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황금찬 시인과 동자꽃

시조시인 2005. 10. 3. 07:31
 

                               동심으로 피어나는 동자꽃



                                                김 재 황


 깊은 산의 숲속에서 천진스런 얼굴로 가득 미소를 머금고 피어나는 꽃. 한여름에 더위를 피해서 산을 올랐다가 만나게 되는 이 동자꽃은, 보는 이로 하여금 반가운 미소를 절로 짓게 한다. 그래서 누구나 금방 착한 마음을 갖게 한다. 그게 바로 불심(佛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런데 우리 나라에는 이 동자꽃과 같은 순수한 이미지의 시인이 있다. 부드러운 미소와 잔잔한 음성, 그리고 긴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는 홍안(紅顔)의 얼굴을 지닌 노시인(老詩人). 바로 그 이름, 황금찬 시인이다.

 한국시대사전(을지출판공사)에서는 황금찬 시인의 ‘시 세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그의 시는 처음부터 끝까지 소박하고 진솔한 감정과 맑고 투명한 신앙적 고백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만큼 그의 시적 관념이나 이미지의 성격은 투명하다고 할 수 있다. 달리 말해서 그의 시는 사랑과 순결의 투명성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또 하나의 특징은 지금까지 보아 온 종교적 인식에 근거한 사랑과 화합의 내용과는 달리, 낭만적 서정성이라 할 수 있다. 사랑과 평화와 자유와 아름다움이 압축된 단순미와 소박미의 ‘시 세계’가, 혹 구조적 분석에 치중하는 현대시학의 시각에 다소 소홀히 잡히는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만년 동안(童顔)의 이 노시인은 여전히 조용한 음성으로 믿음과 사랑의 시를 꾸준히 쓸 것으로 믿어진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황금찬 시인의 신앙은, 불교가 아니라 기독교이다. 그러나 믿음의 그 근본에는 차이가 있을 리 없다. 나는, 황금찬 시인의 작품을 대할 때마다 그 순수성에 동자꽃을 떠올리게 되고, 문인들 모임에 나갔다가 만나게 되는 황금찬 시인의 그 소박한 얼굴에서 또 한 번 동자꽃을 생각하게 된다.

 동자꽃은 산지의 숲 속에서 자라는 여러해살이풀인데, 특히 강원도와 경기도 산간 지방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잎은 마주 나고 자루가 없으며 타원형으로 양쪽면과 가장자리에 털이 있다. 강원도에서 많이 만날 수 있는 동자꽃. 황금찬 시인의 고향도 강원도이니, 이 또한 우연의 일이 아닌 성싶다. 황금찬 시인은 1918년 8월 10일 강원도 속초시 노산동 45번지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는 그 고향에서 오래 머물지를 못했다.

 

 “내 어린 날의 고향은 강원도 속초이지만, 집안이 하도 가난하여 고향에서는 도저히 살 수 없게 되어서 할 수 없이 피난 봇짐 같은 보따리를 꾸려 가지고 정처 없는 길을 떠났던 것이지요. 고향을 잃은 사람들에게 어찌 갈 곳인들 있었겠습니까만, 그래도 첫 번째의 목표지는 북간도였어요. 유랑민처럼 흘러가다가 발이 멎는 곳이 함경북도 성진이었지요. 그것도 어산동 밑의 승지굽에 호막을 짓고 그 곳에서 살았습니다.”

 

 하지만 황금찬 시인은 고향 강원도를 결코 잊을 수가 없다. 결코 그 동해 바다를 잊지 못한다.

 

 “바다는 구름의 깃발을 날리며 내게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내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면 바다는 내 작은 발자국을 메우며 발을 쫓아오고, 그러다가 내가 발을 들고 바다를 몰아 쫓아가면 바다는 깜짝 놀라 저만치 달아나고 말지요. 파도가 멎은 아침이면 자갈밭에 밀려나오는 미역이며 다시마-----. 그것들을 씹으며 보낸 세월. 나는 그 바다를 잊지 못합니다. 지금도 갈 수만 있다면 바다가 바로 발 밑으로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앉아서 흘러간 사람들의 추억을 더듬어 보겠어요. 바닷가에 나서, 바닷가에서 살다가 바닷가에서 죽은 ‘희라’를 생각하겠어요. 나는 당시 ‘희라’를 바다만큼 사랑했었지요. 그가 남겨 놓은 그의 작은 손가락의 지문은 바다의 추억과 같이 지금도 내 가슴속에 남아 있습니다.”

 

 아, 그랬었구나. 그 아픔의 슬픈 빛깔이 동자꽃에도 묻어 있었구나. 동자꽃의 꽃빛깔은 황색이 섞인 붉은 빛이다. 이를테면, 웃고 있는 듯하지만 그 안에 슬픔을 머금고 있다는 말이다. 그것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노을빛 슬픔을---. 황금찬 시인은, 바다만큼 사랑했던 ‘희라’를 잃었고 9살 난 막냇동생 ‘희찬’을 잃었으며, 대학 졸업을 앞둔 딸 ‘애리’를 잃었다. 그렇듯 엄청난 슬픔을 겪었으면서도 그처럼 온화한 표정을 지을 수 있는 것은, 다만 그 가슴에 진실한 믿음을 지니고 살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동자꽃처럼 밝은 얼굴이 되었으리라. 

 동자꽃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꽃잎 가장자리에 잔 톱니가 있고, 그 가운데가 깊게 둘로 갈라진다. 꽃받침은 긴 통처럼 생겼는데 그 끝이 다섯 개로 째졌다. 털이 있어서 어린 티를 보인다. 수술은 10개, 암술은 1개이나 암술대는 5개를 지녔다. 얼핏 보면, 그 꽃이 수레바퀴처럼 보이기도 해서, 먼 옛날로 상상의 여행을 떠나게 한다.

 

 옛날, 설악산 골짜기의 조그만 암자에서 스님과 동자가 단둘이 살고 있었다. 그런 어느 겨울 날, 스님은 어린 동자를 암자에 남겨 놓은 채, 산 밑의 먼 마을로 시주를 구하러 떠났다. 그런데 그만, 스님이 마을에 내려간 사이에 많은 눈이 내렸다. 스님은 속히 암자로 돌아가지 못하고, 이듬해 봄이 되어 눈이 녹고 나서 야 산으로 오를 수 있었다. 암자가 보이기 시작했을 때였다. 그 앞 길목에 동자가 앉아 있었다. 스님은 반가웠다. 부리나케 달려갔다. 하지만 이를 어쩌랴,  동자는 이미 숨을 거둔 채 몸이 얼어 있었다.  스님은 슬퍼하며 동자의 무덤을 그 자리에 만들었는데, 어느 해부터인가 그 무덤 가에 동자의 얼굴을 닮은 동자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이처럼 동자꽃이 굶어 죽은 동자의 무덤 가에서 피었다는 전설을 지니고 있기에, 가난했던 어린 시절이 회상된다. 그런 가난은 황금찬 시인의 시 ‘보릿고개’에도 잘 나타나 있다.


 보릿고개 밑에서/ 아이가 울고 있다/ 아이가 흘리는 눈물 속에/ 할머니가

울고 있는 것이 보인다/ 할아버지가 울고 있다/ 아버지의 눈물, 외할머니의

흐느낌/ 어머니가 울고 있다/ 내가 울고 있다/ 소년은 죽은 동생의 마지막/

눈물을 생각한다.                    

                                     --------- 작품 ‘보릿고개’ 첫연

 

예전에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난했었지만, 황금찬 시인에게는 그 가난이 더욱 컸었던 듯싶다.

 

 “내가 보통학교에 다닐 때에는 한 번도 월사금(月謝金)을 제 기일에 낸 일이 없었습니다. 그래 월사금 독촉을 받고 그래도 못 내면 학교에서 쫓겨오는 것이지요. 그렇게 쫓겨오는 일을 수없이 당했습니다. 그때 한 달 월사금이 40전이었어요. 그 40전이 없어서 쫓겨오는 것이지요. 그만하면 내 어린 날의 생활을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내가 하도 여러 번 학교에서 쫓겨오니까, 부모님께서도 민망하여 없는 돈을 마련하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다하시는 것이었지요. 수중에 없는 돈이니 남의 집에 가서 빌리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어요. 나는 그날 학교에 가면 또 쫓겨올 것이 확실하였으니까요. 그래 이른 아침부터 어머니께 청을 드렸지요. 어머니는 하도 딱하니까 이른 아침 이웃집 ‘김생금’이라는 목수 집에 돈 40전을 꾸려고 가셨습니다. 이른 아침에 여자가 재수 없이 남의 집에 돈 꾸러 왔다고 얼마나 욕설을 퍼부었던지, 어머니는 젊은 사람에게서 창피만 당하고 돌아오셨지요.”

 

 그 후에 황금찬 시인은 이 이야기를 시(詩)에 담았다.

 

 욕구 불만으로 우는 놈을/ 매를 쳐 보내고 나면/ 나무 가지에서 노래하는

새소리도/ 모두 그놈의 울음소리 같다.// 연필 한 자루 값은 4원/ 공책은

3원/ 7원이 없는 아버지는/ 종이에 그린 호랑이가 된다.// 옛날에 내가/

월사금 40전을 못 냈다고/ 보통학교에서 쫓겨오면/ 말없이 우시던/ 어머니의

눈물이 생각난다.// 그런 날/ 거리에서 친구를 만나도/ 반갑지 않다/ 수신

강화 같은 대화를/ 귓등으로 흘리고 돌아오면/ 울고 갔던 그놈이 잠들어

있다/ 잠든 놈의 손을 만져본다/ 손톱 밑에 때가 까맣다.

                              -------- 작품 ‘심상’ 중 1, 2, 3, 4연


이 시에는 재미난 일화가 있다. 황금찬 시인은 이 시를 영역하여 몇몇 시인과 함께 작품집을 엮어서, 어느 나라에선가 열리는 세계시인대회에 가지고 갔는데, 이 시를 읽은 외국의 여류 시인 두 사람이 우리 나라 시인들이 모여서 환담을 나누고 있는 자리로 찾아와 물었다.                    

 “어느 분이 한국에서 오신 황금찬 시인이신가요?” 

 한 사람이 황금찬 시인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이 분이 황금찬 시인입니다.”

 그러자, 외국의 두 여류 시인들은 별안간 눈물을 펑펑 쏟으며 황금찬 시인을 와락 껴안았다.

 “세상에 그처럼 아름다운 시가 있다니요? 정말로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나는, 시를 공부하려는 사람과 자리를 함께 할 때마다, 이 이야기를 반드시 들려주곤 한다. 시는 손으로 쓰는 게 아니라, 가슴으로 써야 한다고. 그리고 남에게 감동을 주지 못하는 것은, 시(詩)가 아니라 넋두리에 불과하다고. 시인이라면 그 모두가 황금찬 시인처럼 순수성을 지녀야 한다고, 나는 말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청중의 가슴에 울림을 줄 수 없을 테니까. 울림을 줄 수 없는 시(詩)는, 이미 생명을 잃은 넋두리에 불과할 테니까.  

 나는 황금찬 시인을 좋아한다. 동자꽃처럼 순수한 그 얼굴 표정에서부터 온화한 그 말소리에까지 모든 것을 좋아한다. 하물며 그 아름다운 영혼을 만날 수 있는 시에서야 더 말해 무엇하랴.


 밤에 눈을 뜬다/ 그리고 호수 위에/ 내려앉는다.// 물고기들이/ 입을

열고/ 별을 주워먹는다.// 너는 신기한 구슬/ 고기 배를 뚫고 나와/

그 자리에 떠 있다.// 별을 먹은 고기들은/ 영광에 취하여/ 구름을 보고

있다.// 별이 뜨는 밤이면/ 밤마다 같은 자리에/ 내려앉는다.// 밤마다

고기는 별을 주워먹지만/ 별은 고기 뱃속에 있지 않고/ 먼 하늘에 있다.


                                    --------- 작품 ‘별과 고기’ 전문


 이 얼마나 아름다운 시인가. 진실한 영혼이 그 얼마나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이는가. 순수한 동자의 모습은 이 한 편의 시에서도 만날 수가 있다. 초롱초롱한 별빛 눈을 뜨고서 믿음의 저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동자의 모습, 그게 바로 황금찬 시인의 모습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황금찬 시인의 부친 또한 진실한 기독교인이었는데, 한 번은 그 마을 교회로 초청되어 온 부흥교회의 대접을 그 부친이 자청한 적이 있었다 한다. 황금찬 시인은 그 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 그런 귀한 분의 대접이라면 그래도 어느 정도 준비가 있어야 하는데 우리 집의 경우에는 준비할 돈도 없고 그야말로 소금 반찬 그대로였습니다. 저녁 대접을 받기 위해 우리 집을 찾은 분은 모두 네 분이었지요. 길선주 목사, 김선두 목사, 그리고 노장로 두 분이었어요. 교회에서 3킬로미터쯤 떨어진 길을 걸어 찾아온 목사와 장로들을 진심으로 반갑게 맞이하였습니다. 우리 집은 구들 자리가 때묻고 다 해진 단칸방에 도배도 하지 않아 흙냄새가 풍기고 있었지요. 손님을 모시기에는 너무나 초라하고 창피한 그런 집이었어요. 예의를 모르거나 철면피가 아니면 그런 집으로 손님을 오시랄 수는 도저히 없을 그런 환경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 부끄러움도 잊으시고 감히 귀한 손님을 청하신 것입니다.”

 

 동자꽃은 높은 산 숲속에서 산 아래쪽을 내려다보며 꽃을 피운다. 지금도, 시주를 구하러 간 스님을 기다리고 있는 동자의 모습으로. 그래서 꽃말 또한 ‘기다림’이다. 황금찬 시인이 아직도 소중히 가슴에 간직하고 있는 일기가 있다. 그것은 6.25전쟁 당시에 황금찬 시인을 기다리며 쓴 부인의 일기 한 구절이다.

 

 ‘까치가 울기를 기다렸습니다. 들에도 까치, 산머리에도 까치는 많았지만 제가 기다리는 까치는 집 앞 나뭇가지에 와서 울어 주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아침에 까치 두세 마리가 날아와 집 앞 오동나무 가지에 앉기는 했지만 한 번도 짖어 주지 않았습니다. 꼭 짖어 주어야 할 까친데 짖지 않으니까 이번에는 제 편에서 울게 되더군요.’

 

 1.4후퇴가 시작되며 동해를 따라 남쪽으로 피난의 길에 오른 그들 부부는, 뜻하지 않게 약 1년 가까이 흩어져 살게 되었다. 강원도 삼척 오분리라는 곳에 부인과 세 아이를 남겨 놓고 황금찬 시인은 1군단 종군작가가 되어 있었다.

 전황이 어떻게 변할지도 모르면서 그냥 머물러 있었다. 만약 국군이 적에게 밀린다거나 아니면  아군이 적을 밀고 북진한다거나 하면 그 때는 후퇴를 하든지 아니면 북진하여 고향으로 가든지 두 가지 중의 하나를 택해야 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가장은 전장 속에 가족을 두고 돌아올 줄 모르니, 가장을 기다리는 그 마음이 얼마나 컸겠는가.

 동자꽃이 홍안을 들고서 웃고 있는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그 표정이 너무나 밝고 천진스러워 절로 미소를 떠올리게 된다. 그래서 동자처럼 순수해지는 듯하다. 한편, 동자꽃이 그 붉은 빛이 도는 슬픔의 입술을 깨물고 있다고 느껴질 때면, 그 아픔이 내게로 전해져 와서 더할 수 없는 연민의 정을 안게 된다. 여하튼 그 어떤 의미로든지 순수하고 착하다는 데에는 별 차이가 없다. 그래서 나는 동자꽃을 만날 때마다 황금찬 시인을 생각하게 된다.       

  

'평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림평  (0) 2007.04.18
치미는 동병상련의 아픔  (0) 2005.11.13
평론9  (0) 2005.09.22
평론8  (0) 2005.09.22
평론7  (0) 2005.0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