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문

기행문8

시조시인 2005. 9. 30. 10:28
 

파평산과 사미천

 

                                                            김 재 황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적군이 피점(被占)과 아군의 수복이 반복되다가 마침내 휴전협정이 이루어짐으로써 우리의 지역이 된 파주. 그 곳에는, 옛날에 칠중성(七重城)이라 불렸던, 최초의 방어선인 파평산이 있다. 그리고 100만 동족의 피를 황해 바다에 쏟아 넣었던, 온 겨레의 슬픔이 흐르는 임진강도 있다. 그 두 곳을 둘러보기 위해, 6월 27일 아침 8시경에 우리는 북쪽을 향해 차를 몰았다.

  경기도 서북단에 위치하고 있는 파주군의 서북쪽은 휴전선을 경계로 이북과 대치하고 있고, 북동쪽으로는 연천군, 동쪽으로는 양주군, 그리고 남쪽으로는 고양군과 몸을 맞대고 있다.

  파주 지방은 고구려 장수왕 때에는 술이홀현(述爾忽縣)이었는데, 신라 경덕왕 때에는 봉성현(峰城縣)으로 되었다가 고려 명종 때에는 서원현(瑞原縣)으로 고쳐 불렀는데, 조선 태조 2년에 서원군(瑞原郡)으로 승격되었고, 그 이후 태조 7년에 파평현(坡平縣)이 병합되어 원평군(原平郡)으로, 그리고 세조 7년에 왕비의 고향이라 하여 목(牧)으로 격상되어 비로소 ‘파주’란 이름을 얻게 되었으며, 지금의 파주군이 된 것은 바로 고종 32년의 일이었다.

  조선 초기만 해도 파주 지방은 척박한 지역으로 사람이 살기에 그리 좋은 곳은 아니었다.

  파주의 지형을 살펴보면, 동쪽에서 서쪽으로 급경사가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경사면을 지나서 이루는 평지는 추가령지구대로 형성된 변성암의 영향을 받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하천은 경사면을 급히 흘러서 평지에 이르면 금시에 지하로 흘러들게 된다. 그러니 장마 때를 제외하고는 모든 하천이 건천(乾川) 아니면 사천(沙川)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관개수가 모자라기 때문에 토지가 비옥하지 못했으며 농산물 생산이 어려웠던 파주 지방은, 임진왜란이 지난 후부터 농사법이 발달하게 됨에 따라 논밭이 비옥해져서 살기 좋은 고장이 되었다.

  우리가 장교의 안내를 받아서 파평산을 오르기 시작한 것은 아침 10시경이었다. 나막신의 콧날처럼 모서리가 날카로운 파평산. 군사적으로 요충지(要衝地)인 이 곳이 뚫리면 의정부와 문산이 일시에 무너지게 된다.

  그렇기에 파평산에는 무용담이 많다. 고구려 군에 포위된 신라의 한 현령(縣令)은 20일 동안이나 이 곳에서 항전하다가 전사하였고, 또 한국전쟁 때에는 중공군의 제2차 춘계 공세를 우리 국군이 20일 동안이나 막아낸 곳이기도 하다.

  우리는, 산 중턱의 넓은 공지까지는 차를 타고 올라가고, 그 이후부터 산 정상까지는 걸어서 올라가기로 했다. 파평산은, 민통선 북방지역은 아니지만, 민간인의 출입이 철저히 통제되고 있기 때문에 자연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 꼬불꼬불 난 산길을 오르다가, 우리가 맨 처음에 만난 것은 ‘어수리’였다. 찌는 듯한 폭염 아래에서 순수한 꿈 송이송이 피워, 우산처럼 받쳐 들고 서 있는 어수리. 깃 닮은 겹잎을 펼쳐서 이 땅이 통일될 그 날의 함성을 담고 어수리가 우리를 마중 나와 있었다. 우거진 풀숲에서 우뚝하게 머리를 내밀고 웃는 어수리를 보는 순간, 더위도 잊은 채, 나는 그에게로 달려가서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 빛나는 눈과 그 부드러운 살결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어수리는 미나리과에 딸린 여러해살이풀이다. 가지 끝에 희고 작은 꽃이 여러 개가 모여서 산형꽃차례를 이루는데, 총포조각은 줄꼴이며 밑으로 드리워지고 깊이 갈라진 다섯 장의 꽃잎을 보인다.

  또 우리는 산 중턱에서 한 무리를 이루고 있는 땅나리와도 만났다. 모두들 고개를 수그린 채로 땅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와는 반대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나리도 있다. 그 이름은 ‘하늘나리’이다. 그리고 ‘중나리’도 있는데, 이는 하늘과 땅의 중간을 바라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얼마를 더 올라갔을까. 이번에는 도랑 가에서 신선의 흰 수염을 생각나게 하는  ‘까치수영’이 서 있었다. 이 까치수영은 일명 ‘까치수염’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줄기의 끝에 작고 흰 꽃이 이삭 모양으로 모여서 피는 총상(總狀)꽃차례를 보인다.

  그리고 아직도 개벽의 빛을 머금고 무녀(巫女)처럼 춤을 추는 은판나비도 날고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머리는 누른 적갈색에 가슴은 거의 흑갈색인 장수말벌이 갑자기 머리 위로 날아들어 모두들 놀라기도 했다. 그 날에는 산을 오르면서 야생화를 많이 만났고, 은줄표범나비와 산녹색부전나비가 날고 있는 모습도 보았다.

  산 정상에는 엉겅퀴가 여기저기에서 꽃을 피우고 있었다. 가시 돋친 엉겅퀴가 붉은 울음을 머리털에 묻히고 북녘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마주하자니, 우리 또한 가슴을 찔리는 아픔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 산 기슭에는, 여진족을 맞아서 싸운 문숙공(文肅公) 윤관의 이야기가 서려 있다. 그가 거느렸던 고려의 17만 대군이 진을 펴고, 또 개선잔치를 베풀던 ‘곰시’를 생각한다. 원래 윤관 장군에게는 여진족 정벌 때에 포로로 데리고 온 ‘웅’(熊)이란 여인이 있었다. 이 여인은, 윤관 장군을 지극히 사모하였다. 그런데, 장군이 세상을 떠나게 되자, 그녀는 소(沼)에 몸을 던져서 순사하였다고 한다. 후세의 사람들이 그 여인이 뛰어내린 바위를 ‘낙화암’이라 부르고, 빠져 죽은 물웅덩이를 ‘웅담’(熊潭)이라 이름 지었다. 지금의 ‘웅담리’는 그렇게 해서 생겨났고, ‘곰시’는 ‘곰소’가 변하여서 생긴 이름이다.

  이 파평산의 서북쪽 산록 일대를 일컬어 ‘오동나무골’이라 한다. 이는 파평산 꼭대기를 줄기로 해서 하나의 잎이 죽산 아래에 덮인 듯한데, 보기에 따라서는 마치 오동나무의 잎을 펼친 것 같이 보인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오동나무골에는 명당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 때문에 많은 지사(地師)들이 찾아들었다고 전한다.  

  오후 1시가 넘어서야 우리는 임진강을 건너가기 위해서 차를 달렸다. 임진강은 함경남도 안변군 마식령(馬息嶺) 부근에서 발원하여 ‘고미탄천’(古味呑川) ‘역곡천’(驛谷川) ‘한탄강’(漢灘江) ‘문산천’(汶山川) 등의 지류와 어울린 후에 파주 남쪽에서 한강과 합류하여 황해로 흘러 들어가는 강으로, 그 길이는 2백54미터에 이른다.

  과거 6.25전쟁 이전에는 중․하류를 중심으로 활발한 수상교통이 이루어졌으며 아직도 그 당시의 나루터 등의 흔적이 남아 있다.  임진강은 수량이 풍부하고 경관이 아름답다. 우리는 차를 얼마 달리지 않아서 장파리에 도착했다.

  장파리는, 본래 긴 마루라는 뜻으로, 마을 형태가 말의 등처럼 길다고 해서 생겨난 이름이다. 이 장파리 북쪽 끝인 임진강과 만나는 곳에 ‘리비교’가 놓여 있다. 1953년 대전지구 전투에서 혁혁한 공훈을 세운 ‘리비 중사’를 기념하기 위해 명명된 리비교는 일명 ‘북진교’라 부르기도 한다. 군인들이 지키고 있는 이 리비교를, 우리는 승용차를 타고 건넜다. 무성한 갈대밭, 그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차를 달리자, 흙먼지가 구름처럼 일어나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가서, 우리는 한 늪지에 닿았다. 이삼천 평이나 될까. 늪지에는 사초들이 가득하였는데, 우리의 눈을 끈 것은 ‘석잠풀’이었다. 분홍빛 울음을 물고 핏빛 아픔을 다스려 꽃을 피우는 석잠풀. 가고 오지 못하는 늪지에서 서럽게 피어나던 꿈이여. 비린 바람 속에서 어설피 나를 보고 웃던 그 모습이여.

  늪 주위에는 많은 들풀들이 있었고 그 중에서 ‘애기똥풀’도 만날 수 있었다. 애기똥풀은 양귀비과 식물로 두해살이풀이다. 특징적으로 이 풀의 줄기를 자르면, 마치 애기의 똥빛을 보이는 즙액이 나온다. 몸에 독(毒)을 지니지만, 그 또한 약효를 지니고 있어서 황달이나 위궤양 등의 치료제로 쓰인다.

  그 늪지 건너편에는 인삼을 재배하는 포장(圃場)이 있었다. 그로 미루어 보아서 이 곳 역시 출입영농이 허가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서북쪽으로 길을 잡아서 계속 전진했다. 차창 밖으로 고랑포가 바라다 보였다. 동파적벽(東波赤壁)과 장단석벽(長端石壁)이 이 곳에서 그치고, 임진강의 조수가 또한 이 곳에 이르러 머무는 강나루다. 강 건너 맞은편은 적성(積城) 땅으로, 여인네들이 살짝 치마를 들어올리고도 건널 수 있는 깊이다. 그렇기에 한국전쟁 때는 남침한 적이 맨 처음으로 발을 딛은 곳이 되었고, 그로부터 열 번이나 북한군에게 빼앗겼다가 열한 번 만에야 다시 찾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고랑포리는 해방되기 전까지는 개성으로 통하는 도로변에 위치하여 크게 번성하였고 게다가 관개(灌漑) 이용이 커서 농산물의 산출도 많았으나, 지금은 집 한 채도 없는 황량한 벌판으로 변해 있었다.

  임진강 수계 중의 하나는, 군사분계선 북쪽에서 시작되어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을 중심으로 차탄천과 한탄강에 합류된 후에, 경기도 내의 민통선 지역을 흐르고 있는 사미천(沙尾川)이다. 사천 및 일부 작은 지천들이 다시 모여서 경기도 파주군과 김포군 사이를 통하여 서해로 흘러든다.

  내친걸음이라, 우리는 사미천까지 둘러보기로 했다. 사미천은 북한의 장단군(長湍郡)으로부터 남쪽으로 흘러내리는, 행정상으로는 연천군(連川郡) 백학면(百鶴面) 갈현리(葛峴里) 일대에 위치한 개울이다.

  개울 입구에 다다랐다. 사미천 상류 지역은 넓은 벌판을 이루는데, 대부분은 잔디가 심어져 가꾸어지고 있었다. 일부 조림한 나무도 있었다. 사미천이 흐르는 곳으로 가까이 갈수록 억새 군락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나무는 갯버들이 드문드문 눈에 뜨이었다.

  그 지역을 순찰하고 있는 군인에게 물으니, 군부대 주변에 있는 작은 야산에는 시무나무의 숲이 있으며, 귀룽나무와 뽕나무 등의 고목도 있다고 하였다. 더군다나 야산의 암벽에는 담쟁이덩굴을 비롯하여 돌단풍이 우거져 있다고 알려 주었다. 그들은 그 동안 몇 번이나 학자들의 식생조사가 있었으므로, 자연히 자연에 대한 높은 식견을 지니게 되었을 성싶었다.

  우리는, 장단에 고향을 둔 실향민들이 죽은 후에 그 뼛가루나마 뿌려지기를 바란다는, 사미천을 빨리 보고 싶었다. 부지런히 걸었다. 아, 사미천이 흐르고 있었다. 옛날, 고향에서 발가벗고 물놀이하던 그 냇물이 거기에 있었다.

  사미천 주변에 군락을 이루고 있는 달뿌리풀은 또 얼마나 반가운가. 달뿌리풀은 갈대와 매우 흡사하다. 하지만 근경이 땅 위로 뻗으며 줄기 마디에 긴 털이 있는 게 다르다. 그 밖에도 구릿대가 드문드문 보였고, 부처꽃도 만났으나 아직 꽃을 피우지 않아서 쉽게 드러나지는 않았다. 사미천 변의 작은 산 암벽에는 ‘거미일엽초’ ‘애기석위’ ‘우단일엽초’ ‘황고사리’ 등의 양치식물들이 자라고 있음이 학자들의 조사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사미천은 북위38°, 동경 126°50′지역에 위치하며 해발100미터 이하의 구릉지와 평탄지로 나뉜다. 모암은 '편암' '화강암' '화강편마암' 및 '변질석회암'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 토양특성은 자갈이 있는 식양토로 유효 토심은 중간이다. 토성은 산성을 나타낸다.

   그 곳 군인들의 말을 빌리면, 그 근방에서 ‘너구리’ ‘수달’ ‘노루’ ‘고라니’  ‘멧박쥐’를 비롯하여 ‘두더지’ ‘멧토끼’  ‘다람쥐’ ‘족제비’ ‘등줄쥐’ ‘비단털쥐’ 등을 이따금 볼 수 있다고 한다.

  물에  손을 담가 보았다. 부드러운 물살의 촉감이 좋았다. 물 속을 들여다보았다. 모래무지가 놀라 도망을 치는 모습이 보였다. 사미천에는 ‘쏘가리’ ‘배가사리’ ‘장어’ 그리고 자라 따위가 주로 많다고 하며, 특히 누치들이 알을 낳으러 올라올 때면 장관을 이룬다는 말에, 나는 그 곳을 떠나기가 정말 싫었다.

  파주군에도 입주영농이 실시되고 있는 곳이 있다. 바로 ‘대성리 마을’인데 특히 그 마을 사람들은 거주 이전의 자유에 제약이 있다. 즉, 그 마을 사람에게 시집을 오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신규 주민권 취득’이 안 되며, 또 그 마을 사람이 무단으로 외지에 4개월 이상 거주하였을 때에는 주민권을 잃게 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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