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미는 동병상련의 아픔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
---기형도의 ‘빈 집’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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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 시인의 작품 '빈 집'은 그 제목부터 나를 슬프게 한다. '시인'이란, '시'를 자기의 목숨보다도 더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시와 백년가약(百年佳約)을 맺은 사람이다. 너무나 끔찍이 사랑하기에, 시를 위해 죽을 수는 있을지언정, 시를 내세워서 돈을 벌 생각은 추호도 없다. 더군다나 시는 너무 순결하고 진실하기 때문에, 작은 아픔에도 몹시 괴로워한다. 아마도, 시인이 시인답지 못한 행동을 한다면, '시'는 아무런 미련 없이 그 곁을 훌쩍 떠나 버리리라.
그 어려운 삶을 더 버틸 수 없게 된 시인은, 그 '詩의 집'을 이제 떠나려고 한다. 그가 떠나고 난 후, 누구도 그 집으로 와서 그처럼 어려운 삶을 이으려고 하지 않을 게다. 그러니 '빈 집'으로 남을 수밖에.
작품 첫 행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에서 '나는 쓰네'가 무겁게 내 가슴을 누른다. 그 '유언장'을, 내가 지금 읽는다. 그는 '짧았던 밤들' '겨울안개들' '촛불들' '흰 종이들' 그리고 '열망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보낸다. 물론, 이들은 모두가 시인의 삶과 관련되어 있다. 아니, 시인의 가까운 벗들이다.
그리고, 일곱번째 행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를 읽으며, 나는 눈시울을 붉힌다. 아, 기형도 시인의 삶이 얼마나 암담했으면, 그렇듯 장님처럼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려고 했을까.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아픔이 울컥 치민다. 더 나아가서 마침내, 마지막 행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는, 참고 있던 내 눈물을 기어이 흘리게 만들고야 만다. 시인은 떠날 때, 그가 목숨을 다하여 사랑했던 시를 결코 데려갈 수가 없다. 그 '가엾은 내 사랑'(詩)을 빈 집에 가두어 놓고 홀로 떠나는 시인의 애절한 마음이 이 작품에 잘 나타나 있다. (김재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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