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문

기행문9

시조시인 2005. 10. 5. 07:00

대송도와 교동도

                                                           김 재 황


 

  유일하게 도서지역을 민통선 북방지역으로 포함하고 있는 강화군은, 우리나라 5대 섬 중의 하나인 강화도를 비롯하여 '교동도'(喬桐島) '매음도'(煤音島)  '주문도'(注文島) '어유정도'(魚遊井島) 등의 많은 섬을 거느리고 있다.

  바다는 육지와는 달리, 민통선 설정에 어려움이 따른다. 군부대에서는 적의 가시지역임으로 인해 교동면과 서도면(西島面)을 민북지역으로 취급하고 있다. 교동면은 교동도 하나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동쪽은 강화, 서북방은 황해도 연백군, 그리고 남쪽은 석모도(席毛島)와 마주한다. 또한 서도면은 강화도 서쪽 끝에 위치하며 4개의 유인도, 즉 '주문도' '볼음도'(乶音島)  '아차도'(阿此島)  '말도'(唜島)와 9개의 무인도로 이루어져 있다.

  강화는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 해산물이 풍부하다. 계절적으로 생산종에 차이는 있으나, '도미' '우럭' '숭어' '농어' '홍어' '가무락' '웅어' '깨나리' '꽃게' '복어' '동어' '배지락' '굴' '새우' '오징어' '전어' '병어' '가오리' '서대기' '장대' '망둥어' '낚지' '소라' '밴댕이' '뱀장어' 등이 잡힌다. 이들 어류는 집단적으로 대이동을 하는 경우가 가끔 있다.

  우리는, 군부대에서 설정한 민북지역 중, 먼저 서도면의 주문도를 찾아보고 다음에 2차로 교동도를 둘러보기로 했다.

  7월 22일, 주문도를 가기에 앞서 우리는 석모도로 가야만 했다. 주문도로 갈 수 있는 배를 석모도에서 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10시 경에 강화도 외포리(外浦里) 부두에서 승용차를 배에 싣고 떠나, 한 10분쯤 되었을까. 석모도 석포리(石浦里) 나루에 닿았다. 선착장 앞에는 큰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서 우리를 환영하고 있었다.

  우리는 승용차를 꺼내 타고서 왼쪽 신간도로를 달려, 낙가산(洛伽山) 서쪽 기슭 매음리(煤音里) 보문동천(普門洞天) 입구에 있는 여관에 여장을 풀었다. 낙가산 중턱 보문사는 신라 선덕여왕 때 창건되었다고 전해져 오는데, 이는 회정선사(懷正禪師)가 금강산으로부터 이 곳으로 와서 개창하였다 한다.

  특히 이 절에는 세 종류의 고목이 있어 좋은 구경거리가 된다. 처음 만나게 되는 것은 절 입구에 있는 향나무이고, 다음으로는 절 마당에 있는 두 그루의 거대한 느티나무이며, 그리고 맨 나중에는 석실(石室) 앞 바위 틈에서 자라고 있는 늙은 향나무 한 그루이다. 이 향나무는 흉고직경이 3미터가 넘으며 원줄기는 동쪽과 서쪽으로 갈라져 있다. 6.25전쟁 중에는 죽은 듯이 보였다고 하였는데, 그 3년 후에는 다시 소생하였다고 전한다.

  낙가산의 식물분포는 대체적으로 보아서 낮은 곳은 소나무와 아카시아가 군집해 있으며, 중간 지역에는 소나무와 상수리나무가, 그리고 높은 곳에는 소나무만 있었다. 석모도를 한 바퀴 둘러보았으나, '원추리' '참나리' '달맞이꽃' '메꽃' 등이 눈에 띄었고, '자귀나무' '밤나무' '광대싸리' '개암나무' 등을 볼 수 있었다. 이 곳 석모도에는 특히 '시가도(市街圖)귤빛부전나비'가 발견된다. 이 나비는 날개에 네모 반듯한 무늬가 그려져 있으며, 낮에는 나뭇잎에 붙어 있다가 저녁에만 활동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음날 아침 9시경에 우리는 통통배를 타고 주문도를 향해 출발했다. 가는 도중에 석모도 매음리 앞바다에 있는 무인도인 대송도(大松島)를 들러서 살펴보기로 했다.

  대송도는 무인도이기 때문에 비교적 식생이 잘 보존되어 있는 곳으로, 검은머리물떼새의 번식지로 알려져 있다. 검은머리물떼새는 우리나라 천연기념물 제32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매년 5월 초순이면 대송도에서 한두 쌍이 암초 위에 둥우리를 짓고 알을 품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한다. 또한 열 쌍 정도의 흰뺨검둥오리가 집단번식을 하고 있음이 밝혀지기도 했다.

  얼마 안 가서 대송도에 닿았다. 상륙하는 남쪽에는 바위들이 많았고 작은 모래톱도 있었으나, 북쪽은 해변이 갯벌로 되어 있었다. 우리는 그 곳에서 많은 식물을 만났다. 나무로는 물푸레나무를 비롯하여 '장구밥나무'  '떡느릅나무' '왕쥐똥나무' '붉나무' '자귀나무' '노간주나무' '해당화' '아가위나무' '전동싸리' '소태나무' '덜꿩나무' '보리수나무' '참싸리' '까마귀밥여름나무' 등이 있었으며, 들풀로는 갯메꽃을 위시하여 '사철쑥' '익모초' '범부채' '대나물' '감국' '댕댕이덩굴' '도라지' '갈대' '달맞이꽃' '타래붓꽃' '모새달' '노박덩굴' '오리새' '으름덩굴' '갈퀴나물' '금불초' '좀꿩의다리' '꿩의비름' '우단이끼' 등이 살고 있었다.

  그러다가, 아, 우리는 해변 모래톱에서 죽어 가고 있는 왜가리 한 마리를 발견하였다. 왜가리는 쓰러진 채, 서러운 눈망울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꺼져 가는 숨결 속에는 도시의 매연이 묻어 있는 듯하고, 어쩌면 등 굽은 물고기의 비린내가 풍겨 나오는 듯도 하였다. 미련 많은 목숨 하나 차마 못 버려, 왜가리는 이따금 다리를 조금씩 움직여 보였다. 아직은 살았다는 듯 아직은…….

  배가 닿고 떠나는 것은 아무 때나 하는 게 아니라, 모두 물때를 맞춰야 하기 때문에 서둘러서 우리는 주문도를 향해 떠났다. 우리가 주문도에 도착한 것은, 오후 2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주문도는 옛날에 순군(巡軍) 첨사진(僉使鎭)이 있었던 곳으로, 섬 주위는 약 14킬로미터 가량이 되며, 면적은 4.5평방 킬로미터로 북쪽 아차도까지는 약 8백 미터 떨어져 있다. 원래 이 섬 근해에서는 '도미' '삼치' '조기' 따위가 많이 잡혔기 때문에 이 곳 응구지(鷹邱)는 어류 집산지로 이름이 높았다. 하지만 지금은 바다가 오염이 되고 군사적 여건 때문에 고기가 별로 잡히지 않는 듯이 보였으며, 한가한 바닷가에는 반동사니 종류와 지채 등이 우거져 있었다.

  주문도의 식생은 많이 파괴되어 있었다. 산 아래쪽에는 아카시아가 주종을 이루고 그 위쪽으로 상수리나무가 자리를 잡았다. 특징적으로 물이 풍부했고 숲에는 뱀이 많다고 했다. 돌아갈 때는 멀찌감치 옆으로 떨어져, 물범 한 마리가 우리 배를 따라왔다. 마치 배웅이라도 하는 듯이.

  물범은 일명 ‘바다표범’이라고도 부른다. 강치 또는 물개와 비슷하게 생겼는데, 몸길이는 2미터에 달한다. 몸 위쪽은 담황색이고, 몸옆 등쪽에는 확실하지 않은 암갈색 혹은 검은 반점이 있으며, 각 무늬의 크기와 모양은 일정하지 않다. 온 몸이 억센 털로 덮여 있다. 배는 흰 빛이고, 등은 어두운 황색이다. 귓바퀴는 아주 작은데, 주둥이 가운데에 골이 파였으며, 지느러미 모양의 뒷다리는 굽히기 어려우며, 앞다리에는 발톱이 나 있다. 주식은 청어이지만, 게와 조개 등도 잘 먹는다. 한 수컷이 여러 암컷을 거느리며, 수명은 40년 정도이다. 북극해․베링해․북해도 연해에서 번식하고 한류(寒流)를 따라 우리나라 동해안으로 온다고 알려져 있으나, 1994년에는 백령도 부근에서 3백 마리 정도로 추산되는 물범의 무리가 발견되었다. 물범과의 동물은 모두 11속 19종이 있는 것으로 밝혀져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물범을 비롯해서 흰띠백이물범과 고리무늬물범 등을 만날 수 있다. 물범은 우리나라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우리가 교동도를 찾은 것은 그로부터 두 달 가까이 지나서,  9월 19일이었다. 새벽에 서울을 떠나서 강화도 창후에 닿은 것은 아침 8시. 그 곳에서 배에 차를 싣고는, 한 20분 가서, 교동도 월선포(月仙浦)에 도착한 것은 아침 9시 경이었다.

  옛적에 교동도는 화개(華蓋)와 율두(栗頭), 수정산(水晶山)을 중심으로 세 개의 섬이었다고 하는데, 언제인가 제방(堤防)을 쌓으면서 한 개의 섬으로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교동현(縣)은 본시 대운도(戴雲島)라 하였고, 혹은 고림(高林)이라고도 하였으며, 달을신(達乙新)이라 하더니, 고구려 때에 고목근현(高木根縣)이라 불렀고 신라 때에 이르러 교동으로 되었다.

  차를 달리면서 보니, 길가에는 '고마리' '큰기름새' '들깨풀' '쑥부쟁이' '털여뀌' '억새' 등이 있었다. 한참을 달려, 서한리 바닷가에 이르렀다. 거기에서 무화과나무와 탱자나무, 그리고 조릿대도 보았다.

  교동도에서 간척이 많이 된 곳은 서한리(西漢里)와 무학리(舞鶴里)이며 특히 무학리에서 난정리(蘭井里)에 이르는 평야지대는 논이 많았는데 유량(流量)이 풍부한 하천이 없기에 곳곳에 저수지를 만들었다. 그 중 고구리 저수지를 가 보기로 했다.

  대룡리 동쪽으로 달려, 고구리 저수지에 다다르니 입이 딱 벌어졌다. 자그마치 면적 28만 평. 몽리면적은 8백 정보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사람들 말로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1미터 이상이 되는 고기를 많이 잡았다고 한다. 잉어와 가물치가 아니었나 짐작된다. 이 고구리는 연산군의 유배지이다. 연산군은 이 곳 저수지 주위를 거닐면서 외롭게 귀양살이를 하다가 31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하였다.

  그 곳을 떠나, 이번에는 대룡리 북쪽에 있는 망향대로 갔다. 가는 도중에 '대나물' '괭이싸리' '고들빼기' '술패랭이' '물봉선' '마타리' 등과 만나는 기쁨이 있었다. 망향대에 도착해서 북쪽을 바라보았다. 가물가물 연백 평야가 눈에 들어왔다.

  교동도는 예로부터 불교와 유교가 성행한 곳. 그래서 우리는 교동 향교와 화개사(華蓋寺)를 가 보기로 했다. 화개산 남쪽 기슭에 화개사와 향교가 있었다. 즉, 화개산으로 오르는 산 입구 길목에서 두 길로 갈라지는데, 화개사는 왼쪽 길로 접어들고, 향교는 오른쪽 길로 들어서야 한다.

 화개사는 본시 고려 때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목은(牧隱) 이색 선생이 독서하던 곳으로 유명하다. 1967년에 실화(失火)로 불상과 서적이 소실되었으나, 그 다음해에 중수하였다. 지금은 법당과 주방이 남아 있는데, 법당에는 단청이 없고, 비구니의 사찰이라는 게 특징이다. 교동 유일의 절이다.

  교동향교는 우리나라 향교 중에 가장 최초로 창건된 곳이다. 이 향교는, 고려 인종 5년에 안유(安裕)가 지었다고 전하는데, 아직도 대성전(大成殿), 동서무(東西廡), 명륜당(明倫堂) 등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관리가 허술해서인지 여기저기가 조금씩 훼손되어 가고 있었다.

  여기 화개산 중턱에는 범꼬리가 자생하고 있으며, 그리고 정상 부근으로 올라가서 범부채가 분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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