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문을 두드리는 솜다리
김 재 황
높은 산으로 올라가서 하늘문을 두드리는 꽃이여. 산을 열고 침묵을 열고, 그분이 이마를 짚어 주시는 꽃이여. 무한한 하늘의 사랑에 별빛 영혼이 눈을 뜨고 기쁨으로 몸을 떠는 솜다리여.
나는 설악산을 올랐다가 우연히 솜다리를 만나는 행운을 얻었다. 가파른 절벽 위에 피어 있는 그 별빛 눈망울. 하늘을 향해 기도하고 있는 듯한 모습에, 나는 옷깃을 여밀 수밖에 없었다. 한동안 경건한 마음으로 서 있다가, 나는 문득 그 꽃 속에서 웃고 있는 이성선(李聖善) 시인의 얼굴을 발견하였다. 이성선 시인이야말로 ‘하늘문을 두드리는 별빛 시인’이 아니던가. 아무렴. 이성선 시인은 별을 쳐다보며 찬란하게 반짝이는 가난함을 꿈꾸었다.
나도 별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외로워 쳐다보면/ 눈 마주쳐
마음 비쳐주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나도 꽃이 될 수 있을까/
세상일이 괴로워 쓸쓸히 밖으로 나서는 날에/ 가슴에 화안히 안기어/
눈물짓듯 웃어주는/ 하얀 들꽃이 될 수 있을까// 가슴에 사랑하는 별 하나를
갖고 싶다/ 외로울 때 부르면 다가오는/ 별 하나를 갖고 싶다.
--------- 작품 ‘사랑하는 별 하나’ 중에서
“이성선 시인의 시편들은 자연과의 대화를 통하여 우주적 질서의 넉넉한 울림을 노래로 걸러 내는 일을 자임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 시인이란 ‘하늘’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다. 몸은 지상에 있어도 마음만은 항시 하늘을 거니는 사람이다. 말하자면 이성선 시인은 지상에서도 세상을 보고, 하늘에서도 세상을 보는 시인이 되고자 노력하고 있는 셈이다.”
권두환 문학평론가의 평이다. 그처럼 이성선 시인은 하늘의 시인이요, 별의 시인으로 인정을 받았다.
솜다리는 엉거시과에 딸린 여러해살이풀이다. 키는 30cm쯤 되고, 잎은 거꾸로 된 바소꼴이다. ‘바소’는 곪은 데를 째는 침을 말한다. 그렇게 가느다란 잎에다 잎자루도 지니지 않기에, 가난한 그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이 솜다리는 유럽에서 ‘알프스의 별’이라 부르고 있는 ‘에델바이스’와 아주 닮았다. 고독하게 산 속에서 그리움을 머금고 샛별처럼 피어나는 마음의 꽃이다.
솜다리나 에델바이스는 모두 고산식물이다. 솜다리는 우리나라 한라산과 금강산에서만 야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사실은 설악산에서도 만날 수 있다. 설악산은 이성선 시인의 산이다. 이성선 시인의 서재에서 창밖을 보면, 그야말로 설악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는 설악산을 안고 살며, 베고 잠들었다.
이성선 시인은 작품을 통해 ‘설악산은 나의 지붕이다. 지붕 끝으로 밤이면 별이 뜬다. 기왓골 깊이깊이 물소리가 잠긴다.’고 노래했다. 벌써 꽤 긴 세월이 지났는가 보다. 한번은 소설가 남지심 씨가, 이성선 시인을 만나볼 겸 가을 설악산도 구경할 겸, 속초에 가지 않겠느냐고 제의를 해 왔다. 물론, 나는 찬성했다. 가을이 무르익는 11월 중순, 눈발이 내리는 궂은 날씨를 무릅쓰고, 나는 고속버스에 몸을 담고 속초로 달렸다. 남지심 씨와 이성선 시인, 그들과는 속초에서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거의 여섯 시간을 달려서야 속초에 도착했다. 반갑게도 이성선 시인이 터미널에 나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내에서 남지심 씨와 합류한 우리는, 대폿집에서 그 동안의 회포를 풀었는데, 이성선 시인은 한사코 우리를 끌고는 자기 집으로 갔다. 그의 집은 도심에서는 벗어난 한적한 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고, 안내되어 올라간 2층 서재의 창을 통해 설악산의 전경이 손을 내밀면 잡힐 듯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
다음 날 아침은 언제 눈이 왔었느냐 싶게 맑게 갠 날씨였다. 세수를 하고 난, 산뜻한 설악산의 얼굴을 바라보며 우리는 그저 감탄만 연발했다.
이성선 시인과 나는 고려대학교 농학과 동기 동창이다. 학교 재학 때는 문학도로서 교지 ‘고대신문(高大新聞)’에 시를 발표하며 아주 친하게 지냈다. 그러나 그가 학업 도중에 입대를 하게 되어 소식이 그만 끊기고 말았지만. 아무튼 그 당시에 우리는 몇 사람이 함께 문학을 공부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남지심 씨였다.
그 후,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하면서 서로 잊고 지내다가, 1984년 1월, 나는 불현듯 이성선 시인이 그리워져서 그의 주소를 수소문하여 그에게 편지를 띄웠다. 그런데 그는 편지를 받자마자 반가운 답장을 보내 주었다.
‘참 오래 간만에 귀하고 반가운 소식 들었네. 처음은 재황이라는 이름으로 와서 누군가 했더니, 만웅(滿雄)이 자네였구먼. 참 반갑네. 실은 가끔가끔 자네가 생각나곤 했었네. 생각이 나는지 모르겠네만 그 때 대학 때 넷인가가 편지로 시를 써 보내며 평을 실어 보내던 일이 있었지. 자네와 백승돈 그리고 남영자(남지심), 또 나였지. 백승돈은 졸업 후 농산물검사소 시험에 합격하여 그 곳에 근무하고 있으며 남영자 씨는 얼마(몇 년) 전에 여성동아 장편 모집에 당선되어 근래에 여류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는데, 이 곳 낙산사에 자주 들르는 편이고 그 때마다 내게 연락을 주어 두 번인가 만나 본 적도 있는데 중년부인이 되었다네. 그 다음 궁금한 사람이 자네였지. 둘 소식은 알게 되었는데 자네는 통 오리무중이었거든. 가끔 대학 생활을 되돌아볼 때 편지로 시를 보여주고 평하고 하던 동인 아닌 동인 생활, 그 때가 자주 생각나고 또 그 사람들 모두가 그리웠지. 그 때 오랜 시간은 아니지만 매우 중요한 일을 했다고 생각되네. 나도 졸업하고 농촌진흥청 작물시험장 전작과에 있다가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와 지금은 중학교 교사를 하며 글을 쓰고 산다네. 글 쓰는 작업은 고되고 외로운 투쟁이지만 가끔 위안이 되는 때도 있기는 있다네.’
이성선 시인은 1941년 1월 2일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성대리에서 출생했다. 사실, 이성선 시인과는 대학교 동기 동창으로 문학 공부를 함께한 절친한 사이지만, 나는 그의 어린 시절을 잘 모른다. 아니, 아주 모른다. 다만, 그의 작품을 통해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다. ‘삼베실 놓고 밤새 비비는 어머니 무르팍’에서 어머니의 얼굴을, ‘다듬이질 소리 속에 어리신 어머님 어깨가 보이고 할머님 꾸중에 못 이겨 스무 살 어머니의 모습은 제 다듬이질 소리에 후줄근히 비 맞으며’에서 어머니의 시집살이를, 작품 '새와 풀꽃의 면회소'의 '아홉 살 때 가신 아버지, 돌아보고 다시 돌아보며 가신 얼굴'에서 비무장지대 너머에 계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그리고 ‘밭둑에서 나는 바람과 놀고 할머니는 메밀밭에서 메밀을 꺾고 계셨습니다.’에서 할머니의 모습을, ‘마당에 가서 할아버지와 히히덕거리며 팽이를 치고’에서 할아버지의 굽은 허리를 그려보는 게 고작이다.
머슴의 찢어진 옷 속으로 내다보이는 겨울 골목에/ 하늘이 숨어 빛난다/
찢어진 옷 속으로 내다보이는 하늘에/ 별이 내린다/ 찢어진 부분으로 내다보이는 지붕에/ 아침이 새떼를 몰고 내려와 지절거린다/ 어미소가 보이고 장작더미가 보이고/ 검불가리가 보인다.
------------ 작품 ‘고향의 천정2’ 중에서
자연 속의 어린 시절, 아마도 그 체험이 그의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점을 아무도 부정하지 못한다.
이성선 시인은 1970년 ‘문화비평’에 시 ‘시인의 병풍’, ‘목련’, 등 5편을 발표하였고, 1972년 ‘시문학’에 시 ‘아침’, ‘서랍’, ‘합장(合掌)’이 천료되어서 문단에 나왔다.
솜다리는, 7월 경, 가지 끝마다 노란 두상화(頭狀花)를 피운다. 꽃은 노란 빛이지만, 그 꽃 주위에 돌아가면서 흰 솜털이 있는 포상엽(苞狀葉)이 붙어 있어서, 이것이 흰 별처럼 보인다. 어떤 이들은 꽃이 노란 ‘솜다리’보다는 꽃이 잿빛인 ‘왜솜다리’가 더 ‘에델바이스’를 닮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솜다리의 노란 꽃도 가루받이를 끝내고 나면 슬며시 노란 색깔이 없어지므로 별 문제가 없다. 솜다리나 왜솜다리는 모두 설악산에 살고 있다. 솜다리는 외설악에서, 왜솜다리는 남설악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게 조금 다르다. 말하자면, 그 분포지역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는 뜻이다.
높은 산을 고집하는 지고한 성품이라든지, 어둠 속 별을 닮는 아름다운 영혼이라든지, 솜다리와 이성선 시인은 같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그것이 또 자연스럽게 신앙으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이성선 시인의 시세계(詩世界)는 우주를 엿보는 것처럼 신비롭기 그지없다.
“나의 시는 나에게로 가는 문이다. 나의 시는 내 안의 또다른 나를 찾아가는 고행의 발걸음이며 하늘로 가는 문이고 지옥으로 향하는 몸짓이며 동시에 지옥과 천당을 한 몸에 지니고 가는 자의 노래이다. 그분을 찾는 주문, 때로는 그분과 함께 걸어가는 노래이다. 나의 시는 또 그분에게 바치기 위한 이슬 같은 꽃잎이고 타오르는 불꽃이며 기다림으로 아파 우는 울음이다. 이 불꽃과 울음과 호소와 몸부림이 하나의 기도하는 나무로 서 있는 것이 나의 시인 것이다. 시는 내가 쓰는 것이 아니다. 그분이 돌아와 쓰는 것이다. 아니, 그분과 내가 함께 쓰는 것이다. 내 안의 나인 그분과 함께 쓰고 함께 노래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분은 누구인가. 나의 영혼이다. 내 안에 계시는 또 다른 나요, 깨어 있는 자이며 신(神)이다. 그분이 돌아와 계실 때만 나의 시 나의 노래는 시작된다. 나의 육체는 영혼을 받드는 그릇이며 등잔이다. 몸은 맑은 기름이 되어 그분 불꽃을 위하여 조금씩 등잔을 비워 간다. 그분이 지상에 머물러 계시는 동안, 나의 몸은 그분을 모시는 집이요 사원이 된다. 내가 그분을 모시고 함께 시를 쓰고 함께 노래하고 함께 걸어감이 내가 이 땅에 온 최대의 기쁨이요 삶의 황홀함이다. 나의 모든 삶은 이 기쁨과 황홀의 경이감으로 깨어 있을 때에 꽃이 피어나고 아름답게 타오른다.”
솜다리의 그 꽃이 따뜻함을 가지고 있듯이, 이성선 시인의 시선은 따뜻하였다. 이 세상을 아름답게 그는 볼 줄을 알았다. 그렇기에, 그가 보는 세상은 모두가 춤추는 모습이었다.
“과학에서 말하는 별과 별의 운동은, 사람의 온갖 동작은 실은 저 대우주의 리듬을 따른 하나의 춤인 것이다. 거대한 ‘침묵의 춤’인 것이다. 별의 움직임 하나, 새 날아가는 동작 하나, 구름 흘러가는 흐름 하나가 우연인 것은 결코 없다. 자세히 보아라. 이 세상의 모습은 모두 춤임을. 사람의 걷는 모습, 짐승의 뛰는 모습, 달 떠오르고 저녁 놀 피어나는 모습. 이 얼마나 절묘한 우주의 춤인가. 보았는가, 허리 구부리고 들에서 일하시는 그대 아버지 안에는 누가 돌아와 일하시는가를. 부엌에서 밥짓는 그대 어머니 안에도 춤추고 계시는 그분을.”
그래서 김선학 평론가는 이렇게 말한다.
‘그의 시가 가진 독창적이고 상궤를 벗어나는 독특한 심상화는 결국 그가 불가사의한 자연과 우주의 세계를 꿰뚫어 감득하는 직관과 일상의 세계를 맞물리게 하는 능력의 탁월함에서 해명될 수 있는 사항으로 파악된다. 자연 속에 가로놓여 있는 신비하고 불가사의한 요소를 꿰뚫어 일상성과 맞물리게 하는 직관력은 고요하게 시인 자신의 내면을 갈앉혀 명료한 의식으로 인간 존재의 근원을 통찰하지 않는다면 획득될 수 없는 일이다.’라고.
나는 다른 시인이 될 수 없음을 안다/ 풀잎과 마주앉아서 서로 마음 비추고/
남들은 들을 수 없는 그런 이야기로/ 함께 꿈꾸며/ 별을 바라 밤을 지새는/
시인이면 족하여라/ 그것만으로 세상을 사랑한다/ 그와 내가 둘이서/ 눈동자와
귀를 서로의 가슴에 묻고/ 사랑의 뿌리까지 영롱히 빛내며/ 저 하늘 우주의
울림을/ 들으면 된다/ 그의 떨림으로 나의 존재가 떨리는/ 그의 눈빛 속에
내가 꽃 피어나는/ 그것밖에는 더 소용이 없다/ 그렇게 별까지 가면 된다.
----------- 작품 ‘외로운 사랑’ 전문
별을 바라보며 살았던 시인. 그래서 그 영혼이 별을 닮은 시인. 그리고 그렇게 별까지 가면 된다던 시인. 이성선 시인을 만날 때마다, 나는 그 별과 같은 시심에 말을 잃었다. 그 새벽 꽃향기 같은 영혼에 넋을 잃었다.
경오년도 다 저물어 가는 12월 초순, 우리집 전화 벨이 울렸다. 이성선 시인이었다. 그의 아들이 서울대학교에 입학시험을 치게 되어, 부부가 함께 상경할 것이라고 했다. 나는 그들 부부를 우리집에서 묵게 하였다. 그런데 그 부부는 밤이 늦어서야 우리집을 찾았고, 새벽에 일어나 우리집을 떠났다. 좀더 정을 나누지 못해서 얼마나 섭섭했는지 모른다.
1990년, 그는 문단에 발을 들여놓은 지 20년이 지나서 한국시인협회상을 받았다. 물론, 그의 아들도 당당히 서울대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하여 그 해에 대학생이 되었다.
그는, 그 육체가 허공에 먼지로 흩어질 때까지, 그 영혼이 지상에서 흩어질 때까지 지상의 언어들을 불러 모아서 노래하겠다고 다짐했다. 바다와 산악, 그리고 헐벗은 벌판과 영봉(靈峰)을 헤매며 지상의 언어란 언어는 모두 끌고 가서 무궁을 노래하겠다고 말했다. 솜다리처럼 고산(高山)에서 성좌(星座)를 가늠하는 그 영혼이 너무 지순(至純)하다 못해 서러웠는데, 매정하게도 그는 훌쩍 이 세상을 떠나 버리고 말았다. 2001년 5월 4일, 나는 그를 내 가슴에 묻었다.
김 재 황
높은 산으로 올라가서 하늘문을 두드리는 꽃이여. 산을 열고 침묵을 열고, 그분이 이마를 짚어 주시는 꽃이여. 무한한 하늘의 사랑에 별빛 영혼이 눈을 뜨고 기쁨으로 몸을 떠는 솜다리여.
나는 설악산을 올랐다가 우연히 솜다리를 만나는 행운을 얻었다. 가파른 절벽 위에 피어 있는 그 별빛 눈망울. 하늘을 향해 기도하고 있는 듯한 모습에, 나는 옷깃을 여밀 수밖에 없었다. 한동안 경건한 마음으로 서 있다가, 나는 문득 그 꽃 속에서 웃고 있는 이성선(李聖善) 시인의 얼굴을 발견하였다. 이성선 시인이야말로 ‘하늘문을 두드리는 별빛 시인’이 아니던가. 아무렴. 이성선 시인은 별을 쳐다보며 찬란하게 반짝이는 가난함을 꿈꾸었다.
나도 별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외로워 쳐다보면/ 눈 마주쳐
마음 비쳐주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나도 꽃이 될 수 있을까/
세상일이 괴로워 쓸쓸히 밖으로 나서는 날에/ 가슴에 화안히 안기어/
눈물짓듯 웃어주는/ 하얀 들꽃이 될 수 있을까// 가슴에 사랑하는 별 하나를
갖고 싶다/ 외로울 때 부르면 다가오는/ 별 하나를 갖고 싶다.
--------- 작품 ‘사랑하는 별 하나’ 중에서
“이성선 시인의 시편들은 자연과의 대화를 통하여 우주적 질서의 넉넉한 울림을 노래로 걸러 내는 일을 자임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 시인이란 ‘하늘’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다. 몸은 지상에 있어도 마음만은 항시 하늘을 거니는 사람이다. 말하자면 이성선 시인은 지상에서도 세상을 보고, 하늘에서도 세상을 보는 시인이 되고자 노력하고 있는 셈이다.”
권두환 문학평론가의 평이다. 그처럼 이성선 시인은 하늘의 시인이요, 별의 시인으로 인정을 받았다.
솜다리는 엉거시과에 딸린 여러해살이풀이다. 키는 30cm쯤 되고, 잎은 거꾸로 된 바소꼴이다. ‘바소’는 곪은 데를 째는 침을 말한다. 그렇게 가느다란 잎에다 잎자루도 지니지 않기에, 가난한 그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이 솜다리는 유럽에서 ‘알프스의 별’이라 부르고 있는 ‘에델바이스’와 아주 닮았다. 고독하게 산 속에서 그리움을 머금고 샛별처럼 피어나는 마음의 꽃이다.
솜다리나 에델바이스는 모두 고산식물이다. 솜다리는 우리나라 한라산과 금강산에서만 야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사실은 설악산에서도 만날 수 있다. 설악산은 이성선 시인의 산이다. 이성선 시인의 서재에서 창밖을 보면, 그야말로 설악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는 설악산을 안고 살며, 베고 잠들었다.
이성선 시인은 작품을 통해 ‘설악산은 나의 지붕이다. 지붕 끝으로 밤이면 별이 뜬다. 기왓골 깊이깊이 물소리가 잠긴다.’고 노래했다. 벌써 꽤 긴 세월이 지났는가 보다. 한번은 소설가 남지심 씨가, 이성선 시인을 만나볼 겸 가을 설악산도 구경할 겸, 속초에 가지 않겠느냐고 제의를 해 왔다. 물론, 나는 찬성했다. 가을이 무르익는 11월 중순, 눈발이 내리는 궂은 날씨를 무릅쓰고, 나는 고속버스에 몸을 담고 속초로 달렸다. 남지심 씨와 이성선 시인, 그들과는 속초에서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거의 여섯 시간을 달려서야 속초에 도착했다. 반갑게도 이성선 시인이 터미널에 나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내에서 남지심 씨와 합류한 우리는, 대폿집에서 그 동안의 회포를 풀었는데, 이성선 시인은 한사코 우리를 끌고는 자기 집으로 갔다. 그의 집은 도심에서는 벗어난 한적한 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고, 안내되어 올라간 2층 서재의 창을 통해 설악산의 전경이 손을 내밀면 잡힐 듯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
다음 날 아침은 언제 눈이 왔었느냐 싶게 맑게 갠 날씨였다. 세수를 하고 난, 산뜻한 설악산의 얼굴을 바라보며 우리는 그저 감탄만 연발했다.
이성선 시인과 나는 고려대학교 농학과 동기 동창이다. 학교 재학 때는 문학도로서 교지 ‘고대신문(高大新聞)’에 시를 발표하며 아주 친하게 지냈다. 그러나 그가 학업 도중에 입대를 하게 되어 소식이 그만 끊기고 말았지만. 아무튼 그 당시에 우리는 몇 사람이 함께 문학을 공부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남지심 씨였다.
그 후,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하면서 서로 잊고 지내다가, 1984년 1월, 나는 불현듯 이성선 시인이 그리워져서 그의 주소를 수소문하여 그에게 편지를 띄웠다. 그런데 그는 편지를 받자마자 반가운 답장을 보내 주었다.
‘참 오래 간만에 귀하고 반가운 소식 들었네. 처음은 재황이라는 이름으로 와서 누군가 했더니, 만웅(滿雄)이 자네였구먼. 참 반갑네. 실은 가끔가끔 자네가 생각나곤 했었네. 생각이 나는지 모르겠네만 그 때 대학 때 넷인가가 편지로 시를 써 보내며 평을 실어 보내던 일이 있었지. 자네와 백승돈 그리고 남영자(남지심), 또 나였지. 백승돈은 졸업 후 농산물검사소 시험에 합격하여 그 곳에 근무하고 있으며 남영자 씨는 얼마(몇 년) 전에 여성동아 장편 모집에 당선되어 근래에 여류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는데, 이 곳 낙산사에 자주 들르는 편이고 그 때마다 내게 연락을 주어 두 번인가 만나 본 적도 있는데 중년부인이 되었다네. 그 다음 궁금한 사람이 자네였지. 둘 소식은 알게 되었는데 자네는 통 오리무중이었거든. 가끔 대학 생활을 되돌아볼 때 편지로 시를 보여주고 평하고 하던 동인 아닌 동인 생활, 그 때가 자주 생각나고 또 그 사람들 모두가 그리웠지. 그 때 오랜 시간은 아니지만 매우 중요한 일을 했다고 생각되네. 나도 졸업하고 농촌진흥청 작물시험장 전작과에 있다가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와 지금은 중학교 교사를 하며 글을 쓰고 산다네. 글 쓰는 작업은 고되고 외로운 투쟁이지만 가끔 위안이 되는 때도 있기는 있다네.’
이성선 시인은 1941년 1월 2일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성대리에서 출생했다. 사실, 이성선 시인과는 대학교 동기 동창으로 문학 공부를 함께한 절친한 사이지만, 나는 그의 어린 시절을 잘 모른다. 아니, 아주 모른다. 다만, 그의 작품을 통해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다. ‘삼베실 놓고 밤새 비비는 어머니 무르팍’에서 어머니의 얼굴을, ‘다듬이질 소리 속에 어리신 어머님 어깨가 보이고 할머님 꾸중에 못 이겨 스무 살 어머니의 모습은 제 다듬이질 소리에 후줄근히 비 맞으며’에서 어머니의 시집살이를, 작품 '새와 풀꽃의 면회소'의 '아홉 살 때 가신 아버지, 돌아보고 다시 돌아보며 가신 얼굴'에서 비무장지대 너머에 계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그리고 ‘밭둑에서 나는 바람과 놀고 할머니는 메밀밭에서 메밀을 꺾고 계셨습니다.’에서 할머니의 모습을, ‘마당에 가서 할아버지와 히히덕거리며 팽이를 치고’에서 할아버지의 굽은 허리를 그려보는 게 고작이다.
머슴의 찢어진 옷 속으로 내다보이는 겨울 골목에/ 하늘이 숨어 빛난다/
찢어진 옷 속으로 내다보이는 하늘에/ 별이 내린다/ 찢어진 부분으로 내다보이는 지붕에/ 아침이 새떼를 몰고 내려와 지절거린다/ 어미소가 보이고 장작더미가 보이고/ 검불가리가 보인다.
------------ 작품 ‘고향의 천정2’ 중에서
자연 속의 어린 시절, 아마도 그 체험이 그의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점을 아무도 부정하지 못한다.
이성선 시인은 1970년 ‘문화비평’에 시 ‘시인의 병풍’, ‘목련’, 등 5편을 발표하였고, 1972년 ‘시문학’에 시 ‘아침’, ‘서랍’, ‘합장(合掌)’이 천료되어서 문단에 나왔다.
솜다리는, 7월 경, 가지 끝마다 노란 두상화(頭狀花)를 피운다. 꽃은 노란 빛이지만, 그 꽃 주위에 돌아가면서 흰 솜털이 있는 포상엽(苞狀葉)이 붙어 있어서, 이것이 흰 별처럼 보인다. 어떤 이들은 꽃이 노란 ‘솜다리’보다는 꽃이 잿빛인 ‘왜솜다리’가 더 ‘에델바이스’를 닮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솜다리의 노란 꽃도 가루받이를 끝내고 나면 슬며시 노란 색깔이 없어지므로 별 문제가 없다. 솜다리나 왜솜다리는 모두 설악산에 살고 있다. 솜다리는 외설악에서, 왜솜다리는 남설악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게 조금 다르다. 말하자면, 그 분포지역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는 뜻이다.
높은 산을 고집하는 지고한 성품이라든지, 어둠 속 별을 닮는 아름다운 영혼이라든지, 솜다리와 이성선 시인은 같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그것이 또 자연스럽게 신앙으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이성선 시인의 시세계(詩世界)는 우주를 엿보는 것처럼 신비롭기 그지없다.
“나의 시는 나에게로 가는 문이다. 나의 시는 내 안의 또다른 나를 찾아가는 고행의 발걸음이며 하늘로 가는 문이고 지옥으로 향하는 몸짓이며 동시에 지옥과 천당을 한 몸에 지니고 가는 자의 노래이다. 그분을 찾는 주문, 때로는 그분과 함께 걸어가는 노래이다. 나의 시는 또 그분에게 바치기 위한 이슬 같은 꽃잎이고 타오르는 불꽃이며 기다림으로 아파 우는 울음이다. 이 불꽃과 울음과 호소와 몸부림이 하나의 기도하는 나무로 서 있는 것이 나의 시인 것이다. 시는 내가 쓰는 것이 아니다. 그분이 돌아와 쓰는 것이다. 아니, 그분과 내가 함께 쓰는 것이다. 내 안의 나인 그분과 함께 쓰고 함께 노래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분은 누구인가. 나의 영혼이다. 내 안에 계시는 또 다른 나요, 깨어 있는 자이며 신(神)이다. 그분이 돌아와 계실 때만 나의 시 나의 노래는 시작된다. 나의 육체는 영혼을 받드는 그릇이며 등잔이다. 몸은 맑은 기름이 되어 그분 불꽃을 위하여 조금씩 등잔을 비워 간다. 그분이 지상에 머물러 계시는 동안, 나의 몸은 그분을 모시는 집이요 사원이 된다. 내가 그분을 모시고 함께 시를 쓰고 함께 노래하고 함께 걸어감이 내가 이 땅에 온 최대의 기쁨이요 삶의 황홀함이다. 나의 모든 삶은 이 기쁨과 황홀의 경이감으로 깨어 있을 때에 꽃이 피어나고 아름답게 타오른다.”
솜다리의 그 꽃이 따뜻함을 가지고 있듯이, 이성선 시인의 시선은 따뜻하였다. 이 세상을 아름답게 그는 볼 줄을 알았다. 그렇기에, 그가 보는 세상은 모두가 춤추는 모습이었다.
“과학에서 말하는 별과 별의 운동은, 사람의 온갖 동작은 실은 저 대우주의 리듬을 따른 하나의 춤인 것이다. 거대한 ‘침묵의 춤’인 것이다. 별의 움직임 하나, 새 날아가는 동작 하나, 구름 흘러가는 흐름 하나가 우연인 것은 결코 없다. 자세히 보아라. 이 세상의 모습은 모두 춤임을. 사람의 걷는 모습, 짐승의 뛰는 모습, 달 떠오르고 저녁 놀 피어나는 모습. 이 얼마나 절묘한 우주의 춤인가. 보았는가, 허리 구부리고 들에서 일하시는 그대 아버지 안에는 누가 돌아와 일하시는가를. 부엌에서 밥짓는 그대 어머니 안에도 춤추고 계시는 그분을.”
그래서 김선학 평론가는 이렇게 말한다.
‘그의 시가 가진 독창적이고 상궤를 벗어나는 독특한 심상화는 결국 그가 불가사의한 자연과 우주의 세계를 꿰뚫어 감득하는 직관과 일상의 세계를 맞물리게 하는 능력의 탁월함에서 해명될 수 있는 사항으로 파악된다. 자연 속에 가로놓여 있는 신비하고 불가사의한 요소를 꿰뚫어 일상성과 맞물리게 하는 직관력은 고요하게 시인 자신의 내면을 갈앉혀 명료한 의식으로 인간 존재의 근원을 통찰하지 않는다면 획득될 수 없는 일이다.’라고.
나는 다른 시인이 될 수 없음을 안다/ 풀잎과 마주앉아서 서로 마음 비추고/
남들은 들을 수 없는 그런 이야기로/ 함께 꿈꾸며/ 별을 바라 밤을 지새는/
시인이면 족하여라/ 그것만으로 세상을 사랑한다/ 그와 내가 둘이서/ 눈동자와
귀를 서로의 가슴에 묻고/ 사랑의 뿌리까지 영롱히 빛내며/ 저 하늘 우주의
울림을/ 들으면 된다/ 그의 떨림으로 나의 존재가 떨리는/ 그의 눈빛 속에
내가 꽃 피어나는/ 그것밖에는 더 소용이 없다/ 그렇게 별까지 가면 된다.
----------- 작품 ‘외로운 사랑’ 전문
별을 바라보며 살았던 시인. 그래서 그 영혼이 별을 닮은 시인. 그리고 그렇게 별까지 가면 된다던 시인. 이성선 시인을 만날 때마다, 나는 그 별과 같은 시심에 말을 잃었다. 그 새벽 꽃향기 같은 영혼에 넋을 잃었다.
경오년도 다 저물어 가는 12월 초순, 우리집 전화 벨이 울렸다. 이성선 시인이었다. 그의 아들이 서울대학교에 입학시험을 치게 되어, 부부가 함께 상경할 것이라고 했다. 나는 그들 부부를 우리집에서 묵게 하였다. 그런데 그 부부는 밤이 늦어서야 우리집을 찾았고, 새벽에 일어나 우리집을 떠났다. 좀더 정을 나누지 못해서 얼마나 섭섭했는지 모른다.
1990년, 그는 문단에 발을 들여놓은 지 20년이 지나서 한국시인협회상을 받았다. 물론, 그의 아들도 당당히 서울대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하여 그 해에 대학생이 되었다.
그는, 그 육체가 허공에 먼지로 흩어질 때까지, 그 영혼이 지상에서 흩어질 때까지 지상의 언어들을 불러 모아서 노래하겠다고 다짐했다. 바다와 산악, 그리고 헐벗은 벌판과 영봉(靈峰)을 헤매며 지상의 언어란 언어는 모두 끌고 가서 무궁을 노래하겠다고 말했다. 솜다리처럼 고산(高山)에서 성좌(星座)를 가늠하는 그 영혼이 너무 지순(至純)하다 못해 서러웠는데, 매정하게도 그는 훌쩍 이 세상을 떠나 버리고 말았다. 2001년 5월 4일, 나는 그를 내 가슴에 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