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평론4

시조시인 2005. 9. 19. 18:45
  (시수레 동인지 후기)


                  시(詩) 실은 수레를 끄는, 들꽃 같은 시인들


                                                                                               김 재 황(시수레 고문)


 어두운 밤하늘에는 반짝이는 별이 있어서 아름답고, 바람 부는 들녘으로 나가면 쳘 따라 향기로운 꽃들이 피어나기에 아름답다. 어디 그뿐인가. 늘 외로움에 떨고 있는 우리의 가슴에는 시가 있어서 아름답다.

 어떤 사람은 우리나라에 시인이 너무 많다고 투덜댄다. 이는, 이 세상에 꽃이 너무 많다고 불평하는 것과 같다. 산이나 들에 꽃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듯, 이 땅에는 시인이 많을수록 좋다. 다만, ‘시인’이라는 이름을 지니고, 시인다운 삶을 살지 않는 게 문제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작품(詩)을 지었다고 할지라도, 그 삶이 시인답지 못하다면, 그는 가짜에 불과하다. 그 반면에, 시는 별로 뛰어나지 못하다고 하더라도, 그 마음과 행동이 순수하고 아름답다면, 나는 주저 없이 그를 ‘시인’이라 부른다.

 게다가, 시인이라면 ‘선비’인데, 지조를 헌신짝처럼 버리고도 시인 행세를 하는 사람이 더러 있다. 선비가 그 지조를 잃으면 목숨을 잃는 것과 같건만,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사람이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만남’처럼 귀중한 게 없다. ‘그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듯, 누구와 사귀는가는 그의 삶에 귀중한 요소가 된다.

 몇 년 전, 아름다운 시심을 지닌 몇 사람들이 만나서 동인회를 만들었다. 처음에는 그저 문인들끼리 우정을 나눌 목적으로 그 이름을 시,술,해(詩,酒,海)라고 불렀다. 그런데 듣기에 따라서는 ‘시수레’(詩를 싣고 가는 수레)라고 들렸고, 모두 그 이름이 좋다고 하여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 그들은 모임이 있을 적마다 나를 불러 주었고, 나는 즐겁게 그에 응했다. 그 동인 하나 하나가 들꽃처럼 순수한 이미지를 지니고 있기에, 나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꽃밭에서 놀다가, 헤어지고 나서는 겅중겅중 전철역으로 뛰어가야만 했다.


 회장으로 이 모임을 이끌고 있는 고상원 시인은, 양반의 풍모를 지닌 사람이다. 말이 적고, 걸음걸이도 느긋하다. 그렇지만, 그 가슴은 넓고 넉넉하다. 리더의 자격을 갖추고 있다.

 나는 그를 만날 적마다, ‘노랑붓꽃’을 생각한다. 노랑붓꽃은, 금붓꽃과 비슷하지만, 잎이 보다 크고 나비가 이삼 배나 되며 꽃은 언제나 두 개씩을 보인다. 그 두 개의 꽃. 하나는 시심의 꽃이요, 다른 하나는 사업의 꽃일 성싶다. 붓꽃은 그 꽃봉오리가 붓처럼 생겼기 때문에 그 이름을 얻었는데, 고상원 시인에게서도 묵객의 묵향을 맡을 수가 있다.


 어둠 속에서/ 비구니의 기도 울려 퍼진다// 금산보다 큰 울림인지라/

 만물이 깨어나지 않을 수 없다

                                                                   ---작품 ‘기도’(남해, 보리암에서) 중에서


 어둠 속에서 올리는 비구니의 기도. 이는 별빛과 같이 내 어두운 마음에 뜬다. 그 울림이 어찌나 큰지, ‘금산’보다 크다고 했다. 그러니 어찌 만물이 깨어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가슴에 만물을 껴안지 않고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시구(詩句)이다.

 고상원 시인의 출생지는 충남 당진이다. 그의 마음처럼 넓은 들이 펼쳐져 있는 곳이다. 그는 카나다로 유학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는 말이 있고, 언제인가는 젊은이들을 위한 보다 알찬 경제잡지를 발행하는 게 꿈이라고 한다.


 모든 모임에는 무엇보다도 총무의 역할이 중요하다. 어떤 사람이 총무를 맡느냐에 따라, 그 모임이 잘 되기도 하고 못 되기도 한다. 다행이 ‘시수레 동인회’의 총무는 너무나 훌륭하다. 행동이 부지런하고 마음이 온유하다. 좋은 일이든지 나쁜 일이든지를 가리지 않고, 모든 동인들을 마음으로 감싼다. 하지만, 수수한 겉모습과는 달리, 그 마음은 불꽃처럼 뜨겁다. 서정의 고은 물이 곱게 들어 있다.

 그래서 총무 안미숙 시인의 이미지는 ‘물봉선’에 비유될 듯하다. 물봉선은 냇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다. 꽃은 8월이나 9월 경에 피고, 홍자색(紅紫色)을 띤다. 양쪽의 큰 꽃잎은 그 길이가 3㎝에 이르고, 넓은 거(距)를 지녔다. 이 ‘거’는, 꽃잎 뒷면에 있는 ‘닭의 며느리발톱’처럼 생긴 돌기를 말한다. 이 것으로 물봉선은 거센 바람을 피하여 꽃잎을 보호할 수 있다. 그만큼 지혜를 지닌 꽃이 물봉선이다. 이 꽃 또한, 열매가 익으면 봉선화처럼 터지면서 씨가 밖으로 튀어나온다. 그처럼 안미숙 시인도 박력이 있다.


 어둠은 해의 씨를 뱉어내고 있다/ 관 두드리는 소리/

 눈을 떠라! / 축제의 시간이다

                               ---작품 ‘섬진강 가을’ 중에서


 ‘해의 씨를 뱉어낸다’는 시구가, 금방 물봉선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눈을 떠라!’라고 하는 외침이 얼마나 큰 힘을 지니고 있는가. 그 가슴에 뜨거운 불덩이를 지니고 있지 않고는 결코 외칠 수 없는 말이다. 부친께서 바이올린을 즐겨 켜셨다고 하는데, 그 영향을 받은 때문인지, 안미숙 시인의 가슴에는 ‘신바람’도 가득하다.


 이춘 시인은 매우 몸놀림이 가벼운 분이다. 그뿐만 아니라, 성실함이 몸이 배어 있는 분이다. 내가 자유문학의 일에 몸담고 있을 적만 하여도, 이춘 시인은 자주 들러서 어려운 일을 많이 도와 주었다. 그는 나를 만날 때마다 빙긋이 웃는다. 그 미소가 어쩌면 그리도 정답게 느껴지는지, 그 미소를 다시 보려고 나는 짐짓 싱거운 소리를 하곤 했다.

 이춘 시인을 들꽃에 비유한다면, ‘큰구슬붕이’가 적당할 것 같다. 큰구슬붕이는 숲 속에서 사는데, 두해살이풀이다. 꽃은 5월부터 6월까지 피며, 그 빛깔은 자줏빛이 돈다. 그만큼 짙은 서정을 지니고 있다. 화관(花冠)의 길이는, 길면 25㎜에 이른다. 꽃받침보다 2.5배나 길 때도 있다. 큰구슬붕이뿐만 아니라, 구슬붕이나 봄구슬붕이 등을 만날 때면, 누구나 그 미소에 마음이 끌리게 된다.


 언제 너에게/ 따뜻한 말 한 마디 들려주었던가/

 네가 울고 있을 때/ 손 한 번 제대로 잡아주지 못했는데,

                                              ---작품 ‘노을’ 중에서 

             

 이 시구 하나로도 이춘 시인의 따뜻한 마음을 넉넉히 읽을 수 있다. 남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받아들이려는 마음. 이게 바로 시인의 마음이 아니겠는가.  이 시의 마지막 2행 ‘내 얼굴이 붉은 것은 부끄럽기 때문이다’는 노을의 얼굴이기 이전에, 이춘 시인의 얼굴이다. 바로, 큰구슬붕이의 짙은 노을빛 얼굴이다.

 이춘 시인의 부인은 신앙심이 깊은 분이다. 집안이 화목하면 만사가 형통한다. 이춘 시인은 한때 그림에도 열중했다. 그러나 요즘에는 시에 모든 힘을 기울이는 듯해서 나는 여간 기쁘지 않다. 이춘 시인의 본명은 ‘이춘우’이다. 문단의 선배 중에 같은 이름을 지닌 분이 계셔서 ‘이춘’이라는 필명을 사용한다.


 시수레 모임에 나가면, 언제나 그 자리가 환하다. 왜 그런가 하고 주위를 살피면, 어김없이 그 곳에 김두녀 시인이 앉아 있다. 김두녀 시인의 모습은, 한 마디로 표현해서 ‘부잣집 맏며느리’이다. 그를 보면, 금방 누구나 ‘동산에 뜬 보름달’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니 어찌 그 자리가 환하지 않겠는가. 얼굴뿐만 아니라, 그 마음도 달덩이처럼 둥글고 밝다.

 들꽃 중에서도 그러한 얼굴을 지닌 게 있다. 바로, ‘백작약’이다. 백작약은 산지에서 자라는 여러해살이풀이다. 키는 50㎝쯤 되고, 잎은 서너 개가 호생(互生)한다. 6월 경, 꽃은 가지에 하나씩 피는데, 그 이름처럼 희다. 꽃은 비교적 커서 지름이 5㎝나 된다. 보면 볼수록 ‘달덩이 같은 꽃’이다. 뿌리 또한 하얗고, 약재로 사용한다.


 작은 충격에도 그만 깨지고 마는/ 아슬아슬한 유리항아리는/

 그저 바라보고만 싶은 내 친구

                                             ---작품 ‘유리항아리’ 중에서


 백작약의 그 흰 마음이 이 시에 잘 나타나 있다. 얼마나 친구를 아끼었으면, 깨질까 봐 아슬아슬해서 그저 바라보고만 싶겠는가. 그러니 백작약은 남의 아픔을 치료해 주는 약재가 되지 않으면 안 되었으리라.

 김두녀 시인의 고향은, 여류 시인 매창이 살았던, ‘부안’이다. 김 시인의 부친께서는 그 고장의 풍류를 지닌 선비로서 ‘시조창’을 즐기셨다고 한다. 가세도 넉넉하여, 김시인은 ‘부잣집 딸’로 온 가족의 사랑을 받으며 곱게 자랐다. 그 후 파일럿과 결혼하여 단란한 가정을 이루었다. 그는 지금, 카톨릭 교인으로 마음에 달덩이 같은 믿음을 지니고 있으니, 앞으로 더욱 맑고 밝은 작품을 보여줄 수 있으리라고 나는 믿는다.


 동인 중 이희원 시인은 내가 동생처럼 아끼는 시인이다.  우선 보기에 눈길이 시원해서 정을 지니게 한다. 또 마음의 씀씀이가 얼마나 넉넉한지, 그렇듯 바쁜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주위 사람들을 줄곧 챙긴다. 같은 고향(파주) 사람이라 각별한 정을 느끼는 게 사실이지만, 사랑 받고 사랑 못 받기는 그 모두가 그 행동에 달린 것이다.

 그처럼 자상한 마음 때문인지, 이희원 시인을 만나면, 불현듯 ‘섬초롱꽃’이 떠오른다. 초롱꽃은 주로 산이나 들의 풀밭에서 만날 수 있지만, 섬초롱꽃은 바닷가의 풀밭에서 만날 수 있다. 즉, 섬초롱꽃은 울릉도의 특산종이다. 바다를 가슴에 안고 사는 ‘섬초롱꽃’은. 그 잎새 또한 넓다. 그러므로 넓은 마음을 생각하기에 충분하다. 꽃은 6월부터 7월까지 피는데, 연한 자줏빛 바탕에 짙은 반점이 있다.


 어머니 자궁에서 이 세상으로 하강하는 때 불었던 그 바람은 어딘가에

 꽁꽁 숨어 있다가 그것에 빠질 때면 사정없이 달려드는 것일까

                                             --- 작품 ‘그렇게 온다, 사랑은’ 중에서

 

 섬초롱꽃을 울릴 수만 있다면, 그 여운(餘韻)이 어느 것보다도 길 거라고 늘 생각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희원 시인의 사랑에 대한 의미는 그 여운이 길다. 그는 지하철역에서 전동차를 기다릴 때, 차보다 먼저 귀때기를 때리며 오는 바람을 사랑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 바람은 어머니 지궁에서 이 세상으로 하강할 때에 불었던 바람이라고 여긴다. 사랑은 그렇듯 예감적이고 원초적이라는 뜻이 아닐까. 그 바람은 모든 걸 빨려들게 하는데, 자동제어장치가 고장나 있기 때문에 멈추게 할 수가 없다는 이야기이다. 그 사랑의 불가항력적(不可抗力的)인 울림이 가슴에 닿는다. 이는, 섬초롱꽃의 울림이기도 하다. 이희원 시인의 부인은 화가이다. 시인인 남편과 화가인 아내, 참으로 어울리는 부부이다.


 박경신 시인은 야무지다. 남의 말을 들을 때는, 초롱초롱 눈을 밝히며 귀를 기울인다. 한 마디의 말도 그냥 넘겨 버리지 않겠다는 듯이. 그만큼 날카로움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 다정한 마음을 안다. 겉으로는 그러하게 시린 면이 있는 듯하지만, 막상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누어 보면 그보다 겸손하고 예절 바른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이다.

 그러면, 박경신 시인은 어떤 들꽃과 같을까. 나는 ‘얼레지’를 꼽아 본다. 얼레지는 주로 높은 산악지대에서 사는 여러해살이풀이다. 고고함이 공통적이다. 그리고 인경(鱗莖)을 지니고 있는데, 이를 약용으로 한다. 봄철에 긴 꽃줄기가 나오고, 땅 가까이에 2개의 잎이 달린다. 잎에는 초록 바탕에 자줏빛 무늬가 있다. 꽃은 4월에 핀다. 꽃잎은 6개이고 바소꼴이며, 자줏빛이고 뒤로 말린다. 아마도, 이 꽃이 날카로움을 지녔고 그 빛이 자줏빛이기 때문에, 사물을 꿰뚫어보는 박경신 시인을 생각하게 되는 듯싶다. 게다가 그 꽃잎이 활짝 피면 뒤로 말린다는 사실이 더욱 그렇다.   


 그녀는 오늘도 빈틈없는 가면을 쓰고 나가 탈을 뒤집어 쓴 광대들과 하루치 공연을 한다.

 가면에 익숙한 광대들 앞에서 가면을 벗는 건 반칙이다.

                                              ---작품 ‘화장은 지우는 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에서


 이 작품은 ‘허식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을 꼬집고 있다. 그런데 ‘가면’과 ‘탈’이 묘한 뉘앙스를 풍긴다. 나는 ‘가면’을 쓰고, 광대들은 ‘탈’을 썼다. 분명이 ‘가면’과 ‘탈’은, 그 글자가 다른 만큼의 차이를 지닌다. 박경신 시인은 이처럼 보는 눈이 날카롭다.

 우리는 가면을 벗고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 그걸 그가 왜 모르겠는가. 그러나 박경신 시인은 짐짓 “광대들 앞에서 가면을 벗는 건 반칙이다”라고 크게 외친다. 마치, 뒤로 뒤집혀 있는 얼레지 꽃잎을 보는 성싶다. 이러한 역설적(逆說的)인 표현이 자줏빛을 띤다.

 그 내면에 자줏빛 아름다운 서정을 가득 감추고 있는 박경신 시인. 나는 그의 가면 쓴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는 안으로 남몰래 긍휼을 베푼다. 이 또한, 얼레지의 비늘줄기가, 옛날의 배고픈 보릿고개 때에 양식이 되기도 했고, 아픈 사람들을 위한 약재가 되기도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본다. 박경신 시인은 결혼보다 공부를 택했다. 지금은 한문 분야의 박사학위 과정을 밟고 있는 중이다. 

                  

 들꽃은 작으면 작은 대로, 크면 큰 대로, 저마다 귀한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그 꽃빛깔이 븕으면 붉은 대로, 희면 흰 대로 아름다움을 지닌다. 결코, 들꽃은 우열을 가릴 수가 없고, 또 가려서도 안 된다. 아무리 조화가 아름답다고 한들, 한 포기의 작은 들꽃에 비할 수 있겠는가.   

 그저 동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열심히 저마다의 꽃을 피우면 된다. 그 꽃이 순수하고 진실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자연히 향기를 머금게 될 것이고, 이 세상을 환하게 밝힐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게 시인의 길이요, 또 삶이라고 나는 믿는다.

 지금 이 자리에서 나는 어쩐지 마음 한 쪽이 허전함을 느낀다. 그 이유는 아마도, 이 동인지에 작품을 제출하지 못한 동인이 있기 때문일 성싶다. 다음 번에 두 번째의 동인지를 펴낼 때에는 모든 동인이 참여하여 주기를 간곡히 당부해 마지않는다.  (2004년 봄)

'평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평론6  (0) 2005.09.20
선비의 모습을 간직한 금붓꽃  (0) 2005.09.20
별처럼 빛나는 ‘생태시인 이성선’   (0) 2005.09.04
평론2  (0) 2005.09.03
평론1  (0) 2005.09.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