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두화를 찾아서
김 재 황
9월 20일경, 나는 강화군에 속해 있는 교동도(喬桐島)에 갈 기회가 있었다.
교동도는 민통선 이북 지역으로서 멀리서나마 북녘 연백 땅을 바라볼 수 있는 망향대(望鄕臺)를 비롯해서 많은 사적지(史蹟地)가 있는 곳이다. 하지만 나는 그 무엇보다도 그 곳 화개산(華蓋山)에 있는 화개사를 들러, 불두화(佛頭花)나무를 만나 볼 속셈을 지니고 떠났다.
새벽에 서울을 출발해서 강화도 창후에 닿은 것은 아침 8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그곳에서 배에다가 승용차를 싣고는, 한 20분이나 갔을까, 교동도 월선포(月仙浦)에 도착했을 때는 벌써 많은 사람들이 부두로 나와서 배가 닿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화개산을 향해 차를 달렸다. 교동도는 예로부터 불교와 유교가 성행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화개산 남쪽 기슭에는 우리나라 향교 중에서 가장 최초로 창건되었다는 교동향교와 고려 때 창건되었다는 화개사가 자리하고 있다.
향교로 향하는 길 왼쪽으로 굽어진 또 한 길을 접어들어 화개산을 오르니, 그 중턱쯤에 화개사가 수줍은 듯이 앉아 있었다. 이 절은 1967년에 화재를 만나 불상과 서적이 소실되었고, 그 다음해에 중건하여 지금은 법당과 주방이 남아 있다. 그런데 이 절의 법당에는 단청이 없고 비구니 스님만 머물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내가 이 절에 도착했을 때는 주지인 듯한 스님이 법당 앞에서 나무를 손질하고 있었으며, 꽃송이처럼 막 피어나는 한 젊은 비구니는 절 앞에 있는 약수터를 청소하고 있었다.
그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지, 나는 멀찌감치에서 한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도 목마른 중생에게 한 모금의 시원한 물보다 더 좋은 보시(布施)는 없으리라.
고려의 더운 숨결 아직 예서 꿈을 꾸고
불두화 꽃이 피면 향기 더욱 서린 법당
단청도 벗어 버린 채 깊은 선을 엽니다.
목마른 중생에겐 약수 또한 적선이라
입가에 보일 듯 말 듯 미소 짓는 관음보살
홍안의 한 비구니가 맑은 물을 긷습니다.
--- 졸시 ‘화개사에서
화개사 앞 마당으로 들어서니, 한 옆에 불두화가 시무룩하게 서 있었다. 한창 꽃이 만개하였을 여름을 지나, 이제 9월도 중순을 넘어섰는지라, 꽃은 거뭇거뭇 이미 지고 있었다.
나는 불두화 앞으로 다가갔다. 어디 꽃이 진다고 불두화가 아니랴. 더구나 불두화는 그 아름다움을 가슴에 지니고 있는 나무이니만큼 이처럼 둘이 만나는 기쁨이 어찌 크지 않으랴.
불두화는 인동과에 딸린 갈잎 떨기나무로, 키는 3미터 이상을 크지 않는, 백당나무의 한 품종이다. 마주 나는 잎은 달걀 모양의 긴 길둥근 꼴이고 잎 가장자리에는 거친 톱니를 보인다. 여름에 새하얀 작은 꽃들이 한데 보여서 큰 공처럼 피는데, 모두가 무성화(無性花)여서 열매를 맺지 않는다. 어쩌면 불도(佛道)에 정진하느라 자손을 이 세상에 남기지 않는 스님을 닮았는지 모른다.
그렇기에 불두화 앞에 서면, 한 큰스님과 만나는 듯한 엄숙함이 있다. 바람이 불어오자, 불두화 가지가 흔들렸다. 펄럭거리는 옷소매를 걷고, 손가락을 뻗어서 가리키는 곳에 청자빛 가을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불두화는, 아니, 큰스님은 그때 나에게 저 하늘을 가리켜 무엇을 설법(說法)하려던 것이었을까. 불현듯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다. 그는 다름 아닌 의천(義天). 고려 불교를 일으킨 왕자 스님이다.
의천은 고려 11대 문종의 넷째 아들로 이름은 후(煦)라고 불렀으며, 의천은 그의 자(字)였다. 문종 19년 11세의 어린 나이에 영통사로 들어가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그는,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불교를 더 깊이 공부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 송나라로 가려고 하였으나, 어머니인 왕비의 승낙을 얻지 못하여 번번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30세가 되던 1084년에 몇 명의 제자를 데리고 허름한 동냥중 차림으로 몰래 중국으로 떠날 수 있었다. 송나라 임금 철종은 의천이 송나라 서울인 변경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고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왕자가 승려가 된 것도 경사스러운데 이 곳까지 공부하러 왔다니 참으로 기쁜 일이다. 국빈으로 모시도록 하라.”
그 덕분에 의천은 계성사에 머물며 그 곳 큰스님인 정원법사(淨源法師)에게서 도(道)를 배우게 되었다.
어느 날 의천이 변경의 번화한 거리를 거닐고 있을 때였다. 거리에는 온갖 점포가 즐비하게 차려져 있었고 곳곳에서는 여러 나라에서 온 듯한 사람들이 갖가지 물건들을 흥정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모두들 무엇인가 쇳조각들을 주고받으며 물건들을 거래하고 있었다. 그는 그 쇳조각이 ‘엽전’이라는 돈인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때만 해도 고려에서는 물물교환을 하고 있었다.
선종 3년인 1086년, 공부를 끝난 의천은 중국책 1천 권을 가지고 고려로 돌아와서 경전(經典)연구와 전교(傳敎)에 힘썼다. 선종이 죽고, 그의 아들 헌종이 잠시 대를 이었다가, 의천의 형이 되는 숙종이 왕좌에 오르게 되었다. 숙종은 아우인 의천을 스승으로 삼아 의견을 물었다. 의천이 말했다.
“쇠돈을 만들어 백성들이 물건을 사고 팔 때에 편하도록 하십시오.”
숙종은 그 말에 따랐다. 주전도감을 세워 엽전을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해동통보, 삼한통보, 해동중보가 태어났다.
아, 중생을 구제하려는 가슴 뜨거운 큰스님은 이제 어디에서 만나볼 수 있단 말인가. 나는 공연히 눈시울을 붉히며 말없이 서 있는 불두화 나뭇가지를 어루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