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봉산의 고진동
김 재 황
군 관계자와는 이미, 건봉사 앞에서 오전 9시에 만난 다음, 안내를 받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4월 26일, 아침 8시경에 우리는 건봉사에 도착하였다. 절 앞 풀숲에는 민들레가 노랗게 피어 있었고 군데군데 흰민들레의 무리도 눈에 띄었다.
건봉사(乾鳳寺)는 우리나라 4대 사찰 중의 하나였으나 불행히도 한국전쟁 중에 전부 소실되는 수난을 당하였고 그 후 최근에 이르러서야 임시 대웅전이 신축되었다. 행정상으로는 거진읍 속하는 이 건봉사의 주위 산림은 주로 소나무 군과 신갈나무 등의 활엽수들이 혼생림을 이루고 있는 평범한 식생이었다. 하지만 산의 위쪽을 보면 참나무가 많은 듯했고, 정상 부근에는 황폐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직 시간이 있기에 건봉사 인근의 계류(溪流)를 둘러보기로 했다. 이 곳 계류의 기슭은 깎아 세운 듯한 언덕이고, 하천은 물의 흐름이 빨랐으며 바닥에는 암반이 깔리고 커다란 암석도 많이 보였다.
아래로 내려가 보았다. 물고기는 별로 없는 듯했다. 아마도 흐르는 물의 양이 불균형을 이루므로 물고기의 서식 및 산란이 어렵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그러나 개울 가에는 눈이 부시게 빛나는 황금꽃을 피운 노랑매미꽃이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줄기를 자르면 피처럼 보이는 즙액이 나온다고 하여 일명 ‘피나물’이라 불려지기도 하는 노랑매미꽃. 그 만개한 미소가 눈물겨웠다.
오전 9시가 조금 지나서, 우리 일행은 군부대로부터 지원 받은 군 트럭에 탑승하여 건봉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건봉산(乾鳳山)은 해발 911미터의 높은 산으로 거진읍 냉천리 민통선 북방, 태백산맥의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북쪽에는 금강산이 마주하고 남쪽에는 설악산이, 그리고 서쪽에는 향로봉이 어깨를 겨루고 있다.
산을 오르면서 보니까, 비교적 낮은 지역에서는 나무들이 다양하게 살고 있었으나 차츰 높이 올라가면서 빈약한 식생을 이루고 있었으며 큰 나무보다는 철쭉, 진달래, 병꽃나무 등의 관목들이 많았다. 꽃도 시기적으로 일러서인지 드물었고, 다만 노랑괴불주머니 무리가 간간이 꽃을 피우고 있어서 조금은 우리들의 마음을 훈훈하게 해 주었다.
얼마를 꼬불꼬불 산길을 올랐을까. 마침내 우리는 정상에 다다랐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북녘을 바라보니, 멀리 어렴풋이 금강산이 보였다. 눈시울이 대번에 뜨거워지며 산은 더욱 안개가 짙게 낀 듯했다. 모두들 말이 없었으나, 속으로는 목이 터져라 조국통일을 외쳤으리라.
우리는 발길을 돌려, 이번에는 고진동을 향해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고진동은 금강산 남쪽 감호(鑑湖)를 감싸고 흐르는 고성 남강(南江)의 상류인데, '박달나무' ' 피나무' '음나무' ' 개서나무' '서어나무' '까치박달' '물박달' '물푸레나무' '생강나무' '들메나무' '신갈나무' '굴참나무' '느릅나무' 등의 활엽수들이 어울려 살고 있는 계곡이다.
이 고진동 계곡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아서 비교적 안정된 생태계를 유지하고 있는 곳으로, 특히 고려집게벌레의 서식이 밝혀져 학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고려집게벌레는 세계에서 가장 원시적이며 기록상으로는 우리나라와 만주 및 일본이 분포지역으로 되어 있으나, 1940년 이후에 만주에서는 보고가 없고 일본은 확인이 필요한 상태라고 한다.
그 때 숲에서 곤줄박이 한 마리가 푸드득 날았다. 귀울음을 물고 사는 우리 텃새. 녹슨 철조망 위에 올라앉아, 검은 머리 끄덕여 이 땅을 사랑하고, 검은 목을 길게 뽑아 진정한 평화를 기다리는 갈색 어두운 흰 얼굴의 곤줄박이, 아마도 곤줄박이는 팔딱팔딱 자폐증을 앓고 있었을 게다.
우리는 계곡을 내려가면서 귀여운 야생화와 만나는 기쁨을 누렸다. 태백제비꽃이며 그리고 개별꽃이며 세잎양지꽃이며…, 그런데 저것은 괭이눈이 아닌가. 연한 노란빛 꽃밥을 지닌 괭이눈이 계곡 물가의 습지에서 몸을 잔뜩 웅크리고 우리를 주시하고 있었다.
돌아서 나와서 우거진 숲을 바라보았다. 지뢰 때문에 숲 속으로는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러나 멀리에서 보아서도 아름다운 소나무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 소나무들은 이른바 ‘금강소나무’로 비교적 유전자 보존이 잘 되어 있다. 수간이 곧고 수관폭이 좁아서 늘씬하며 수피가 황갈색이다. 강원도 사람들은 이 나무를 강송(剛松)이라 부르며, 지방의 이름을 따서 ‘춘양목’이라고 아끼기도 한다. 특히 자람이 빠르고 곧으므로 보존적 가치가 높이 평가된다.
계곡에는 맑은 물이 흐르고 있었다. 물소리를 들으니, 소음에 시달려 온 귀가 맑게 씻긴다. 계곡으로 내려갔다. 물가의 돌 틈에 돌단풍이 있었다. 단풍을 닮은 잎사귀가 시원함을 전하여 준다. 무엇 때문에 저 돌단풍은 바위틈에 자리를 잡았는가. 가난하지 않고서는 순결한 영혼의 꽃을 피우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개울가에는 두릅나무 한 그루가 서서 여리디여린 새 순을 조심스레 내밀고 있었다.
우리는 더 내려가려야 더 내려갈 수 없는 철조망 앞에 이르러 발걸음을 멈추었다. 여기서부터가 ‘휴전선 벨트’이다. 전방은 남과 북이 서로 대치하고 있는 상태로, 소위 ‘사계 청소’라 하여 말끔하게 식물들을 없애 놓고 있다. 이 벨트는 식물의 천이에 중대한 지장을 초래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있다. 그런데 그 곳에 흰 꽃을 가득 피우고 있는 자두나무가 있었다. 그 깊은 산골에 자두꽃이 피어 있다니 어쩐 일인가. 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6.25전쟁 전에는 그 곳에 작은 마을이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이 곳 수계는 건봉산에서 발원하여 흐르고 흘러 금강산 남쪽을 휘돌아 동해로 들어간다. 주변에 울창한 숲이 우거져 있기 때문에 냉천수를 유지하고 있으며 따라서 냉수성 어류가 서식하기에 적당하다.
우리는 그 날 그 물에서 산천어와 금강모치 및 미유기를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지방에서 ‘곤들메기’, ‘큰곤들메기’, ‘조름이’, ‘열메기’ 등으로 불리기도 하는 산천어는 작은 송어의 모습인데 몸에 반문이 이채로웠다. 학자들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특히 이 지역이 산천어의 높은 서식밀도를 보이고 있다고 한다. 또 해안선에서 가장 내륙에 있는 산천어 서식지라는 특징도 나타낸다.
게다가 이 곳은 우리나라 특산종인 금강모치의 대량 서식지로도 알려져 있다. 금강모치는 몸이 가늘고 길며 주둥이가 뾰족하고 길다. 그에 비해 눈은 크다. 또한 등지느러미의 바깥쪽은 직선 모양이고 꼬리지느러미는 깊이 갈라진다. 등은 황갈색, 배는 은백색, 몸 양쪽에 두 줄씩의 주황색 세로띠가 있다. 금강산을 중심으로 맑고 찬 물에 많이 서식하고 있다고 하여 ‘금강모치’라는 이름을 얻은 성싶다.
그 날 우리는 또 한 가지 개가를 올렸다. 망원경으로나마 산양을 관찰할 수 있었기에 말이다. 산양은 숲 속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이 세상의 소음에 쫓겨서 산 깊숙이 들어가 숨 죽이는 순한 동물. 가만가만 흐르는 피의 소리가 지친 가슴에 내비치고 있을 것이었다. 그 겁먹은 눈동자에 끌려서 나는 자꾸 슬퍼졌다.
산양은 움직임이 민첩하다. 그가 험준한 암벽을 오르내리는 모습은 신기에 가깝다. 먹이도 아무 것이나 잘 먹는다. 특히 좋아하는 것은 나무의 잎과 풀이지만, 바위이끼 등도 즐겨 먹는다. 게다가 몸의 털 색깔마저 바위와 같으니, 가만히 엎드려만 있으면 눈에 잘 뜨이지도 않는다. 그렇기에 이 험한 세상에서 지금까지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게 아니겠는가.
또 한 가지, 고진동에는 하늘다람쥐가 서식하고 있다. 하늘다람쥐는 날다람쥐과 동물이다. 다람쥐와 그 모습이 비슷하지만, 몸이 훨씬 크다. 즉, 몸길이는 20센티미터가량이고, 꼬리는 12센티미터 안팎이다. 앞발과 뒷발 사이의 피부가 늘어져서 비막(飛膜)을 이루기에, 높은 나무에서 낮은 나무로 날아서 이동할 수 있다. 몸빛을 보면, 등 쪽은 황색 또는 갈색이지만, 꼬리는 담갈색에 검은 빛을 띤다. 조금 뭉뚝해 보이고 아랫배 쪽은 흰 빛깔을 지닌다. 밤에 활동하는 야행성으로, '나무 열매' '곤충' '나무의 새순' ' 새의 알' 등을 먹고 산다. 나무 위에 집을 짓고 봄에서 가을에 걸쳐, 한 번에 너더댓 마리의 새끼를 낳는다.
우리는, 물 가에서 서운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한 무리 돌단풍이며 두릅나무를 뒤에 두고, 그 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 날로 향로봉을 올라가기로 일정이 짜여져 있었다.
가파른 산을 낑낑거리면서도 군용 트럭은 꼬불꼬불 잘도 올랐다. 그 높은 산을 차를 타고 오르다니. 어쩐지 못할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향로봉(香爐峯)에는 곳곳에 하얀 눈이 덮여 있었다. 자그마치 해발 1천2백93미터. 관목들이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아, 그런데 저것은 무엇인가. 그 추운 자리에서 얼레지가 군락을 이루고 있지 않은가. 눈 녹은 양지에서 홍자색 꽃을 피우고 있는 얼레지. 그 잎사귀에 얼룩으로 묻어 있는 반점이 핏빛처럼 애처로웠다. 그리고 관목 숲 그늘 아래, 달빛을 머금은 듯 꿩의바람꽃도 피어 있었다. 별빛 눈을 뜨고 통일을 염원하고 있었다.
이 곳에서 특별히 살고 있는 식물로는 떡버들과 홀아비바람꽃이 있다. 떡버들은 버들과에 속하는 특산식물로 본 지역에서는 '대암산' '두솔산' '향로봉' '금강산'에서 나고, 홀아비바람꽃은 미나리아재비과에 속하는 특산식물로 본 지역에서는 금강산과 향로봉에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