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암산의 고층습원
김 재 황
남한에서 겨울이 가장 빨리 도착한다는 중동부 휴전선 대암산(大岩山). 행정상으로는 서화면(瑞和面)에 소재한 해발 1천3백50 미터의 대암산을 우리가 찾은 것은 5월 30일의 일이었다.
아침 9시 30분경, 우리는 한 장교의 안내를 받아서 군용 트럭에 몸을 싣고 대암산 정상을 향해 오르기 시작했다. 대암산은 양구군과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는 산으로, 높이는 1천3백16미터에 이르며, 인제군 북면과 서화면의 분수령을 이루고 있다. 이 산은 대우산과 함께 1973년 7월 10일에 천연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북북서쪽의 가칠봉과 북서쪽의 도솔산 및 동북쪽의 덕계산 등이 어우러져 고지를 형성하고 있어서 비교적 생태계가 잘 유지되고 있는 곳이다.
대암산을 오르면서 밖을 보니, 주로 낙엽활엽수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으나 대부분이 군인들에 의해 벌채가 이루어진 후에 형성된 2차림인 듯했다. 하지만 높이 올라가면서 비교적 원시의 활엽수림을 볼 수 있어서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었다.
얼마를 올라갔을까. 마침내 정상에 도착한 우리는 설레는 마음으로 차에서 내린 후에 사방을 둘러보았다. 북쪽에는 해안분지요, 동쪽으로는 소양강이 하염없이 흐르고 있었다. 해안분지는 마치 화채그릇처럼 생겼다하여, 6.25전쟁 당시, 참전 미군들이 ‘펀치볼’이란 애칭을 붙였던 곳이다.
우리는 산의 서북사면을 따라 내려가기 시작했다. 한참을 내려가다가 해발 1천2백 미터의 고지에 이르렀을 때, 대암산은 그 동안 고이 감추어 두었던 평원을 우리 앞에 드러내 보였다. 이른바 고층습원으로 일명 ‘용늪’이라 불리는 곳이다. 용이 승천하였다는 전설을 지니고 있는 이 용늪은 그 이름에 걸맞게 늘 안개가 끼여 있어서 맑은 날을 구경하기가 힘들다고 한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우리가 도착하였을 때는 의외로 쾌청한 날씨를 보이고 있었다.
우리나라에 있어서는 지금까지 오직 두 곳의 고층습원(高層濕原)이 알려져 있을 뿐이다. 하나는 북한의 함경북도에 있는 대택(大澤)이고, 나머지 하나는 바로 이 곳 대암산의 용늪이다. 이들은 기후의 변천이나 식생을 비교하는 데 좋은 지표가 된다.
대체 저 용늪에는 어떤 식물이 살고 있을까. 모두들 가벼운 흥분을 일으키며 늪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내려가려니까, 약간 가파른 능선을 따라 박새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그 커다란 푸른 잎새를 삐죽삐죽 내밀고 있는 모습이 참으로 힘차 보였다.
역시 습원은 신비로웠다. 태고의 신성함을 그대로 지키고 있었다. 이 높은 산 위에 이런 늪지대가 다 있다니, 다만 놀라울 뿐이었다. 이 용늪은 대략 동서로는 1백50 미터쯤 되고 남북으로는 1백 미터가 넘을 것 같았다.
바닥으로 내려섰을 때, 우리를 맨 처음 반기는 것은, 다름 아닌 동의나물이었다. 얼굴 가득 눈웃음을 짓는 동의나물의 모습은 그야말로 하얀 구름을 너울 쓰고, 진주 이슬을 신 삼아 신고 오시는 봄처녀가 분명하였다.
그 옆에는 우거진 오이풀이, 아직 꽃은 피우지 않았지만, 그 다정스런 잎사귀를 한껏 자랑하고 있었다. 또 저 작은 꽃은 무엇인가. 그래 맞다. 처녀치마였다. 어쩌면 저렇게도 줄기 위에 총상으로 달리는 분홍색 꽃이 연민의 정을 느끼게 할까.
늪 한가운데로 들어가 보려고 하였지만, 바닥이 물을 잔뜩 머금고 있어서 발이 푹푹 빠져서 그만두기로 했다. 군데군데 얕은 웅덩이가 있었는데 다가가 들여다보니 무당개구리가 놀라서 도망을 쳤다.
이 용늪에는, 이제 희귀식물이 되어 버린, 끈끈이주걱이 많이 살고 있다. 크기가 고작 2센티미터에 불과한 이 끈끈이주걱은 풀 밑에 숨어서 숨을 죽이고 있는데, 지닌 주걱으로 하루살이 등 작은 곤충을 잡아먹는다. 끈끈이주걱의 잎은 뿌리에서 모여 나고, 긴 잎자루가 있어서 마치 주걱처럼 보인다. 이 주걱 모양의 잎새는 연분홍 빛을 띠고 있어서 아름다우며, 그 위에는 홍자색의 작은 털이 돋아나 있다. 그런데 그 털에 끈끈한 액체가 많이 묻어 있기 때문에, 작은 벌레가 멋모르고 다가오면 그 몸이 들러붙게 된다. 그러면 끈끈이주걱은 분비액으로 소화(消化)를 하여 그 체액을 흡수한다. 곤충을 생각하면 소름이 끼치는 일이지만, 그게 끈끈이주걱이 살아가는 한 방법이다.
끈끈이주걱은 7월경에 꽃을 피운다. 꽃은 흰 빛깔이고 매화를 닮았다. 작은 얼굴이지만, 볼수록 정다운 표정을 짓는다. 잎 사이에서 꽃줄기를 내어, 그 끝에 이삭 꽃차례를 보인다. 이 풀은 그 몸 전체에 귀한 약효를 지니고 있다. 거담 효능이 있어서, 예로부터 가래가 끓는 증세나 천식을 치료하는 약으로 쓰여 왔다. 이 밖에도 '물이끼' '비로용담' '조름나물' '좀통발' '가는동자꽃' '금강초롱' '장백산제비꽃' '날개하늘나리' '바늘사초' 등이 살고 있다. 이 식물들은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어서 희소가치가 클 뿐더러 식생천이의 귀중한 자료가 된다.
대체적으로 이 용늪 바닥의 식생은 중앙에 오이풀과 참삿갓사초가 군락을 이루고 동쪽에는 물이끼와 동의나물이 있었으며 서쪽은 갯버들이 있었고 또 남쪽은 뚝사초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늪 주위의 식생을 둘러보았다. '사스래' '신갈나무' '분비나무' '박달나무' '회나무' '개회나무' '갈매나무' '고로쇠나무' '시닥나무' '물푸레나무' 등이 모여 숲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숲속에서 수줍은 듯이 얼굴을 붉히고 있는 꽃을 발견하였다. 넓은 잎사귀를 지닌 큰앵초였다. 홍색 꿈 피워 물고, 녹색 사랑 펼쳐 들고, 너는 어느 님을 기다리는가. 왜 큰앵초의 꽃은 저처럼 화사하게 피어날까. 꽃은 또 어찌 그리도 앙증스러운가. 넓디넓은 잎사귀는 왜 두르고 있는가. 모두가 보면 볼수록 시골에 숨어사는 아름다운 처녀의 모습이었다.
이 고층습원의 형성과정을 짚어 보면, 저층인 회색점토와 미사 퇴적층 위에 사초가 죽어서 미분해 된 상태의 이탄(泥炭)이 두꺼운 층을 구성하고 있으며 그 위에 물이끼 식물 이탄이 또 한 번 두껍게 퇴적을 이루고 있다. 이런 이탄 속에서는 식물의 종자나 곤충의 날개 등, 눈으로 식별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포자(胞子)나 꽃가루나 규조(硅藻) 등, 현미경으로 보아야 발견되는 것까지 많이 오래도록 발견된다.
하지만 학자들에 따르면, 습원은 물과의 관계가 깊어서 그 수위가 변하게 될 때에는 곧 습원의 생명이 끝나 버리게 된다고 말한다. 더구나 배수가 잘 안 되었을 때에는 지금의 식물 생육이 저해되고 다른 초본 식물이 침입하여 드디어는 산지 초원으로 변하게 되며, 반대로 습원의 표면이 물로 덮이게 되면 습원식물은 소멸되고 그 대신으로 수생식물(水生植物)이 군락을 이루게 된다고 한다.
대암산에서는 드물지만 산은줄표범나비와 조흰뱀눈나비 등이 발견된다. 그 외에도 여러 종류의 표범나비, 그리고 네발나비과에 속하는 종들이 보고되었다.
이 대암산 고층습원은 살아 있는 자연사 박물관으로 사람의 출입을 엄격히 규제할 필요가 있다. 만약 이 늪이 사람들에 의해 짓밟힌다면 20센티미터에 이르는 이탄층이 훼손되게 되며, 이렇게 파손된 이탄층이 다시 원상으로 회복되려면 자그마치 2백 년이나 되는 긴 세월이 필요하다고 한다.
늪을 떠나 언덕으로 올랐다. 그 곳 주위를 살피다가, 나는 뜻밖에도 숲 속에서 흰철쭉을 만났다. 높은 산꼭대기에 살며 순결한 영혼을 가꾸는 흰철쭉 앞에서 나는 한동안 발이 굳었다. 바람과 구름과 벗하며 순수를 지키고 있는 흰철쭉보다 더 아름다운 모습이 어디에 또 있겠는가.
오후 2시가 넘었다. 우리는 가칠봉을 향해 다시 차를 달리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달려서야 우리는 산봉우리 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기가 남방한계선 북쪽, 적진과 불과 7백50미터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최전방이다. 여기 저기에 민들레가 아름답게 피어 있는 산 정상에서 북녘을 바라보았다. ‘피의 능선’과 ‘김일성 고지’가 손에 잡힐 듯했다.
동서로 첩첩이 이어져 있는 봉우리, 그 전방에 983고지를 주봉으로 하여 가로놓인 ‘피의 능선’. 한국전쟁 때 1백만 발의 포탄이 떨어졌다는 이 능선을 예전에는 두밀령이라 불렀다.
1951년 8월. 인민군 제5군단 제12사단, 제2군단 제27사단 제14연대를 맞아 우리 국군 제5사단 제36연대의 불꽃 튀는 접전이 있었다. 6일 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적병의 시체가 또 하나의 산을 이룬 두밀령 꼭대기에 태극기를 꽂는 승리를 이룩했다.
‘김일성 고지’는 ‘피의 능선’인 두밀령 북쪽에 위치한 고지. ‘피의 능선’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은 적군은, 휴전 협상을 하는 동안을 틈타서 병력과 화기를 증강하여 ‘김일성 고지’를 단단히 지키고 있었다.
1951년 10월. 마침내 우리 흑룡부대 용사들과 피의 사투가 시작되었다. 그 때, 아까운 젊은 목숨들이 얼마나 많이 스러져 갔던가. 나는 오랫동안 눈을 감고 그들의 명복을 빌었다.
고개를 들고, 먼 북녘 땅을 바라보니, 금강산 비로봉과 만물상이 안개 속에 서 있었다. 한 나라 한 국토이면서도 가고 오지 못하고 바라보기만 해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비극인가.
돌아오면서 마주했던 ‘큰애기나리’의 슬픈 듯한 눈빛이 아직도 눈에 선한 것은 아마도 평화와 자유의 염원이 이심전심으로 전해졌기 때문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