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혼 여행
김 재 황
역시 우정이라면 죽마고우였다. 내가 결혼한 지 올해로
25주년이 된다고 하니까, 그는 선뜻 온양 관광호텔의 숙박권을 구해 주었다. 그 동안, 아내에게 여행
한 번 제대로 시켜 주지 못한 터라, 나는 여간 고마운 게 아니었다. 아내도 좋아하였다. 혹시나 기껏 그런 곳이냐고 핀잔을 주지 않을까 은근히
내심으로 염려했는데, 다행이었다.
여행이라면 기차가 제격이겠기에, 일찌감치 2등표 2장을 구입했다. 출발하는 아침, 가져갈
물건을 챙기면서 마냥 즐거워하는 아내의 모습을 보며, 나는 그 많은 세월 동안 너무 무심했음을 자책했다.
기차는 안락했다.
2등 좌석이기 때문인지, 빈 자리가 많았다. 차창 밖에서 흘러가는 풍경을 바라보노라니, 꿈결처럼 지나가 버린 옛 일들이 떠올랐다.
내가 처음으로 아내를 만난 것은, 1973년 봄이었다. 친지의 소개로 맞선을 보게 되었고, 장소는 서대문에 있는 ‘등대’라는
다방이었다. 사실 그 때 나는 32살의 노총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결혼에는 그다지 뜻이 없었다. 그런데 인연이란 그런 것인가, 첫 만남에 이
사람이 내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눈치를 살피니, 아내 또한 내가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되어, 일사천리로 혼사가 이루어졌다.
즉, 봄에 맞선을 보고, 여름에 약혼을 하고, 가을에 결혼을 했다. 신혼여행은 제주도로 갔지만, 만난 지 얼마 안 되어
서먹서먹했기 때문이었던지, 별다른 추억거리는 만들지 못했다.
그랬던 것인데, 25년이 지나서 단둘이 여행을 떠나게 되었으니,
여간 감개무량한 게 아니었다.
옆에 앉은 아내도 먼 추억여행을 떠나고 있는 성싶었다.
기차는 미끄러지듯이 달려서 어느
틈에 온양역에 닿았다. 호텔에 여장을 푼 뒤, 우리는 곧바로 현충사로 향했다. 뜰은 넓고 깨끗했다. 그 경내가 자그마치 14만여 평에 달한다고
했다. 우리는 넓게 닦아놓은 길을 걷다가 충무공이 살던 고택에 이르렀다. 생김새가 아담하였고, 비교적 잘 관리되고 있는 듯했다. 금방이라도
선비의 글 읽는 소리가 낭랑히 들려 올 것만 같았다. 이 곳의 위치는 행정상으로 아산군 염치읍 백암리에 속한다.
정작으로
충무공은 이 집에서 태어나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의 출생지는 서울의 진천동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는 8살이 되었을 때, 외가가 있는 아산으로
내려왔고, 그 곳에서 성장하였다.
소년 시절, 순신은 동네 아이들과 전쟁놀이를 즐겼다. 그 때마다 아이들은 그를 대장으로
삼았다. 그 때 그 죽마고우 중에는 후에 영의정 벼슬에 오른 유성룡도 끼어 있었다. 두 사람은 끝까지 좋은 우정을 지켰다. 불현듯 우리 부부의
이번 여행을 주선해 준 친구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우정을 소중히 간직하리라 마음먹었다.
젊은이가 된 순신은, 이 곳에서
결혼을 했다. 그 부인은 보성군수 방진의 딸이었다. 그녀는 지혜가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집에 든 도둑을 물리칠 정도로 큰 담력을 지닌
여장부였다고 한다. 고택 앞의 맑은 물이 고인 충무정을 내려다보니, 방 부인의 얼굴이 언뜻 비치는 듯도 하였다. 충무공이 나라의 일로 타지에
나가 있었을 때, 방 부인은 늙은 시부모님을 모시고 3남 1녀의 자식들을 키웠다. 그 어려움이 얼마나 컸을 것인가. 충무공이 그처럼 큰 공을
세운 것도, 그 부인이 가정을 잘 다스려 주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참으로 아내는 소중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나는 약혼을
하고 얼마 안 되어,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내 버리고 말았다. 마루에서 바느질을 하시고 계시던 장모님이 그 소식을 들으시고 너무나 놀라셔서
바늘에 찔리셨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하지만 나는 뻔뻔스러울 정도로 태연자약했다. 아무러면 마누라 하나 못 먹여 살리겠느냐는 태도였다. 그런 내
모습에 장모님께서는 조금은 믿으시는 마음이 생기셨던지 아무 말씀도 없으셨다.
그 어머니에 그 딸이라고 하였던가. 아내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내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나는 근 1년 동안을 빈둥빈둥 백수로 지냈다. 그 후 어찌 어찌해서 제주도
서귀포에 귤밭 하나를 마련해 놓고, 모든 식구들을 이끌고 바다를 건넜다. 그 때도 아내는 여필종부의 미덕을 따랐다.
농사를
짓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서울에서 곱게 자란 아내가 알 턱이 없었다. 그 때부터 아내는 멀리 떨어진 섬에서 유배 아닌 유배 생활을
해야만 했다. 농부의 아내로서, 또 1남 1녀의 어머니로서, 열심히 10년이라는 세월을 살았다. 특히 밀감을 수확할 시기가 되면, 일군을
구하기가 힘든 철이므로, 아내는 아이를 업은 채로 하루 종일 밭에서 일했다.
어찌 그뿐이었던가. 겨울 내내, 창고에 쌓아 놓은
밀감 상자에서 썩은 것을 골라 내는 작업을 새벽부터 어두워질 때까지 쉬지 않고 했다. 그렇게 10년이 흘렀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아내는
가슴이 답답하고, 소화가 잘 안 된다고 하소연했다. 나는 덜컥 겁이 났다. 내과의사인 대학후배에게 진찰을 부탁했더니, 그는 ‘우울증’이라고
진단했다.
서울에서만 살아온 사람인데,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에서 10년이나 살았으니,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이 팔리자, 나는 다시 가족을 이끌고 무작정 상경했다. 여느 여인 같았으면, 가장이라는 사람이 어디 이처럼 무모한 행동을 할 수 있느냐고
나무랐으련만, 아내는 아무 말 없이 따라 주었다.
서울로 왔으나, 나는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그저 이 친구 저 친구를 만나러
다닐 뿐이었다. 그런 어느 날, 나는 아내에게 느닷없이 시를 쓰겠다고 말했다. 그 때는 아내도 화를 냈다. 처자식을 둔 사람이 자기만을
생각한다고 꾸짖었다. 하지만 나는 막무가내였다.
한 마디 통고 비슷하게 해 놓고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아무리 말려도 안
듣는 나를 보다 못해, 아내는 너그럽게 양보를 해 주었다.
그렇게 전업문인의 길을 걸은 지도, 어느 덧 1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러니까 결혼생활 25년에 반은 농군의 아내로 고생을 안겨 주었고, 반은 문인의 아내로 빈곤을 안겨 주었다. 또 앞으로 얼마나 이
험난한 길이 계속될는지 모르는 일이지만.
활터를 지나서 연못이 있는 곳으로 갔다. 꽤나 많은 물고기들이 놀고 있었다. 한가하게
한 세월을 노니는 물고기들이 부럽기 그지없었다. 아무런 걱정이나 근심이 없이 저처럼 우리 부부도 평화로운 말년을 보낼 수 있을 것인가.
내가 문인의 길을 걷고 있는 이상, 그것은 아무래도 어려운 일일 것이다. 현충사를 떠나 호텔로 돌아오니, 저녁 6시가 채 안
되었다. 친구의 특별한 부탁이 있었던지, 호텔의 관계자들은 극진히 대해 주었다. 온천탕에서부터 식사에 이르기까지 잘 대접받고, 그 다음날 아침,
아쉬운 마음으로 호텔 문을 나섰다.
서울로 바로 떠나기는 아쉬운 생각이 들어서 온양의 주위를 둘러보기로 했다. 택시를 타고 갈
만한 곳으로 안내하라고 했더니, 신정호수로 데려다 주었다. 이 신정호수는, 온양역에서 4㎞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는데, 낚시터로 이름난
곳이라고 했다.
그러나 우리가 당도해 보니, 을씨년스러운 풍경이었다. 때가 10월 중순이라 약간 쌀쌀한 느낌까지 들어서 더욱
그러했다. 호수에 띄워 놓은 커피숍을 찾아 들어갔다. 할머니 한 분이 계시다가 옮기기 어려운 걸음걸이로 다가와서 무엇을 주문할 것이냐고 물었다.
우리는 커피 2잔을 부탁했다.
옛날에는 신혼여행지로 이름이 높았던 온양이 어쩌면 이렇게도 쇠퇴했는지, 가슴이 아팠다. 그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우리가 묵었던 관광호텔조차 도산할 위기에 놓여 있다고 했다. 그 이유는 자연을 사랑하기보다 이용을 목적으로 개발에만 치중한
결과일 듯싶다. 지금이라도 자연을 가꾸어서 쾌적한 환경을 조성한다면 옛날의 명성을 되찾을 수 있으련만.
서둘러서 온양역에
도착했으나, 표가 매진된 상태였다. 하는 수 없이, 우리는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돌아오면서 나는 아내에게 금혼여행은 더
좋은 곳으로 가자고 말했다. 아내는 말없이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