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롭게 일어서는 칼잎용담
김 재 황
여름의 지독했던 더위가 서서히 꺾이면서 서늘한 바람이 불기 시작할 때쯤, 단풍잎 서럽게 물들어 가는 산골짜기에서 아픔을 가득 머금고 피어나는 꽃이 있다. 그 이름은 칼잎용담.
물론, 칼잎용담은 용담과 닮았지만, 꽃이 용담보다 크고 잎새가 가늘고 길쭉하다. 그래서 언뜻 보면, 그 잎새가 칼을 뽑아 들고 있는 듯하다. 그 반면에 꽃봉오리는 붓의 형상을 보인다. 그렇듯, 무(武)와 문(文)을 겸비한 형상이라니, 나는 문득 그 모습에서 류제하(柳濟夏) 시인을 떠올린다.
류제하 시인이야말로, 한 손에는 비평의 예리한 칼을 들고, 또 다른 손에는 창작의 꼿꼿한 붓을 들지 않았던가. 197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조 ‘불꽃놀이’가 당선되었고, 1986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평론 ‘어둠의 미학’이 당선된 그는, 시인과 평론가의 길을 열심히 걸었다.
“1969년 초여름의 어느 화창한 날이었습니다. 명동 성당 구내에 있던 카톨릭 출판사 편집실엘 갔더니, 뜻밖에도 제하 형이 우두커니 앉아 있는 것이었어요. 그 무렵의 나에게는 류제하라는 이름마저도 다소 낯설었지요. 그러나, 그의 첫인상은 오늘날까지도 지워지지 않을 만큼 강렬한 데가 있었습니다. 한 말로 말해서, 그는 청순하고 예리했어요. 그 때, 그는 서른 고개에 오른 청년이었는데, 그는 그 나이에 걸맞지 않게 마냥 해사한 소년다운 분위기를 풍기는 것이었습니다. 처음 만나던 그 날, 그는 시종 말이 없었어요.”
그의 가장 가까웠던 벗, 박경용 시인의 말이다. 청순하면서도 예리한 청년. 류제하 시인은 이처럼 객관적으로 칼잎용담의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붉은 잎 하나가 시퍼런 칼이 되어 엉성한 내 가슴을 정신없이 찌른다//
나 하나 바로 세우지 못해, 아 50년이 무너진다// 터진 맨몸 위로 번지는
너의 입술/ 허물어진 내 영혼이 기를 쓰고 밀어낸다/ 한번도 쏜 적 없는
화살이 치욕으로 떨고 있다.
----------- 작품 ‘칼’ 전문
이 작품은 ‘광인일기 25’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바로, 류 시인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칼잎용담은 중부 지방 이북의 추운 지역에서 자라는 여러해살이풀이다. 줄기가 곧게 서는 모양을 보이므로, 선비적인 깐깐한 면모를 느낄 수 있다. 게다가 가지가 갈라지지 않으므로 더욱 그렇다. 키도 용담보다는 훨씬 커서, 우뚝함을 보인다. 칼을 닮은 잎은 마주 나고 자루를 지니지 않는다. 그런데 밑부분의 잎이 비늘같이 작은 반면에, 위로 올라갈수록 큰 잎을 보인다. 이 잎사귀를 보고 있노라면, 어쩐지 예사롭지가 않다. 왜 그럴까. 류제하 시인의 성장 과정과 무관하지 않을 듯한 예감이 자꾸만 나를 사로잡는다.
류제하 시인은, 본명이 중하(重夏)이고, 1940년 경북 안동군 풍천면 하회동에서 출생했다고 알려져 있다. 하회(河回)라면, 하회탈로 유명하고, 청백리(淸白吏)였던 유성룡(柳成龍) 선생이 성장한 고장이다. 하지만 하회는 류 시인의 출생지가 아님을, 나는 알고 있다. 그는 일본에서 출생하였으며, 바로 대구로 나와서 고등학교를 그 곳에서 마쳤다. 사실은 출생지야 그리 중요하지가 않다. 하회는 류 시인의 선조들이 대대로 살아온 곳이니, 그의 고향임에 틀림이 없다. 나 또한 지금의 심양(瀋陽)인 만주국 봉천(奉天)에서 태어났으나, 보통은 고향인 파주에서 출생했다고 적고 있지 않은가.
류제하 시인은 초등학교에서부터 고등학교까지를 어머니 밑에서 고학으로 마쳤다. 고등학교 1학년 때에 아버지가 일본에서 귀국을 하셨지만, 그 이듬해에 홀연히 세상을 떠나시고 말았다. 칼잎용담의 비늘 같은 아랫잎처럼, 그 청소년 시절의 어려움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류제하 시인의 아버님은 순수한 분으로서 남을 잘 믿으셨기에 남에게 속임을 많이 당하셨다고 한다. 그렇건만 곧 훌훌 털어 버리시는 넓은 가슴을 지니셨고, 꿈이 많고 자상하신 성품이셔서 어린 아들을 곧잘 자전거에 태우고 다니셨다고 전한다. 단 하나 흠이라면, 술을 너무 좋아하셨다는 정도라고 할까.
그리고 어머님은 인텔리시고 특히 고전을 많이 아시고 계셔서 아들들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한다. 아무래도 류제하 시인은 그 어머님의 그런 영향을 많이 받은 성싶다.
류 시인은 사형제 중 둘째였다. 그는 단 하나인 형과 그 정이 각별했다. 그는 어렸던 한 때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여름날 저녁, 형과 함께 살평상을 바깥마당에 내다 놓고 나란히 누워서 하늘을 보며 별을 헤곤 했지요. 그러고는 가람 이병기 선생님의 시를 같이 웅얼거리기도 했어요. 처음에 형이 혼자서 ‘바람이 서늘도 하여 뜰앞에 나섰더니’하고 외면, 나는 얼른 화답하듯이 ‘서산 머리에 하늘은 구름을 벗어나고’ 하며 뒤를 잇지요. 그 때 놀란 듯이 벌떡 일어나며 형은 내게 물었어요. 네가 어떻게 그 시를 아느냐고요. 그러나 난 형의 책을 몰래 빼다가 읽곤 금방 외워 버렸다고 고백하지 못했지요. 형 몰래 책을 빼다 본 죄 때문에……. 해서, 그저 겸연쩍게 웃고 말았어요. 형은 그런 내가 기특해서 못 견디겠다는 눈으로 잠시 그대로 내려다보다가 엉거주춤 일어선 자세에서 한 손을 들어 내 머리에 꿀밤 하나를 먹였지요. 그러나 하나도 아프지 않았어요. 그 다음부터는 으레 합창하듯이 그 시를 외는 저녁이 많았어요.”
형제가 다정하게 나란히 앉아서 시를 외고 있는 모습이 참으로 평화롭게 떠오른다. 시인으로 태어난 그의 천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를 본격적으로 문학의 길로 들어서게 한 것은, 그의 스승이셨던 이산(怡山) 김광섭(金珖燮) 교수가 아니었던가 한다.
“대학 2학년 때였나 봐요. 아스토리아 호텔에서 문학의 밤이 있었는데 그 때 저는 ‘청계천 주변’이라는 40행 가까운 시를 낭독했었지요. 그 시는 복개된 청계천 주변 판자촌의 실상과 서민들의 애환을 저 나름대로 음각으로 묘사한 것이었어요. 그날 밤 축제가 끝나고 교수님들을 모시고 선후배가 함께 잔을 나눌 수 있는 좋은 자리가 명동 학사주점에서 있었지요. 그 때 이산(怡山) 선생님은 옆에 앉은 선배들을 그대로 둔 채 굳이 저만을 찾으셨어요. ‘청계천, 청계천 어디 있나?’ 제 이름을 미처 기억해 내지 못하셔서 그렇게 부르셨으려니 싶으면서도 쿵 쿵 뛰던 제 가슴, 그리고 옆에 가 앉기 바쁘게 ‘유군, 자네 그 청계천 주변……’ 하시며 격려와 충고를 해 주실 때의 그 벅찬 희열. 사실 그 때까지도 저는 방황하고 있었다고나 할까요, 내 자신을 믿지 못하고 있었지요. 그러한 저에게 직접 자극을 주어 시에 보다 접근할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저에게 주셨습니다.”
분명, 그가 성장하면서 문학에 대한 발돋움을 한 것은, 위로 올라갈수록 커지는 칼잎용담의 그 잎이 잘 설명하고 있을 듯싶다.
칼잎용담은 늦여름에서부터 꽃이 피기 시작한다. 꽃봉오리는 붓을 닮았지만, 일단 꽃이 피어나면 종(鐘)을 닮는다. 가난한 사람들의 가슴에 울림을 주는 종. 그것 또한 시의 역할이기도 하다. 꽃빛깔은 자줏빛. 끝이 다섯 쪽으로 벌어진다. 수술은 5개, 암술은 1개. 열매는 삭과(蒴果)여서 둘로 갈라진다.
그 꽃빛깔을 보면 왠지 아픔이 전해져 온다. 오랫동안 병고에 시달려 온 류제하 시인과 너무 닮아서일까. 고등학교 2학년 때 늑막염으로 시작된 병이, 그가 대학 2학년생이 되었을 때는 폐까지 나쁜 상태로 발전하였다고 한다. 그는 병마와 싸우며 학업을 계속했다.
경희대학교 국문과를 거친 후에 홍익대학교 사범대 국어교육과 및 동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다. 그런 중에도 그는 시를 계속 써서, 1969년에 시조문학에서 ‘원정의 노래’로 천료를 했고, 두 신문의 신춘문예에서 시조와 평론의 당선을 따냈다. 그리고 늦었지만, 그가 37살이 되던 해에는 29살의 아름다운 신부를 맞아서 보금자리를 만들었다. 하지만 병마는 끊임없이 따라다니며 그를 괴롭혔다.
창 밖에 매달리는 끈끈한 불안들을/ 간호원이 재빨리 눈으로 지워준다/
한 가닥 매캐한 바람이 긴 복도를 서성댄다// 아, 백합 한 송이/ 새도록
지켜 앉아// 더덕더덕 돋아나는/ 갈증을 풀고 있다// 창백한 빌딩을 열고/
아침해가 달려 온다// 곳곳에 흩어진 가난한 웃음들이/ 푸짐한 생을 안고/
다투어 일어서고// 끝 없이 틔는 하늘이/ 가슴으로 넘친다.
----------- 작품 ‘입원’ 전문
나는 류제하 시인과 직접 만나서 담소를 나눈 적이 한 번도 없다. 다만, 나는 그에게 세 번 서신을 보냈고, 나 또한 그에게로부터 3통의 편지를 받았을 뿐이다. 그러나 나는 그와 십년지기가 되는 것 같은 우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가 나에게 보내준 첫번째 편지는, 1990년 3월 24일자의 것이었다.
“완연한 봄입니다. 창 밖의 목련에도 봄이 와 앉아 있습니다. 계절은 어김없이 제 몫을 다하고 있나 봅니다. ‘비 속에서 꽃 피는 꽃치자나무’. 귀한 에세이집, 저한테까지 배려해 주신 데 대하여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귀한 작품집 받고도 제 때에 회신 드리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죄송하기 그지없습니다.
사실은 그간 병원 신세를 좀 지고 나오느라 그리 되었습니다. 요즈음도 별로 좋은 상태는 아닙니다. 그래서 제 때에 감사의 말씀조차 드리지 못했습니다.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인데 저도 털고 일어나야지요. 선생님의 작품 읽으며, 삶을 새롭게 가꾸는 자세를 가져 봅니다. 아무쪼록 강녕하시옵고, 좋은 글 많이 보여 주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나는 곧, 류 시인의 쾌유를 비는 답장을 보내면서 내 시집 한 권을 동봉했다. 그랬더니, 류 시인은 1990년 3월 30일자로 또 한 통의 서신을 보내 왔다.
“‘거울 속의 천사’ 감사히 받았습니다. 격려 주시어 정말 고맙습니다. 지면을 통해서나마 익히 서로가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기쁨인지요. ‘서울의 춤’(시조문학 90 봄) 반갑게 보았습니다. 좋은 작품 계속 많이 보여 주시기 바랍니다. 건강 회복되면 뵈올 수 있겠지요. 건강 회복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앓고 있는 중에도 답신을 꼬박꼬박 보내 주는 그 따뜻한 마음에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나는 다른 시집을 동봉해서 그 감사의 뜻을 전했다. 그러자, 류 시인은 또다시 1990년 4월 19일자로 한 통의 편지를 보내 주었다.
“‘바보여뀌’ 귀한 시집, 엮어 내시기 바쁘게 보내 주신 정에 더욱 고마움을, 기쁨을 함께 갖게 됩니다. 들꽃, 풀꽃을 보는 시선과 마음, 그 순수함과 청정함, 사물을 대하는 그 지성, 참으로 놀랍습니다. 수필집 ‘비 속에서 꽃 피는 꽃치지나무’에서도 자연에 대한 따뜻하고 맑은 사랑을 읽을 수 있었지만, (그 속에 있는 시에서도) 이 시집 또한 그 점 더욱 확인케 합니다. 머리맡에 가까이 두고 늘 보렵니다. 건강해지면 밝은 모습으로 뵙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더 이상, 나는 류 시인에게 보낼 책이 없었다. 그래서 부지런히 또 한 권의 책을 내어서 그에게 보내리라 마음먹었다. 그리고 그 때쯤이면, 류 시인도 건강을 완전히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니, 그에게 책을 직접 들고 가서 막걸리라도 나누며 담소해야 하겠다고 벼르고 별렀다. 그랬던 것인데, 뜻밖에도 류 시인이 타계했다는 슬픈 소식을 듣게 되었다. 아, 이 얼마나 애석한 일인가. 그는 9년 동안이나 지병과 싸우면서도 당당했었다. 그는 병원으로 가는 도중에 택시 안에서 절명했을 정도로, 그 아픔을 안으로 참으면서도 결코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았다.
류제하 시인은 문단에 등단한 지 20년이 넘었다. 그러나 그 동안 단 한 권의 시집도 펴내지 않았다. 그가 쓴 시조는 자그마치 2백여 편.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집을 만들지 않은 것은, 스스로에 대한 채찍질인 동시에 시조시인들에게 내리는 무형의 매질이었다고, 정제호 시인은 말한다.
류 시인이 가고 난 1주기(周忌). 부인인 진복희 시인은 그의 첫 시집이자 유고집인 시조선집을 엮었다.
“생전에 자신의 손으로 묶지 못한 채 내게 남겨진 시 편편들 앞에서 그저 막막하고 두렵기만 한 심정이었어요. 한 시인의 23년의 시업(詩業)을 정리한다는 일은 아무래도 벅찬 난제였지요. 오랜 병고 탓이기도 하였겠으나 시집 내는 일에 그다지 급급해하지 않은 것은 시속(時俗)과는 거의 무관하게 살았던, 어찌 보면 오만하기까지 했던 그의 초연한 기질 쪽에 더 많은 이유가 있었던 듯싶어요.”
이어서, 진복희 시인은, 남의 손을 빌리는 일조차 탐탁해하지 않았던 그의 성정으로 미루어 조심스럽기만 한 작업이었지만, 이제는 남은 사람의 몫이라 여겨져 용기를 내어 한 매듭을 지어 놓는다고 말했다. 그 출간 기념회가 광화문 조그만 식당에서 열리던 날, 진복희 시인은 잊지 않고 그 자리에 나를 초대해 주었다.
칼잎용담은 용담과 함께 그 뿌리를 약재로 쓴다. 건위와 해열, 소염, 담즙이 잘 나오게 하는 등의 효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소화불량을 비롯해서 담낭염, 황달, 두통, 방광염, 요도염 등의 치료약으로 사용된다. 남의 아픔을 치료해 주는 마음, 이 얼마나 큰 사랑이며 따뜻한 가슴인가. 류 시인 역시 더할 수 없이 따뜻한 정을 지닌 사람이었다.
“1986년 크리스마스 며칠 전이었어요. 오전에 인터폰이 왔지요. ‘나, 류제합니다. 잠깐 봤으면 해서……’. 나가니 등뒤에서 작은 선물 꾸러미 하나를 꺼내셨어요. ‘이게 뭔데요?’ 송구스러워 물었더니 ‘크리스마스 선물이야. 하늬 아빠 술 많이 마신다며? 향기가 퍽 좋아’ 하셨는데, 돌아와 펴 보니 나무 박스에 담긴 감차(甘茶)였어요. 피를 맑게 하고 술 마신 뒤에도 효과가 있다고 적혀 있었지요.”
소설가 김아라 씨의 회상이다. 아, 그는 지금 저 하늘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시를 쓰고 있을까. 평을 쓰고 있을까. 아니면, 그저 산책을 하고 있을까. 아마도 류 시인은 하늘에서 여행을 즐기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생전에 그는 여행을 좋아했으니까. 류 시인은 특정 지역을 목적지로 정하거나 어떤 방법으로 떠나느냐 하는 따위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저 발길이 닿는 대로 나서 보는 것이라고 했다. 그것은 그가 낮달 같은 그리움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일 게다.
아아, 있었구나 늬가 거기 있었구나 있어도 없는 듯이 그러능게 아니여/
내 너를 잊었던 건 아니여 결코 아니여// 정말 거짓말 아니여 정말/ 해쓱한
널 내가 차마 잊을까 늬 있어 맘 터억 놓고 나만 돌아서겠니// 암, 다아 알고
있어 늬 맘 행여 눈물 비칠까 도사리는 안인 거 울면서 씨익 웃음짓는 늬 심정
다 알아 나// 정말이여 나, 나 설운 게 아니여 정말 조각난 늬 아픈 델
가린다고 모를까/ 이렇게 흐느끼는 건 설워서가 아니여.
---------- 작품 ‘낮달’ 전문
류제하 시인은 종교를 가지지 않았었다고 말하는 이가 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요란하게 믿지만 않았을 뿐, 이미 그는 믿음에 대해서 달관의 경지에 다다라 있었음을 나는 확신한다.
“믿는다는 것은 의지한다는 것이요, 의지한다는 것은 사랑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사랑은 곧 사무사(思無邪)의 절대 경지를 일컫습니다. 이 경지에 이르면 ‘닐바나(Nirvana)’에의 도달이 가능합니다. ‘닐바나’란 무엇인가요? 무애자재(無碍自在)하며 해탈한 ‘열반(涅槃)’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허(虛)에서 실(實)로 이끌며, 암흑에서 빛으로 인도하며 죽음에서 영생으로 구하옵소서. 자기가 놓여 있는 현실, 속세에서 벗어나 구속된 자아를 툴툴 털고 초월 현실에 들면 새로운 인간의 영역이 있는 것이지요. 여기엔 새로운 생명의 탄생이 있어요. 이는 부단한 노력과 수양도 필요로 하지만 그보다는 사무사(思無邪)의 절대 경지가 자아를 통찰할 때 가능해져요. 소아(小我)의 세계와 우리를 싸고 있는 온갖 집착, 또 자타를 막고 있는 온갖 형태의 벽, 생명까지 초탈할 때 그것은 가능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현재 자기 자신을 형성하고 있는 일체의 요소를 완전히 해체해야 ‘닐바나’에 들 수 있는 것이지요. 결국, 불교의 진리는 ‘닐바나’에 도달함을 일컫습니다. 이 진리는 제 힘으로 찾아야만 얻을 수 있고, 행복은 이를 받침해서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다만 마음으로서만 볼 수 있는 거울같이 밝은 것이란 걸 나는 얘기할 수 있을 뿐입니다.“
류제하 시인이 글을 통해서 들려준 말이다. 그가 마음속으로 진실한 믿음을 지니지 않고도, 과연 그가 이런 말을 남길 수 있었을 것인가.
그는 지금 이 순간부터 칼잎용담으로 다시 살아나 우리 앞에 설 것이다. 한 손에는 칼을, 그리고 한 손에는 붓을 든 칼잎용담의 모습으로 홀연히 환생할 것이다. 그래서 가을이면 종소리 은은한 꽃을 피워, 우리를 손짓해서 부를 것이다. 그러면 나는 그를 찾아가리라. 생전에 못 다한 우정을 나누기 위하여, 만사를 제쳐놓고 달려가리라. 아무리 험한 산골짜기라고 해도, 구두끈 단단히 졸라매고 칼잎용담 그 얼굴 보러 가리라.
(도서출판 서민사 간행 '들꽃과 시인'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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