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선비의 모습을 간직한 금붓꽃

시조시인 2005. 9. 20. 21:09
선비의 모습을 간직한 금붓꽃

김 재 황

하늘에서 쏟아지는 햇살을 가득 머금고, 봄바람에 덩실덩실 춤을 추는 금붓꽃. 이 세상의 슬픔은 모두 단번에 베어 버릴 듯 높이 뽑은 잎새, 그리고 먼 세월의 원한이란 원한은 전부 한번에 용서해 줄 듯 착하게 웃는 꽃으로 하여 봄은 더욱 밝는다.
산기슭으로 가면, 만물이 소생하는 기척이 들린다. 새 세상의 하늘을 향해 가슴을 활짝 펴는 소리 들린다. 이 새로운 계절에, 금빛 붓 한 자루 먼 하늘로 들어 올려 선비의 높은 기상을 보이는 금붓꽃은, 꼬불꼬불한 삶을 살고 있는 현대에서는 좀처럼 만나기 힘든 존재의 의미가 아닐 수 없다.
금붓꽃은 왜 산기슭으로 올라가 숨었는가. 그 귀함이, 그 빛남이 더욱 소중히 생각되는 요즘, 금붓꽃과 같은 삶을 살다가 간 조지훈(趙芝薰) 시인이 마냥 그리워진다. 조지훈 시인에 대한 그리움이야, 어찌 나 한 사람뿐이겠는가. 각별한 교분을 지녔던, 조병화 시인은 이렇게 회상했다.
“지훈과 내가 처음으로 만난 건 1949년 여름이라고 생각됩니다. 나의 첫 출판 기념회장에서. 나는 이해 첫 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을, 지금은 고인이 된 장만영 시인이 경영하던 산호장에서 출판을 했지요. 그 때, 나는 멋모르고 문단적인 출판기념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장소는 플라워 다방, 사회는 박목월 시인, 당시는 몰랐지만, 이것이 우익 문인들의 모임이어서 다행이었어요. 이렇게 해서 처음 공식적인 모임을 갖게 된 자리에서, 나는 조지훈 시인을 만나게 된 겁니다. 그 후, 지훈과 나는 문인들이 모이는 술집에서 자주 마주치게 되었지요. 그가 소위 청록파 시인의 한 사람이라는 것도 이러한 자리에서 알게 되었답니다. 조지훈 시인은 친구들을 그리 가리지 않았어요. 텁텁하면서도 깊고, 깊고도 넓고, 넓으면서도 어딘가 조선 선비 같은 시골 냄새가 나고, 지훈은 역시 선비였지 도시적인 현대인은 아니었습니다. 지훈은 의리와 지조가 있는 시인이었지요. 그래서 사(私)에 흐르지 않고 공(公)에 정명한 선비였어요.”
이 시대의 마지막 선비, 조지훈 시인. 그의 향기로운 영혼을 깊은 산기슭에 숨어 피는 금붓꽃에서나마 만날 수 있다는 것은, 그 얼마나 뜻깊은 일이고 또 한편으로는 다행한 일인지 모른다.


바람이 부는 벌판을 간다. 흔들리는 내가 없으면 바람은 소리조차 지니지 않는다. 머리칼과 옷고름을 날리며 바람이 웃는다. 의심할 수 없는 나의 영혼이 나직이 바람이 되어 흐르는 소리.

어디를 가도 새로운 풀잎이 고개를 든다. 땅을 밟지 않곤 나는 바람처럼 갈 수가 없다. 조약돌을 집어 바람 속에 던진다. 이내 떨어진다. 가고는 다시 오지 않는 그리운 사람을 기다리기에 나는 영영 사라지지 않는다.

차라리 풀밭에 쓰러진다. 던져도 하늘에 오를 수 없는 조약돌처럼 사랑에는 뉘우침이 없다. 내 지은 죄는 끝내 내가 지리라. 아 그리움 하나만으로 내 영혼이 바람 속에 간다.
------------ 작품 ‘풀밭에서’

조지훈 시인은 1920년 경북 영양군 일월면 주곡동에서 태어났다. 태백산맥 산간에 있는 한양 조씨(漢陽趙氏) 일색의 작은 마을. 조부 ‘인석(寅錫)’은 한학에 조예가 깊은 천석꾼의 부호였고, 부친 ‘헌영(憲泳)’은 제헌 국회의원을 지냈다. 물론, ‘지훈’은 본명이 아니다. 조 시인의 본명은 ‘동탁(東卓)’. 그 유래는 다음과 같다.
“지훈은 나의 필명입니다. 어린 시절에 고노(古老)에게서 얻은 이름이니 아명이랄 수도 있고, 본명이 아닌 또 하나의 이름이니 자(字)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나는 그저 이것을 필명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조지훈 시인은 선천적으로 문인의 기질을 타고난 듯싶다.
“글이랍시고 쓰기 시작한 것은 아홉 살 때 동요를 지어 본 것이 처음인데, 이 동요란 것이 그 무렵에 성하던 프로 문학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음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조지훈 시인이 본격적으로 시를 습작하기 시작한 것은, 그가 열 여섯 살이 되던 1935년이었다고 한다.
“내가 시를 처음 습작하기 시작한 것은 열 여섯 살 때의 일입니다. 나의 슬픔은 사춘기의 생리로 하여 더욱 짙어졌을 것은 물론이었지요. 난독(亂讀)과 남작(濫作)의 방황도 이 때부터 시작되었어요. 복자(覆字)투성이의 팜플렛을 탐독한 것은 그 흥분과 항쟁의 몽상이 좋아서였지만 그러한 의식을 노래한 ‘카프’ 혹은 ‘나프’의 시는 차라리 팜플렛의 감격만도 못하였지요. 바이런도 휘트맨도, 하이네의 혁명시(革命詩)도 어쩐지 시로서는 마음에 차지가 않았습니다.”
조지훈 시인은, 1939년 봄, 동향의 선배 시인인 오일도(吳一島) 선생님을 찾아가 함께 머물면서 시를 습작하는 한편으로 서구 문학에 심취하였다. 그 후, 1939년, 혜화전문(惠化專門)에 입학한다. 그 해에, 조지훈 시인은 ‘문장(文章)’지 추천 시 모집에 응모하여 제1회로 작품 ‘고풍의상(古風衣裳)’과 ‘승무(僧舞)’가 추천되고, 그 이듬해에 3회 마지막 추천작인 ‘봉황수(鳳凰愁)’ 및 ‘향문(香紋)’을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데뷔했다.
금붓꽃은 붓꽃과에 딸린 여러해살이풀이다. 생김새는 붓꽃과 같지만, 꽃빛이 금빛이다. 뿌리줄기가 옆으로 뻗고, 줄기와 잎이 뿌리에서 여러 개 모여 난다. 잎을 이루는 곳에, 줄기를 감싸고 있는 잎꼭지를 지녀서, 관용의 아름다운 마음을 읽을 수 있다. 하지만 곧게 서는 그 잎새가 ‘지조의 기상’을 더 잘 나타낸다.
“선비는 지조를 지킴으로써 그 값이 있지요. 지조란 것은, 순일(純一)한 정신을 지키기 위한 불타의 신념이요, 눈물겨운 정성이며 냉철한 확집(確執)이요, 고귀한 투쟁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므로 지조는 선비의 것이요, 교양인의 것입니다. 장사꾼에게 지조를 바라거나 창녀에게 정조를 바란다는 것은 옛날에도 없었던 일이지만, 선비와 교양인과 지도자에게 지조가 없다면 그가 인격적으로 장사꾼과 창녀와 가릴 바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조지훈 시인의 그 유명한 ‘지조론(志操論)’이다. 이에 앞서 그는, 선비를 대접할 줄 모르는 현실을, ‘의기론(意氣論)’으로 개탄했다.
“선비도 요즘 선비는 선비의 위의를 지키는 사람이 없게 되었습니다. 지조도 없을 뿐 아니라, 선비를 대접하는 도(道)조차 땅에 떨어졌으니, 인생감의기(人生感意氣)인들 있겠습니까? 관존민비 사상을 버려야 한다고 민주주의를 양언하면서도 오늘의 위정자들은 선비 대접을 하는 꼴이 무슨 제집 노속 다루듯 하는 게 질펀히 보고 듣는 사실입니다.”
이게 어디 자유당(自由黨)이고 민주당(民主黨)이고 뿐이겠는가. 5공이 지나고 6공이 지났어도, 지금까지의 집권자라는 사실에 있어 조금도 다름이 없다는 점을 나 또한 공감한다.
금붓꽃의 꽃봉오리는, 금물을 듬뿍 찍은 붓을 연상시키기에, 그 의미가 빛난다. 이 꽃이 활짝 피고 나면, 바깥 꽃덮이 3개가 나타난다. 주걱을 닮았는데 옆으로 퍼지거나 밑으로 드리워졌다. 그뿐만 아니라, 3개의 안쪽 꽃덮이도 있다. 곧게 서는 모습이다. 암술대에 가려져 있는 3개의 수술. 3개로 갈라지는 작은 조각 밑에 암술머리가 자리를 잡는다. 이 꽃은 더없이 부드러움을 지니고 있어서, 더없이 너그러운 조지훈 시인의 면모를 떠올리게 한다.
내가 대학교를 다니던 시절, 아마도 3학년 학기말 시험 때라고 기억된다. 한번은 조지훈 선생님께서 시험감독으로 들어오셨다.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시험지를 돌리신 다음, 창가로 가시더니 아예 밖을 향해 돌아앉으셔서 깊은 사색에 잠기셨다.
‘나는 너희 인격을 존중한다.’
무언의 이런 말씀을 하시는 듯, 시험이 다 끝날 때까지, 결코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으셨다. 머리를 길게 기르셔서 단정하게 뒤로 넘기시고, 굵은 검은테 안경을 쓰신 멋장이 선생님. 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만나 뵙고 싶은 선생님이여.
조지훈 시인은 천래의 시인이다. 우리에게는 세칭 ‘청록파(靑鹿派)’ 시인의 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청록집(靑鹿集)’, 즉 ‘문장(文章)’지 출신들인 박두진(朴斗鎭), 박목월(朴木月), 조지훈 셋이서 공저로 세상에 내놓은 시집으로 하여 명성을 얻었다.
“우리 세 사람의 시에 있어서의 공통점을 요약한다면 민족과 자연, 모국에 대한 애정과 기다림의 정서라고나 할까요. 향토에 대한 애착과 슬픔의 목가(牧歌), 자연에 대한 관조와 사라져 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의 정한(情恨), 자연 속에 마음의 빛을 찾는 생리와 신념의 기도, 이것들은 모두 다 그 공통된 에스프리의 다른 표현이었던 것이지요. 우리는 민족적 현실의 초극을 위한 저항을 노래하진 못하였으나 붓을 꺾고 숨어서 시를 씀으로써 치욕의 페이지에 이름을 얹지는 않았고, 쫓긴 이의 슬픔 속에 잠겨서 시를 썼으나 퇴폐에 몸을 맡기지 않아 희구하는 슬픔으로 빛을 삼았던 것만은 확언할 수 있습니다.”
조지훈 시인은 명실공히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시인이었고 선비였고 의기남아(義氣男兒)였다. 조 시인이 31세 되던 1950년, 6․25전쟁이 터지자 그는 문총구국대(文總救國隊) 기획위원장으로, 또 종군문인단(從軍文人團) 부단장으로 전선에 나가 큰 활약을 했다. 그 때에 쓴 작품으로 ‘다부원에서’, ‘도리원에서’, ‘너는 38선을 넘고 있다.’ 등 수십 편이 지금 남아 있다.
그 후, 40세가 되던 1959년에는 민권수호 국민총연맹 중앙위원, 공명선거 전국위원회 중앙위원 등의 직책을 맡으면서 불법 정권에 항거하였다.


만신(滿身)에 피를 입어 높은 언덕에/ 내 홀로 무슨 노래를 부른다/ 언제나 찬란히 티어 올 새로운 하늘을 위해/ 패자(敗者)의 영광이여 내게 있으라// 나조차 뜻 모를 나의 노래를/ 허공에 못박힌 듯 서서 부른다/ 오기 전 기다리고 온 뒤에도 기다릴/ 영원한 나의 보람이여// 묘막(渺漠)한 우주에 고요히 울려 가는 설움이 되라.
---------- 작품 ‘역사 앞에서’

“비정(秕政)을 타매하고 정의와 자유를 사수함에 그 자세가 도저하고, 호흡이 줄기차며 호령이 서릿발같았지요. 그의 후기 시편 중에는 이러한 사자후(獅子吼)가 많이 보입니다. 더구나 앞서, 일신의 안일을 위해 불의와 야합하며 변절하는 당시의 위정자와 지식인의 작태를 대성일갈한 논설로, 조지훈 시인은 초기 시로 강하게 인상지어진 시인의 이미지와 더불어 지조와 절개를 강변(强辯)한 지사의 이미지를 이 땅에 자랑스럽게 남겨 놓았습니다.”
신중신 시인의 말이다.
1968년 5월 17일, 조지훈 시인은 저 세상으로 우리 곁을 영원히 떠났다. 그의 나이 49세,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조 시인은 지금, 경기도 양주군 마석리 송라산 기슭에서 잠들어 있으며, 서울 남산 순환도로 입구와 고향인 경북 영양 주실숲에 시비(詩碑)가 세워져 있다.
조지훈 시인은 생전에 한용운(韓龍雲) 선생, 홍로작(洪露雀) 선생, 김영랑(金永郞) 선생, 현상윤(玄相允) 선생, 오일도(吳一島) 선생, 청마 유치환(柳致環) 선생 등과 깊은 교분을 나누었다.
“내가 영랑 선생을 그리워하고 존경하게 된 데에는 몇 가지 까닭이 있지요. 선생은 남보다 몸이 비대하고 나는 남보다 키가 큰데, 시는 둘이 남보다 섬세한 것이 설명을 요하지 않는 정신적 혈맥의 상통을 느끼게 하는 게 그 첫번째요, 시로서 벗을 삼고 시를 위해 바쳐 온 영랑이나 나의 시관(詩觀)에는 반도 차지 않는 시를 해방 후 슬픈 민족과 아름다운 인간성을 위해 아낌없이 희생한 것이 미덥기 짝이 없다는 것이 그 둘째요, 술을 마시기 전엔 겸손한 사람이요 술을 마시면 그 정열이 방안 가득차 온다는 것이 공통적 기질이란 것이 셋째입니다. 이렇듯 내가 선생을 좋아하는 것이 나의 생리의 척도에서 시종된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그러므로 지금의 내 눈에는 인간적으로나 예술적으로나 영랑 사백에게는 고귀한 평범성 속에 감추인 그 정금미옥(精金美玉)의 뜨거운 사랑의 정신이 엿보이는 겁니다.”
금붓꽃은 우리나라 특산물로, 특히 서울 근교인 광릉(光陵) 부근에 분포한다. 특산식물은 우리나라에만 특별히 존재하는 식물,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특별한 시인인 조지훈 선생과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다. 다만, 금붓꽃은 다른 붓꽃들에 비해 유난히 키가 작고 조지훈 시인은 남보다 키가 크지만, 작아서 더욱 빛나는 꽃을 피우는 금붓꽃의 의미를 생각한다면, 자연 앞에 겸손한 조지훈 시인의 낮춰서 위대해진 그 영혼과 어찌 같다고 할 수 없겠는가.

(도서출판 서민사 간행 "들꽃과 시인"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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