 했다. 나는 그에게 설악산에 많이 자생하는 산꽃인 ‘솜다리’를 선물했다.
그 때,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고, 메밀 냄새가 풍기는 듯도 했다. 그렇다. 이성선 형의 작품 중 ‘고향의 천정’은, ‘밭뚝에서 나는 바람과 놀고 할머니는 메밀밭에서 메밀을 꺾고 계셨습니다.’로 시작되어 ‘할머니는 나를 두고 메밀밭만 저승까지 가져가시어 날마다 저녁이면 메밀밭을 매시며 메밀꽃 사이사이로 나를 살피고 계셨습니다.’로 끝난다. 아마도 그 고장은 메밀이 많이 생산되고 있을 게다. 메밀꽃은 늦여름부터 피기 시작한다. 메밀꽃은 다른 이름으로 ‘교화’(簥花)라고 부른다. 이는, 그 모습이 파도가 일 때의 하얗게 부서지는 포말(泡沫)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서울로 돌아갈 길이 급했다. 우리 일행은 다시 버스에 몸을 싣고 남쪽으로 향했다. 얼마를 달려서 우리는 ‘미시령’에 도착했다. 하차하여 바라보니, ‘안개’가 자욱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미시령 안개’는, ‘미시령 노을’과는 달리, 천천히 우주의 한 귀퉁이를 갉아먹고 있는 중이었다. 설악산 북단에 호젓하게 자리잡고 있는 미시령. 이 미시령 휴게소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오르면 눈앞에 상봉과 신선봉이 나타난다.
우리는 다시 차를 타고 서울로 달렸다. 갈 때보다 올 때가 버스는 더 빨리 달리는 성싶다. 어느새 미사리를 지나서 ‘선동 사거리’에 이르렀다. 밖을 보니, 어느 집 담 안에서 커다란 오동나무가 꽃을 가득 피우고 있었다. 문득 이성선 형의 꽃에 대한 글이 생각난다.
「이 세상에 사는 누구도 독립된 혼자는 없다. 꽃은 누가 피우는가? 다른 누가 피울까? 아니다. 내가 가서 피운다. 우리는 죽어서 거름이 된다. 그는 그것을 밥으로 먹어 잎을 만들고 향기로운 꽃을 피워 낸다. 그러기에 꽃은 또 다른 나다. 이 길은 내면의 길이다. 우리가 내면으로 갈 때, 사랑을 느낀다. 내면의 길은 사랑의 길이다. 우주의 길이다. 내면으로부터 진정한 목소리가 나오고 내면으로부터 향기가 나온다. 인간들이 어둠 속에서 서로의 목소리를 분간하듯이 꽃들은 향기로 서로를 분간한다. 이 내면의 길 속 대화가 바로 시다.」
이 글은, 1999년에 이성선 형이 녹색평론을 통하여 발표했던 ‘우주와의 대화’ 중 한 대목이다. 어느 문학평론가의 말처럼, 이성선 시인에게 있어서 시인이란 ‘하늘’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다. 몸은 지상에 있어도 마음만은 항상 하늘을 거니는 사람이다. 말하자면, 그는 지상에서도 하늘을 보고, 하늘에서도 세상을 보는 시인이 되고자 노력했다. 그는 그렇게 내 마음에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