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월간문학 시조월평 '맵시와 솜씨, 그 아름다움'

시조시인 2008. 9. 10. 01:18

(월간문학 시조 월평 2006년 12월 )


                                               맵시와 솜씨, 그 아름다움


                                                               김 재 황


  시조는 무엇보다 먼저 정형시로서의 모습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외형률이 ‘맵시’다. 모두 알다시피, 시조는 3장6구로 되어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기본율이 정해져 있다. 물론, 이 기본율은 고집불통이 아니다. 내재율을 잃지 않는 범위에서 얼마큼은 글자 수의 가감이 자유롭다. 이러한 신축성에서 멋과 맛이 아름답게 살아난다.

 다시 말해서 시조는 글자 수만 맞춘다고 모두 되는 게 아니다. 틀에 억지로 넣으려고 해서는 안 되고, 곱게 사려 담아야 한다. 그래야 내재율이 제대로 자리를 잡게 된다. 이 내재율이 바로 ‘솜씨’다.

 11월호에 실린 작품 중에서 첫 번째로 눈에 띄는 작품을 본다.


 장광에는 항아리들

 옹기종기 모여 있고

 큰방에선 도란도란

 굵고 가는 목소리들


 뜨락엔

 흩어져 있는

 크고 작은 신발들.

   -정태모 ‘이사오던 날’ 전문

    

 이 작품은 외형률을 조금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안으로 사려 담은 내재율은 또 얼마나 멋진가.

 ‘장광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항아리들’과 ‘큰방에서 도란도란  들리는 굵고 가는 목소리들’이 아주 멋진 대비를 이룬다. 초장의 ‘장광’과 중장의 ‘큰방’이 서로 어울리는가 하면, 초장의 ‘옹기종기’와 중장의 ‘도란도란’이 나란히 선다. 이러한 구성은 독자들에게 큰 즐거움을 선사한다.

 하지만 감동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종장으로 가면, 앞의 구로 ‘뜨락엔 흩어져 있는’을 앉힘으로써 초장(옹기종기)과 중장(도란도란)의 아기자기한 분위기를 일시에 감아서 넘겨 버린다. 그런 후에 시치미를 뚝 떼고 ‘크고 작은 신발들’로 마지막 구를 장식하고 있다. ‘시치미를 떼었다’라고 말하는 이유는, 종장의 앞 구에서 그리 한 번 메어꽂은 후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중장에서 나타낸 ‘굵고 가는’에 맞장구를 치어 종장의 마지막 구로 ‘크고 작다’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장과 중장은 붙인 반면에 종장만 떼어 놓고 있다.

 그리고 또 하나를 눈여겨보아야 할 게 있다. 종장의 마지막 구가, 가장 이상적인 ‘4 ․ 3’의 글자 수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초장과 중장의 기본율이 모두 ‘3 ․ 4’로 되어 있는데, 종장의 마지막 구는 왜 ‘4 ․ 3’으로 되어 있는 걸까? 그 이유가 분명히 있다. 이를 ‘逆進’이라고 한다. 이는, 끝을 오므림으로써 탄력과 긴장감을 주고, 그 느낌이 긴 여운을 이끌도록 만든다. 다른 작품을 본다.


 맑은물 졸졸 흐르는

 청계천 시오리 길


 머리에 서리이고도

 콧노래로 걸어갔다


 인왕산

 엷은이내가

 꽃보라로 걸려 있다.

          -정위진 ‘淸溪川’ 둘째 수


 이 작품도 안팎으로 모두 아름답다. 여기에서 초장의 앞 구인 ‘맑은물 졸졸 흐르는’은, ‘전에는 더러운 물이 흘렀으나 지금은 깨끗한 물이 흐르고 있다’는 뜻이 담겨 있다. 그리고 초장 뒤의 구에서는 ‘청계천 시오리 길’이라고 했다. 이 ‘시오리 길’이란 말은, 그냥 ‘길’이 아니라 ‘산책 길’임을 암시한다. ‘시오리 길’은, 분명 짧지 않은 길이지만, 친구와 다정히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 보면 금시에 다다르는 길이기도 하다. 만약에 그 길을 ‘몇 킬로미터의 길’이라고 했다면 얼마나 재미가 없었겠는가. 그리고 중장으로 가서 ‘머리에 서리이고도’는, 그 곳이 젊은이들이 많이 찾고 있는 명소가 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그렇기에 젊은이들 틈에 끼어서 시의 화자가 걸어갔을 터이고, 그렇게 걷고 있노라니 나이가 많다는 사실도 잊고 ‘콧노래’가 나왔을 성싶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청계천의 맑은 물은 인왕산으로부터 흘러와야 마땅한 일이다. 그런데 그게 그렇지가 못하다. 그 때문인지, 종장은 ‘걷다 보니 어느새 해질 무렵이 되어 인왕산 엷은이내가 꽃보라로 걸린다’라고 되어 있다.  자줏빛 아픔이 느껴진다. 또 한 작품을 본다.


 눈쌓인 남산 오르막

 무릎까지 빠지면서


 마음이나 씻을까 하고

 고행하듯 올라가면


 하르르

 눈꽃이 져서

 면류관을 씌워준다.

         -정위진 ‘雪日’ 전문


 이 작품 역시 ‘맵시’와 ‘솜씨’를 겸비하고 있다. 초장을 보면, 시의 화자가 가고 있는, 그 곳 상황을 환하게 짐작할 수 있다. 남산에는 눈이 쌓여 있고, 또 가파른 오르막인데, 눈이 얼마나 많이 내렸는지 무릎까지 빠진다.

 왜 그토록 무릎까지 빠지는 오르막을 오르려고 하는가? 그 답은 중장에 있다. ‘마음이나 씻을까’하고 오르는 중이다. 그런데 그 다음 구에서 ‘고행, 즉 수행하듯 오른다’라고 했다. 종장을 보면, 그 마음을 알고 눈꽃이 지면서 ‘면류관’을 씌워 준다.

 사실, 시조는 우리글을 가지고 짓기에 안성맞춤인 틀을 지니고 있다. 그 틀에만 자연스럽게 맞추어 나가면 절로 내재율을 얻게 된다. 그렇기에 여기에는 민족혼이 담겨 있고, 그래서 시조를 ‘民族詩歌’라고 말한다. 그렇다. 시조는 우리 정신의 본향이고 우리 민족의 숨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