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별처럼 빛나는 ‘생태시인 이성선’

시조시인 2005. 9. 4. 08:50
 

                         별처럼 빛나는 ‘생태시인 이성선’



  김재황(시인)


(1)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일까? 그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생명이다. 그런데 그 생명은 깨끗한 물이 없으면 존재할 수가 없다. 그리고 그 깨끗한 물은 건강한 풀과 나무가 없으면 유지할 수가 없다.

  이러한 자연에 대한 지극한 마음으로 일생을 시작에 몰두한 시인이 있다. 그는 다름 아닌 이성선 시인이다. 나는 늘 그를 바라보며 뛰어왔다. 그는 ‘시인’이기 이전에 ‘나의 친구’였고, ‘나의 친구’이기 이전에 ‘아름다운 시인’이었다. 그런데 나는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세상에 이런 일이 다 있단 말인가? 2001년 5월 7일 낮에 나는 그의 부음을 들었다. 그 순간, 나는 그저 멍하니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그 후에도 나는 며칠 동안 잠을 이룰 수가 없었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밤 10시가 지난 시각에 불쑥 나에게 전화를 걸어, “요즘 작품 많이 써?”하고 물었는데, 그처럼 훌쩍 떠나 버리다니---.

  이성선 시인은 나하고는 고려대학교 농학과 동기동창이다. 입학하고 얼마 안 되어, 대학 친구들의 얼굴을 익히고 있을 때였다. ‘고대 신문’에 그의 시 한 편이 발표되었다. 지금 기억으로는 시의 제목이 ‘북소리’이었던 것 같다. 아무튼 나는 그의 시를 읽고 무척 놀랐고, 큰 감동을 받았다.

  나도 중학교 때부터 시에 심취해 있었던 터라, 그와 곧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그의 영향을 받아, 얼마 후에는 나도 ‘고대 신문’에 시 ‘가을 二題’를 발표하였다. 이로써 그와는 ‘文友’의 관계가 하나 더 맺어졌다. 그 때에 소설가 남지심(그 당시의 이름은 남영자) 등과 '동인 아닌 동인' 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성선 시인과는 오래 소식이 끊기기도 했지만, 내가 문단에 발을 들여놓게 됨으로써 비교적 자주 소식을 주고받았다. 일이 있어서 그가 상경했을 때에는 반드시 전화를 주었고, 우리(이성선 시인, 윤성호 시인, 그리고 나)는 봉천 전철역 부근의 찻집에서 녹차를 들며 문학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윤성호 시인도 고려대학교 농학과 출신이다. 이성선 시인과는 학창 시절에 같은 집에서 하숙생활을 하기도 했다. 대학에는 나보다 1년 늦게 들어왔지만, 나이는 나보다 1살 위이기 때문에 ‘학우’이자 ‘친구’로, 그리고 ‘문우’로 다정히 지내고 있다.

  언제인가, 셋이 한 자리에 모였을 때, 이렇듯 농학과 친구들이 셋씩이나 시인이 된다는 일이 쉬운 게 아니니, ‘3인 시집’을 내는 게 어떻겠냐고 제의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을 구체적으로 실현해 보려는 이 때에 그가 먼저 가 버렸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2001년 5월 4일 그는 다른 세상으로 떠났다. 그러나 나는 그를 보내지 아니하였다.

  어쩌면 오늘밤의 꿈에서라도 그는 시 한 편을 들고 나를 찾아와서 “이 작품 어때?” 하고 물을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사실 그 동안에 나는 그를 만나면 반가우면서도 한 편으로는 슬프기도 했다. 아주 귀한 도자기를 볼 때, ‘저 도자기가 혹시 깨어지면 어쩌나?’하는 마음이 들 듯, 그를 만날 때면 그런 마음이 들었다. 그 이유는, 그가 너무나 순수했기 때문이었겠지만, 그의 시 ‘하늘이 부르는 날’도 한 몫을 했다.


  어느밤 하늘이 내려와 내게

  다리 한 쪽을 내놓으라 한다면

  나는 어찌해야 할까.


  어느날 하늘이 다시 내려와

  내 몸 전부를 내놓으라 한다면

  나는 진정 무어라 말해야 할까.


  네 영혼이 부질없는 일로 가득 차

  내 너를 가지러 왔노라 한다면

  나는 어떻게 그와 마주설까.


      -작품 ‘하늘이 부르는 날’ 전문


  나는 이 시를 대하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절대로 안 되지, 나는 눈을 감고 손을 마주잡았다. 하지만 그를 대하면 어쩐지 그가 죽음을 가까이 붙잡아 두고 있는 듯한 우려를 지울 수가 없었다.

  그는, 작년 말에 펴낸 시집 ‘내 몸에 우주가 손을 얹었다’를 나에게 보내고는, 늦은 저녁에 전화를 주었다.

  “내 시집 읽어보았어? 어떤 작품이 좋아?”

  나는 웃으며 ‘모두 좋더라’고 했더니, 그는 굳이 좋은 작품의 제목을 말해 달라고 했다. 나는 하는 수 없어서 생각나는 대로 ‘잎사귀 그릇’이란 작품이 좋더라고 대답했다. 그제야 그는 “그래? 그 작품이 좋아?”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아마도 그는 즉시 그 작품을 찾아서 펼쳐놓고 다시 읽어 보았을 것이 뻔하였다.

  그는 모두 12권의 시집을 펴냈다. 펴낼 때마다 그는 분명히 나에게 그 시집을 보내 주었다. 나도 받아서 몇 번씩 읽어 본 기억이 있는데, 지금 찾아보니 9권밖에는 없다. 어디 깊숙이 들어가 있거나, 아니면 누가 놀러 왔다가 눈에 띄어서 들고 갔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를 대하는 마음으로 가슴을 여미고, 그 시집들을 음미하며 읽었다.

  그렇다. 그는 별처럼 빛나는 생태시인이었다.

  언젠가, 외국의 문인이 나에게 우리나라의 생태시인 한 사람을 알려달라고 하기에, 나는 서슴없이 ‘이성선 시인’을 말해 주었다. 지금 생각해도 아주 잘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면 그의 작품 중에서 몇 작품을 골라, 생태시의 면모를 살펴보고자 한다.

 

(2)

  

  仙女가 맨발로 내려딛는 雪嶽山

  골골 푸른 물에 몸 씻고 나온 반달아

  메꿩밭 미친년의 첫날 피냄새와

  이끼 묻은 하늘 깔고 뭉개던

  지지리 못난 사내의 가슴길

  굽이굽이 그 길로

  야심을 지고 가다가 가다가

  원한을 지고 가다가 가다가

  마음 아파 울음 터져 쓰러진 산곡

  구름이라 이슬이라 몸 씻고 나온 반달아.

 

                           -작품 ‘山木蓮밭’ 전문


  이 작품은 1974년에 펴낸 첫 시집 ‘시인의 병풍’에 들어 있다. 여기에서 그는 산목련을 ‘몸 씻고 나온 반달’이라고 표현했다. 나는 이 구절을 읽고는 무릎을 쳤다. 한 마디로 산목련이 피운 꽃을 이처럼 명확히 그려내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백목련’이나 ‘자목련’은 중국에서 들여 온 나무이고,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목련류로는 ‘산목련’과 ‘함박꽃나무’가 있다. 그러나 ‘함박꽃나무’는 화량(花量)이 적은 반면에, ‘산목련’은 많은 꽃을 피운다. 그래서 산목련은 야성을 느끼게 한다. 산목련의 꽃봉오리는 너무나 희어서 만지면 금방이라도 얼룩이 묻을 것 같다. 그 모습을 이성선 시인은 ‘몸 씻고 나온 반달’로 노래했으니, 어찌 놀랍지 않겠는가.


  밭뚝에서 나는 바람과 놀고

  할머니는 메밀밭에서

  메밀을 꺾고 계셨습니다.

  

  늦여름의 하늘빛이 메밀꽃 위에 빛나고

  메밀꽃 사이사이로 할머니는 가끔

  나와 바람의 장난을 살피시었습니다.


  해마다 밭뚝에서 자라고

  아주 커서도 덜 자란 나는

  늘 그러했습니다만


  할머니는 저승으로 가버리시고

  나도 벌써 몇 년인가

  그 일을 까맣게 잊어버린 후


  오늘 저녁 멍석을 펴고

  마당에 누우니


  온 하늘 가득

  별로 피어 있는 어릴 적 메밀꽃


  할머니는 나를 두고 메밀밭만 저승까지 가져가시어

  날마다 저녁이면 메밀밭을 매시며

  메밀꽃 사이사이로 나를 살피시고 계셨습니다.

 

                                  -작품 ‘고향의 天井․1’전문


  이 작품에서 ‘늦여름의 하늘빛이 메밀꽃 위에 빛나고’하는 구절이 생태시의 면모를 나타내고 있다.

  메밀꽃은 늦여름부터 피기 시작한다. 메밀꽃을 다른 이름으로 교화(簥花)라고 부른다. 이는, 그 모습이 파도가 일 때의 하얗게 부서지는 포말(泡沫)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래서 ‘메밀꽃 일다’라고 하면, ‘물보라가 하얗게 부서지면서 파도가 일다.’라는 뜻이 된다. 그런데 이성선 시인은 ‘바다’가 아니라, ‘하늘’이 내려와서 ‘빛난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이 시기에 씌어진 작품들로, ‘파문’, ‘가을’, ‘숲에서’ 등이 생태시의 진한 색깔을 지녔다.


  새가 날아갈 때 분명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세상에 텅 빈 채 나뭇가지만 흔들린다. 아니다. 샘물이

  반짝이고 구름이 깃을 떤다. 무한히 가슴을 두근거린다.


  물밑은 더욱 선명하다.

  그러나 이 일이 어디서부터 와서 보이지 않는 어디까지 은밀히

  닿아 우리 영혼을 빛내고 있는지

  아는 이는 드물다.


  다만 이 순간에

  우주의 빈 집에 들어와 누군가 하늘의 일로 흔들린다.

 

            -작품 ‘하늘의 기둥을 받들고 서 있는’ 중 일부

     

  이 시에서는 ‘세상에 텅 빈 채 나뭇가지만 흔들린다.’는 구절이 새의 생태를 가늠하게 한다. 많은 사람이 새의 모습을 노래했지만, 새가 날아갈 때에 나뭇가지가 흔들린다는 사실을 주목한 작품은 만나기 어렵다.

  나는 이 시를 읽으며, 닭이나 새가 날개를 펴서 홰를 탁탁 치는 모습을 연상하였다. 그처럼 이 시의 이 한 구절이 생동감을 갖게 한다. 나뭇가지의 흔들림은 샘물을 반짝이게 하고, 그 샘물은 구름의 깃을 떨게 한다. 그리고 그 깃은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든다. 이게 바로, 점입가경(漸入佳境)이다. 


  겨울 산에 들어가 바라보면

  지구는 아무래도 한 마리 짐승이네

  짐승 몸에 털이나 있듯

  산등성이나 골짜기 어깨 같은 곳으로

  잎 떨어진 나무들이 털처럼 서 있고

  이 털 사이를 헤쳐가는 이나 벼룩처럼

  나는 숲 속을 가고 집을 짓고

  하늘의 반달을 내려 하프를 뜯네

  우주는 또 이 지구 같은

  별들이 수 없이 떠 있는 목장

  밤 하늘 이 숲 저 숲에서 들려오는

  짐승들의 갖가지 울음소리

  한 짐승이 다른 짐승을 그리워 헤메듯

  한 별이 다른 별을 찾아 떠도네

  이 땅 한 사람의 고뇌가

  먼 어느 별의 눈빛을 빛나게 하고

  또 먼 어느 별 누구의 눈물이

  이 지구의 나에게 밤세워 시를 쓰게 하느니

  이 광경을 바라보고 계시는 이는 누구인가

 

                             -작품 ‘겨울 산에서’전문

 

  이 시는 이성선 시인의 자연상태에 관한 진면목을 나타내고 있다. 지구와 우주까지도 하나의 생명체로 본 그의 혜안(慧眼)이 놀랍기만 하다. ‘우주를 하나의 목장으로 끌어안는 그 가슴의 넓이에 나는 말을 잃는다.

  1985년 이 시기에 쓰이어진 작품들 중에서는 ‘나무 안에 절’, ‘우황’, ‘춤추는 사람’, ‘나의 나무가 너의 나무에게’, ‘과수밭에서’, ‘풀잎으로 나무로 서서’ ‘유령춤’, ‘낙산사 마당’, ‘회초리’ 등이 생태시의 범주에 포함되리라고 나는 생각된다.

  

  최초 땅속에 허리 구부리고 살던 벌레는 어둠에서 나와

  땅 위를 기어갑니다. 작도 보잘 것 없는 몸 구부렸다 폈다

  하며 지구의 한 부분을 기어갑니다.

  그러나 그 내부는 하늘로 날아오르려는 일년, 우주를

  소유하려는 정신으로만 불타, 아무도 모르는 사이 아무도

  모르는 곳에 집을 짓습니다. 작은 벌레 집을 짓습니다. 집을

  짓고 天刑의 무늬를 두르고 깔깔한 독방에 홀로 들어앉아

  웅크리도 가다듬고 꿈꿉니다. 해탈의 순간을 기다립니다.

  불타오르며 허물을 벗으며 끝없이 하늘 문을 두드립니다.

  우주의 위대한 침묵이 그를 감쌉니다.

  드디어 그는 자신을 파괴하고 자기 안의 나를 파괴하고

  한 마리 나비로 완성되어 하늘을 날아오릅니다. 우주를

  소유합니다.

                                                        - 작품 ‘序詩’ 전문


  나비는 고치를 만들지 않고 번데기가 되었다가 자란벌레로 완전변태를 한다. 물론, 노랑나비와 같이 성충으로 월동을 하는 종류도 있지만, 물결부전나비와 같은 것은 어린벌레(또는 번데기)로 월동한다. 즉 흙덩이의 틀 속에서 월동하는데, ‘최초 땅속에 허리 구부리고 살던 벌레’이란 구절이 그 생태를 내보인다. 또 ‘작은 벌레집’이란 ‘번데기의 단단한 껍질’을 가리키는 것일 게다. 아, 그리고 ‘해탈의 순간’이란, ‘우화’(羽化) 그 자체를 나타낸다.

 

  자연법칙을 지배하는 그분. 손질은 섬세하고 위대합니다. 그분은 위대한 시인입니다. 꽃의 세계 한 부분만 열어보아도 그 경지가 다 비칩니다.

  꽃은 자화수분(自花受粉)꽃과 타화수분(他花受粉)꽃이 있사온데, 제 꽃 수술만 사랑하는 자화수분 꽃의 입술은 수술보다 키다 작아서 고개를 들고 항시 제 수술의 눈짓을 받으며 미소 머금고 행복하게 지냅니다만, 제 수술은 싫어하고 다른 꽃술만 좋아하는 바람기 많은 타화수분 꽃의 입술은 제 수술보다 키다 커서, 키가 작은 제 수술을 함부로 어쩌지 못하게 하고는 꽃잎 울타리 밖으로 긴 목을 뽑아 올리고 다른 꽃술을 유혹합니다.

  그러나 그녀의 사랑은 거리가 멀고, 아득해 때로 서글프고 외로운 것, 그걸 깊이 헤아리신 그분은 나비 벌 바람을 보내어 꽃의 사랑을 이룩해 주옵니다.

  푸른 하늘에 나비와 벌과 바람의 천사들이 꽃술을 물고 날아올 때 그녀는 가슴 황홀하여 꿀과 향기로 천사들을 감싸고 향연을 벌입니다.

  꽃의 마음까지 투명히 헤아리어 암술 길이 하나로 사랑의 기교를 갖게 해 주신 그분, 그분 지혜가 우주 어느 미세한 부분에도 은밀히 숨어 있지 않은 곳이 없음을, 그 비밀이 이 우주에 가득함을 나는 봅니다. 그분 신비의 시가 내 눈에 화안히 비칩니다.

 

                                                                           - 작품 ‘하늘문을 두드리며100’  전문


  자화수분은, 암수한몸으로 된 꽃에서 가루받이를 하는 경우를 말한다. 보통은 자화수분(自花受粉)이라고 하는데, 꽃가루가 같은 나무에 있는 입술머리에 붙는 일을 가리킨다. 그리고 타화수분은 꽃가루가 다른 개체의 꽃의 입술머리에 붙는 일이다. 일명 ‘딴꽃가루받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타화수분을 하는 식물은 매개물(媒介物)이 있어야 한다. 즉, 충매화(蟲媒花)는 곤충을 매개로 가루받이를, 풍매화(風媒花)는 바람에 의해서 가루받이를 하는데, 소나무와 은행나무 따위의 경우이다. 또 물에 의해 가루받이를 하는 식물도 있다. 이런 경우를 수매화(水媒花)라고 부르며, 나사마름이나 자라마름 등이 있다.


  교실 탁자 위에 새로 꽂아놓은 꽃병의 국화

  흰색 자주색 노란색의 소국들

  꽃가지 너머 추운 듯한 아이들의 동그란 얼굴이

  웃으며 하나씩 꽃가지 위로 올라와

  더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난다

  

  집에 돌아와 서재에 앉으려니

  예까지 따라온 녀석들의 얼굴

  국화꽃송이보다 더 방울방울 환한 등으로 켜져서

  내 책상 위에 웃고 비춘다

  이 적당한 늦가을

  방에 가득 피어난 사랑의 얼굴 등불

 

                                             - 작품 ‘늦가을’ 전문


  이 시에서 ‘흰색 자주색 노란색의 소국들’의 구절을 보면, 금방 올망졸망 모여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소국(小菊)은, 국화 중에서 작은 꽃(꽃지름이 9㎝ 이하)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래서 소륜국(小輪菊)이라고도 한다.

  꽃꽂이를 할 때에는. 대륜의 국화는 보통 근조화(謹弔花)로 사용하고, 소륜의 국화는 축하용으로 사용한다. 그렇기에 ‘교실 탁자 위에 새로 꽃아 놓은 국화'는 소국일 수밖에 없다.


  동화의 나라인가

  물기 묻은 11월 아침 하늘에

  무지개가 뜨고

  가을 길가에 촛불 켜 놓은 듯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아래에서

  어린아이 두셋이 엎드려

  은행잎을 줍고 있다.


  천사들의 발자국

  이슬묻어 반짝이는 황금의 부챗살

  줏으며 아이들은 노래한다

  천사의 신발 신고

  부채살로 날개 달고

  무지개 타고 하늘나라로 오르고 있다

 

                     - 작품 ‘가을 아침’  전문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고 '부채의 살' 모양을 지녔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드물다. 그렇지만, 그 잎을 ‘천사들의 발자국’이라고 표현한 일이 경이롭다. ‘천사들의 발자국’은 또 한 번 탈바꿈하여 ‘천사의 신발’이 된다. 은행의 영어 이름은 ‘maiden tree'이다. 처녀의 금빛 머리카락? 생각만 해도, 그 아름다움이 빛난다. 이 노란 빛깔은 ’평화‘를 상징한다. 그리고 사랑의 빛깔이기도 하다. 그러니 ’천사의 신발‘로 안성맞춤이다. 그 이외에도 이 시기(1987년)에 씌어진 생태시들로는 ’가을 저녁‘, ’가난의 울림‘, ’아름다운 사람‘, ’마타리꽃‘, ’감나무‘, ’호수‘, ’새가 날아갈 때‘, ’벌레 버스‘ 등을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아이 발자국에 달이 떴다

  

  물 속으로 천년을 죽지 않고 지나가는

  눈부신

  바람 한 줄


  달이 뜬 물마다

  울금향 꽃이 줄줄히 피어난다

 

                          - 작품 ‘발자국’ 전문


  울금향(鬱金香)은 튤립(tulip)을 이르는 말이다. 그 꽃의 생긴 모습이 예쁜 술잔 같다. 술잔에 달이 뜨고, 그 술잔이 튤립꽃으로 변하여, 줄줄이 피어나고 있으니,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아니 튤립꽃은 술잔 모양이 아니고, 아이의 발자국을 더 닮았다. 유럽에서는 애칭으로 튤립꽃을 ‘생쥐입술’이라고 한다는데, 그보다는 ‘아이 발자국’이라고 부르는 게 더욱 사랑스럽지 않을까?


  저녁 황혼 속에 몸을 숨기고

  사시나무는 언덕 숲 속에 산다


  구름이 지나가도 몸을 떨고

  바람이 지나가도 몸을 떨고

  별들이 흘러도 몸을 떤다

 

  짐승이 다가와도 몸을 떨고

  달그림자 지나가도 몸을 떨고

  사람이 와도 몸을 떤다


  밤에 잠들지 못하는 나무

  새벽에 잠들지 못하는 나무

  대낮에는 더욱 잠들지 못하는 나무

 

                  - 작품 ‘사시나무’ 전문                       

        

 사시나무는 긴 잎자루를 가지고 있고 잎자루는 네모진 고무줄처럼 납작하다. 더군다나 그 끝에 달려 있는 잎몸이 삼각형이다. 그래서 조그만 바람에도 떨고, 구름이 지나가면 나무는 바람이 또 불겠구나 하고 몸을 떤다. 그리고 별똥이 흘러도 무수한 바람이 불지 않을까 하고 몸을 떨 수밖에 없다. 짐승이 다가와서는 영역표시를 하기 위해서 줄기를 긁고, 또 어떤 놈은 줄기를 긁어먹기도 한다. 달그림자가 지나가면 야행성 곤충이 나와서 나무를 괴롭힌다. 더군다나 사람이 와서는 아예 밑둥을 잘라서 넘어뜨린다. 그러니 떨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항상 두려움에 떨며 잠들지 못한다.

  이 작품은 시집 ‘새벽꽃 향기’에 실려 있다. 이 시집에는 이 작품들 외에도 ‘춤이 보이는 세상’, ‘개구리 울음소리 위에 떠서’ , ‘연꽃과 한밤’, ‘저 나뭇가지’, ‘붓꽃’, ‘저녁 강물’, ‘피리’, ‘달맞이꽃’, ‘산국화’, ‘무욕의 나무그림자’, ‘식물성 사랑’, ‘감나무’, ‘초롱꽃’ 등이 모두 생태시의 빛깔을 띠고 있다.


  해당화야, 해당화

  바다에 발가벗고

  벌거숭이 해를 껴안아

  아파요 아파

  사타구니 벌리고

  불타는 입술

  털투성이

  지옥보다 더 붉은 네 영혼에

  닿으면


  나는 어둠이야

  너도 어둠이야


  벌레 먹은 달 하나 뜨면

  네 마음 더욱 황홀해

  나를 부여잡고

  바닷가에 누워 함께 피를 섞는


  너는 어둠이야

  나도 어둠이야

  아파요 아파

                        -작품 ‘海棠花’ 전문


  해당화는 여성적인 꽃이다. ‘벌거숭이 해를 껴안아’라는 구절이 무엇보다도 관능적(官能的)인 느낌을 준다. 둘째 연에서 ‘털투성이’는 비록 줄기에 가시를  많이 지녔지만, 그 가시까지도 털을 달고 있음을 의미한다. 해당화는 털이 많다. 그래서인지 가지가 있어도 귀여운 모습이다.

  해당화는 바닷가 모래사장에 뿌리를 밖고 있어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애뜻함이 있다. 그래서 이 나무를 가리켜 ‘see tomato'라고 한다. 강변에 살고, 작약처럼 큰 꽃과 살구 같은 열매를 지니며, 향기도 고운 해당화이다.

  ‘나도 어둠이야’라는 마지막 구절에서 아직 잠이 덜 깬 ‘해당수미족’(海棠睡未足)의 뜻을 맛볼 수도 있다.


  한밤 짐승이 되어 울까

  눈물 가득 꽃이 되어 울까

  

  광야에 웅크려 하늘을 본다

  몸은 지상에 묶여도

  마음은 하늘에 살아야지

  이 가지 저 가지를 헤매며

  바람으로 울어도

  영혼은 저 하늘에 별로 피어야지

  절망으로 울던 마음 그 가난도

  찬연하는 마음으로 천상에 빛나야지 

  광야에 웅크려 다시 하늘을 본다

  마음 잎새에 빛나는 별빛이여

  눈물 가득 꽃이 되어 울까

  한 마리 짐승이 되어 울까

 

             - 작품 ‘몸은 지상에 묶여도’


  이 시에서는 ‘광야에 웅크려 하늘을 본다’가 ‘짐승’의 상태를 잘 표현하고 있다. 왜 짐승은 광야에 웅크리고 있는가. 그것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그 하나는 먹이를 잡기 위해서 몸을 웅크리도 있거나, 다른 하나는 ‘적의 공격에 대항하기 위해서 몸을 웅크리고 있을 것이다. 우리의 삶이 다 그런 모습이다. 생존경쟁 시대에 우리 또한 어쩔 수 없이 짐승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

  

  험함이 고요함 안에 다리를 벋고 있다

  고요함이 험함 안에 몸을 맡겨 두고 있다

  천둥번개가 긴 혀를 무섭게 내두르며

  하늘과 땅을 불로 지지고 고문하다 간 후에

  비 젖은 산 비 갠 산이 새로 깨어나

  연꽃 되었는가, 세상 연못 속에 산이 꽃이구나

 

                                 - 작품 ‘산과 연꽃’ 전문

 

  이 시에는 ‘고요함이 험함 안에 몸을 맡겨두고 있다’가 연꽃의 생태를 내보인다. 고요한 연꽃과 함한 연꽃을 금방 느낄 수 있다. 연꽃을 일명 ‘만다라화’(曼다羅花)라고 부르는  데에도 그만한 뜻이 담겼을 성싶다. 그래서 불가(佛家)에서 꽤나 존중하는데, 장수․건강

․명예․행운․군자 등을 상징한다. 꽃말은 순결이다. 인도와 이집트가 원산지로 알려져 있다. ‘하늘과 땅을 불로 지지고’에서 한여름에 꽃을 피우는 연꽃의 아픔을 짐작할 수 있다.


  복사꽃 한 번 본 뒤로

  세상을 다 깨달은 영문선사

  아름다운 그 화두에

  나 너무 부끄러워

  긴 겨울 눈 속을 떠돌다가

  잔눈깨비 어설프게 흩날리는

  설악산 아래 다시 돌아와 섰다

  이미 오래 전에 타 버린 陳田寺

  이른 봄의 텃밭

  사람도 없고 절도 없는 곳

  밭 귀퉁이에 혼자 버티고 있는

  늙은 복사꽃나무와 마주섰다

  시간 일러 아직 꽃봉오리 터지지 않고 

  붉게 물든 꽃가지만

  하늘이 어쩌지 못하여

  나무 아래 휘도는 개울물이

  싸안고 내려가

  물에 꽃봉오리 씻고 또 씻어 벗긴다

  씻어 열리는 꽃이 여기 있구나

  놀라 바라보고 있는데

  귓가에 무슨 소리가 들린다

  저 꽃잎 열리면 꽃 속으로 

  너를 데리고 들어가라

  고개를 돌려 주위를 보니

  아무도 없다

 

                                                     - 작품 ‘물 속에 피는 꽃’


  복사나무는 고향의 나무이다. 이 나무가 활짝 피는 봄이면 고향 마을은 꽃 속에 잠긴다. 시의 구절 중 ‘나무 아래 휘도는 개울물이 싸안고 내려가 물에 꽃봉오리 씻고 또 씻어 벗긴다’를 보며, 나도 고향 마을을 떠올려 본다. 그렇다, 내 고향 마을에도 복사꽃 아래로 맑은 개울물이 흐르고 있었다. 문득 ‘무릉도원’(武陵桃源)의 별천지가 눈 앞에 펼쳐진다. 영운선사도 이렇게 그 화두(話頭)를 풀어 나갔으리라. ‘씻어 열리는 꽃’의 이미지가 수줍은 듯 피어 있는 복사꽃과 너무도 잘 맞아 떨어진다. 복사나무는 한명으로는 ‘도’(桃)라 하며, 다른 이름으로는 ‘모도수(毛桃樹), ’선과수‘(仙果樹), ’도화수‘(桃花樹) 등으로 불리운다. 꽃말은 ’사랑의 행복‘이다.

  이 작품들은 1994년에 펴낸 시집 ‘벌레 시인’ 속에 들어 있다. 이 시집에는 이 작품 외에도 ‘파도’, ‘누에’, ‘통화’, ‘복사꽃’, ‘산목련꽃’, ‘지상의 작은 행복’ 등이 생태시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늦은 저녁 산에 귀 대고 잔다

  

  달빛 숨소리 부서지는

  골짜기로

  노루귀꽃 몸을 연다


  작은

  이 소리


  청둥보다 더 크게

  내 귀속을

  울려


  아아


  산이 깨지고

  우주가 깨지고

 

      -작품 ‘노루귀꽃 숨소리’


  노루귀는 숲속에 사는 들꽃이다. 이른 봄에 잎이 나올 때, 밀려서 나오는데, 가는 털이 많이 돋은 모양이 마치 노루귀를 보는 듯하여 그 이름을 얻었다. 잎이 나오기 전에 꽃이 피는데, 화경(花梗) 끝에 희거나 연한 분홍색의 꽃이 1개씩 위를 향해 웃는다. ‘ 달빛 숨소리 부서지는 골짜기로 노루귀꽃 몸을 연다’가 노루귀의 자생상태를 짐작하게 한다. 그 생명체의 숨소리에 ‘산이 깨지고 우주가 깨진다. 작은 풀포기의 목숨이 위대하기 이를 데 없다.

  

  달․벌레가

  산을 파먹어 들어가서

  그 안에 동그랗게

  몸 꼬부렸다


  달을 먹은 산


  자정 넘은 야밤

  모란꽃 위에 눕다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마당 구석

 

  - 작품 ‘모란꽃 위에 눕다’  전문

 

  모란은 꽃이 크고 아름다워서 ‘꽃 중의 왕’이란 찬사를 부여받는다. 5월에 여러 겹의 큼지한 꽃을 피운다. 꽃빛깔은 보통 자주빛이지만, 개량종으로 빨강, 분홍, 노랑, 흰꽃 등이 있으며, 홑겹의 꽃이 있다. 소담스러운 꽃은 넉넉함을 내보이고 있어서 달 벌레가 파먹은 산마저 껴안을 수 있을 듯하다. 그 꽃 안에 안기고 싶어도 낮에는 그렇듯 산까지 안기는 판이니. ‘자정 넘은 야밤’에야 모란꽃 위에 누울 수 있지 않겠는가.

  이 작품들은 시집 ‘산시’(山詩)에 속한 것들이다. 이 두 작품 외에도 ‘향기’, ‘쇠별꽃’, ‘숨은 산’, ‘꽃 한 송이’, ‘밥 세끼 먹고도’, ‘산이 나비로 변해’ ‘서 있다면서 가는 나무’ 등이 상태시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아이가 가재를 잡으려고

  저녁 산골 개울에서 돌을 뒤집었다


  돌 밑에서 가재가 아니라

  달이 몸을 일으켰다


  일어난 달은 아이를 삼키고

  집채보다 더 크게 자라나서

  동구밖에 섰다


  달의 뱃속에 지금 아이가 산다

 

                         - 작품 ‘신화’


  이 시는 강한 울림이 있다. 먼저 시의 제목이 ‘신화’(神話)로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신화란, 설화의 한 가지로, 국가의 기원이나 신의 사적(事績) 및 유사 이전의 민족사 등의 신성한 이야기이다. 이는, 민족적인 범위에서 전승되는 게 특징이다. 또 하나의 의미는, 많은 사람이 절대적인 것으로 믿고 있는 일을 가리킨다. ‘저녁 산골 개울에서 돌을 뒤집어’ 가재를 잡던 어린 시절이 나에게도 있었다. 그게 이제는 ‘신화’가 되었다. 가재는 그렇게 신화가 되었고, 그 때의 서정은 먼 달의 뱃 속에 산다.

  가재가 놀 때에는 개울의 돌 밑에서 지낸다. 그러나 밤에 잘 때에는 굴 속으로 들어간다. 이들이 파 놓은 굴은 그 깊이가 75㎝나 되고, 굴이 구부러져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입구가 2개 있는 것도 있고, 입구는 하나이지만 안으로 들어가서 두 곳으로 갈라진 곳도 있다.


  비 오는 소리 종일 추녀 밖 허공을 지나

  알 수 없는 곳으로 나는 이끌더니

  비 개자 골목길에 물이 고였다


  빗물에 새로 피어난 개난초

  부끄럽게 고개를 빼고 고인 물 속을 들여다본다

  나도 지나가다가 그 곁에 쪼그리고 앉아

  아무 욕심없이 보고 있다


  그러나 물은 무슨 생각에선지

  따른 것은 다 물리친 채

  개난초 그림자만 수면 가득 펼쳐 놓고 있다


  나비도 들어갈 수 없는 저 곳

  개난초 그림자가 살아 있는 꽃보다 더 또렷이

  피어난

  저 안으로 나는 들어갈 수가 없다

  섭섭한 마음 이기지 못해 끝내 그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밤에 둘은 어떻게 잤을까


  잠을 설치고 이튿날 일찍 그 자리에 가 보니

  물도 없고 그 속에 개난초도 사라졌다

  둘이 야반도주다


  그들이 가서 숨었을 아침하늘 속이

  이슬 묻어 눈부시게 더 푸르다

 

                 - 작품 ‘야반도주’ 전문


  여기서 말하는 ‘개난초’는 어느 난초의 이름이 아니다. ‘개’라는 말은, 일부 명사 앞에 붙어서 ‘참 것이 아닌’, ‘좋은 것이 아닌’, ‘함부로 핀’ 등의 뜻을 나타낸다. 그리고 ‘난초’라고 하면 흔히 ‘난초과의 식물’을 통톨어 이르는 말이다. 절로 나는 것도 있으나, 관상용으로 재배되는 것이 많다.

  나는 여기서 ‘개난초’를 ‘한란’의 그림자 쯤으로 생각하고 싶다. ‘빗물에 새로 태어나는 개난초’의 구절을 읽고, 어떤 사람은 고개를 갸우뚱할지도 모른다. 난초는 그저 물을 싫어하는 식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은 더욱 그럴 것이다. 하지만 난초는 물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숨이 막히는 것을 두려워한다.  한란의 경우를 보면, 그 뿌리에 근피세포가 있다. 이 세포는 적당한 양분이나 수분을 지니고 있다가 뿌리 내부로 전해 준다. 물주기는 심은 재료라든가 햇빛가림의 정도에 따라 듬뿍 물을 주고, 그 외에는 잎을 적셔 주는 정도의 관수를 해준다. 잎에 물을 분무할 때, 너무 오래 뿌리면 흙이 너무 습해져서 근피세포가 썩게 된다. 그러나 물이 완전히 마르면 난초도 생명을 잃게 된다.

  ‘나비도 들어갈 수 없는 저곳’에서 큰 느낌이 온다. 물론 빗물 고인 자리에 이승의 어느 목숨이 자리를 함께 할 수 있겠는가마는, 사실적으로 한란은 초겨울에 꽃을 피우기 때문에 나비가 찾아올 수 없다.

  이 두 작품은 시집 ‘ 내 몸에 우주가 손을 얹었다’ 중에 들어 있다. 이는, 이성선 시인이 마지막으로 펴낸 시집이다. 이 시집 안에는 ‘靑山白雲室詩’, ‘새벽’, ‘소식’, ‘흔들림에 닿아’, ‘벌레’, ‘하늘의 글씨’, ‘미시령 노을’, ‘고요하다’, ‘잎사귀 그릇’ 등이 생태시로 간주될 수 있을 것 같다.


(3)


  앞에서 대략적으로 이성선 시인의 작품들을 살펴보았듯이, 그는 아름다운 자연과 함께 벗하며, 자연을 통해 우주와 대화했다. 그가 그렇듯 자연과 친화적인 시를 쓰게 된 계기는 무엇보다도 그 삶의 경험이 그러했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1941년, 설악산 북쪽이고 금강산 남쪽인 신선봉(神仙峰) 아래 마을에서 태어났다. 행정상으로는,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성대리 226번지이다.

  6.25때, 부친은 북으로 가시고 모친 아래에서 성장했으며,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까지 그 곳에서 다녔다. 그는 원래 아명이 이진우(李珍雨)였는데, 1957년 수복지구 호적 복원에 따라 이성선(李聖善)으로 바꾸었다.

  그 후, 1961년에 그는 고려대학교 농학과에 입학하고, 그로 인하여 나와 만나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2학년에 진학하고 얼마 안 되어  학보병으로 입대했다.

  군대에서 제대한 그는, 학교에 복학하여 학업을 마치고 농업진흥청 연구직 4급 을류 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하였으나, 시를 쓸 결심으로 고향으로 낙향하여 농업교사로 있으면서 시의 창작에 몰두하였다.

  그의 경력이 이러하니, 그가 쓴 작품마다 이렇듯 살아 숨쉬는 생생한 생태시가 되지 않았는가 한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 엿보았듯이 ‘생태시’를 의식하고 작품을 쓴 적은 한 번도 없었음이 분명하다. 그저 마음이 그 곳에 머물러 있었기에 무의적으로 그런 시가 탄생되었을 터이고, 내가 작품을 의도적으로 묶어 본 데에 지나지 않는다. 어쩌면 그는 생태 쪽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을 수도 있다. 그가 바라보는 곳이 하늘 저 쪽의 우주를 향한 믿음이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그토록 외로워하고 있었던 것일까?

  

  나는 너무 오래 사는 것이 아닐까 

  조지훈도 내 나이에 죽고

  김수영도 이 나이에 떠나고

  박정만은 더 젊어서

  임홍재는 더욱더 일찍 갔는데

  나는 여기 이 땅에

  무슨 시인으로 바라

  남아 있을 것이냐

  바다를 보고 섰다가

  다시 풀밭길을 걸으며

  저무는 큰 산 아래 돌아와

  풀잎 같은 마음 불을 켜고 시를 쓴다

  눈물 한 줌과도 다른

  내 삶의 작은 등불

  아름다운 사람들은 모두 가서 하늘에

  별이 되어 묻혔는데

  외로운 시를 쓰고 나서

  다시 풀밭에 나가 별을 쳐다본다

 

  - 작품 ‘풀밭에서 별을 쳐다보며’ 전문


  나는 이 시를 읽으며 나도 모르게 눈물을 주루룩 흘렸다. 이 시는 1998년에 씌어진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내 문학의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조지훈 선생님은 49살에 타계하였다. 물론, 김수영시인도 그렇고, 박정만 시인이나 임홍재 시인도 모두 그렇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시인으로 깨끗하게 살기 어려운 이 세상에서 훌쩍 떠날 수 있는 일이 어쩌면 큰 행운일지 모른다. 사람의 일생이란, 얼마나 사는가에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 어떻게 사는가에 그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이성선 시인은 속초에서 시를 창작했다. 한번은 그의 집에 방문했는데, 2층 그의 서재에서 밖을 바라보니 설악산이 한눈에 들어왔다. 내가 ‘설악산을 안고 사니 얼마나 좋으냐?’ 고 했더니, 그는 그저 하얗게 웃기만 했다. 나는 그에게 설악산에 많이 자생하는 들꽃인 ‘솜다리’를 그에게 선물했다. 왜 그는 ‘솜다리’와 같은 이미지를 지니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내 저서인 ‘들꽃과 시인’에 상세히 밝혀 놓았다. 그의 몸은 이미 한 줌의 재가 되어 설악산에 뿌려졌다고 한다. 이제는 별 수 없다. 그를 문득 만나고 싶을 때는 설악산으로 달려갈 수밖에… 그리고 한 그루의 솜다리라도 찾아서 그 동안 못 다한 이야기라도 나눌 수밖에…. 늘 머리맡에 그의 시집을 놓고 잠들면, 언젠인가는 그가 꿈에라도 찾아와서 시의 이야기를 하자고 조를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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