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평론8

시조시인 2005. 9. 22. 15:39
 

    열정이 머무는 시심의 자리

 

 

     김 재 황


  (1)

  시인의 시선은 때로는 아주 멀기도 하고 가깝기도 하다. 또한 넓기도 하고 좁기도 하다. 한 가슴에 우주를 품을 수도 있거니와, 때에 따라서는 작은 들꽃 한 송이에게 온 마음을 내어 주기도 한다. 사실은 그 대상이 멀거나 가깝거나, 또 크거나 작거나 그게 문제될 일은 아니다. 다만 그 사랑이 얼마나 뜨거운가가 관심의 대상이 될 뿐이다.

  나는 최근에 2권의 시집을 받았다. 하나는 김경수 시인의 시집 ‘콧구멍 청소의 날’이요, 다른 하나는 이성교 시인의 ‘東海岸’이라는 시집이다.

  두 시인 모두가 한국기독교문인협회에 소속되어 있으므로, 그 시심의 빛깔이 비슷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두 시집을 모두 읽고는 깜짝 놀랐다. 우연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두 시집이 기막힌 대조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시심의 빛깔이 아니라, 두 시인의 시선이 머무는 자리, 즉 그 사랑의 대상이 너무나 닮은 얼굴을 지니고 있기에 그렇다.


(2)

  시집 ‘콧구멍 청소의 날’에서 김경수 시인의 시선은 ‘조국’에 머물러 있다. 그것도 그냥 조국이 아니라, 질주하는 인간의 구조물들이 아름다운 강산의 숨통을 막아놓은, 병들어 괴로워하는 조국인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이성교 시인의 시집 ‘東海岸’에서 그의 시선은 ‘고향’으로 향해 있다. 물론, 시집 제목에서 나타냈듯이, 이성교 시인의 고향은 ‘동해안’이다. 더욱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강원도 삼척의 한 바닷가 마을인 ‘月川里’이다.

  ‘조국’과 ‘고향’. 그 주제가 선명하여 좋은 비교가 된다. 그뿐만 아니라, 그 핵심을 짐작하게 하는 시들이 있다.



      뱃가죽에 목줄 붙은 분단의 조국이여

      죽이고 또 죽어도 끝나지 않는

      그래서 흩어진 뼈, 쉴 새 없이 파고드는

      피붙이의 슬픔이여

      뒤틀리고

      아우성치며, 또 그래서

      남남이 된 원통한 밤이여.


      만질수록 쓰디쓴 자욱들

      생피 코를 찌르고

      갈수록 높아지는 벽의

      낯선 얼굴들이여.


                                  김경수 시인의 ‘휴전선을 바라보며’




      삼산골 큰 어머니

      인정이 많아

      늘 기름기가 돌았다

      때로는 찬 바람에

      얼굴이 허옇다.


      장터 거리에

      온갖 마세가 일어도,

      남의 일인 양

      늘 태연했다.


      제방 넘어

      파도 소리 들려도

      늘 마음 속에

      꽃을 가꾸었다.


      큰 伯母님

      산을 늘 업고

      산의 숨소리를 들어

      뜰 앞 과일 나무를

      소담스럽게 가꾸었다.


      날에 날마다 마음을 맑게 하여

      산바람에 눈을 씻고

      귀를 씻었다.

                                   이성교 시인의 ‘삼산골 큰 어머니’


  김경수 시인의 조국, 그 아픔은 휴전선에 그 뿌리가 닿아 있다. 휴전선은 분명히 잘못 태어난 것이며, 화석이 되어가는 슬픈 눈물의 대상이기도 하다.

  한편, 이성교 시인의 고향, 그 중심은 인정이 많은 큰 어머니에게 있다. 제방 넘어 파도 소리가 들려도 늘 마음 속에 꽃을 가꾸던 큰 어머니. 언제 찾아도 그 품을 열어주는 큰 어머니야말로 고향의 이미지를 듬뿍 지녔다.

  그렇다면 김경수 시인의 ‘조국’과 이성교 시인의 ‘고향’에는 어떤 추억이 담겨 있을까.



      차라리 배고팠던 날들이

      그리워지고 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어도

      홀로라도 우뚝 솟은

      하늘이 하늘에 닿아 있고

      바다가 바다를 부르는 바람소리

      가난해도 서로 나누어 먹던

      그 때가 푸른 마음밭으로 떠오르고 있다.


                                  김경수 시인의 ‘차라리 배고팠던 날들이’


      워낙 아버지를 많이 닮아

      키가 작고 땅딸막했다

      워낙 어머니를 많이 닮아

      말이 없고 눈물이 흔했다.


      아득한 물나라

      안개비 나라

      날마다 濟州島 생각에

      눈은 늘 바다에 가 있었다.


      二月 초하루

      잔나비를 닮아

      눈이 깊었고

      늘 쏘다니기를 좋아했다

      그래서 늘 뽕나무 밑에서

      종기발을 앓았다

      그럴 때마다 개구리가 앞에 와

      慰勞해 주었고

      성황당 소나무가 할머니처럼

      빙긋이 웃어주었다.

                                  이성교 시인의 ‘幼年記’



  김경수 시인은, 잘 먹고 지내는 지금보다는, 차라리 배고팠던 시절의 조국을 그리워한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가난해도 서로 나누어 먹던, 그 풋풋한 인정이 그때는 넉넉했었기에 그런 듯싶다. 부정과 부패가 만연되고 있는 조국의 현실에 대한 아픔이 역력하게 드러난다.

  이성교 시인의 고향에는 자연과 벗할 수 있었던 즐거움이 담겨 있다. 그래서 이곳 저곳울 돌아다니느라 종기발을 늘 앓곤 했지만, 위로해 주는 개구리와 할머니처럼 빙긋이 웃어 주는 성황당 소나무가 있었기에, 그런 괴로움은 능히 참을 수 있었노라고 이 시인은 노래한다.

  참으로 두 시인의 열정은 대단하다. ‘조국’과 ‘고향’에 관한 시는 수를 헤아릴 수도 없이 많다. 하지만 나는 여지껏 이 두 시인에게서처럼 뜨거움을 느낀 경우는 그리 흔하지 않다.


      이제부터 나는 너를 눈물로 기다리던 나의

      사랑하는 아내라고 부르리라

      힘 없고 가난하여 짓눌리고

      짓밟히다가 먼 길에서 돌아온

      내가 사랑하는 나의 신부 나의 아내라고


      누가 뭐래도

      이 세상 모두가 외면한다 해도

      나는 변치 않는 사랑과 믿음으로

      오로지 너만을 노래 중 노래

      사랑하는 나의 신부

      나의 아내라고 부르리라.


      다시 구박하지도

      억울한 굴레 씌워 내몰지 않는……


                                  김경수 시인의 ‘조국이여 나의 신부여’




      달밤에 이상한 얼굴로

      돌아간 사람들

      뒤안 몰래 속울음 운 부초꽃은

      그 역사를 알고 있다.



      후리여! 후리여!

      시퍼렇게 열리는 솔가지가

      마구 흔들린다.


      온 바다를 덮는 그림자 속에

      더러운 욕들이 뚝뚝 떨어진다

      갈매기는 죽도록 울고……


      하얀 모래더미가 있는 갯목엔

      웬 이상한 소리 들린다

      柯谷川의 怨恨이 물로 다 풀려서

      내려오는 탓인가.


      月川은 끝까지 달을 퍼올리는

      굿을 하고 있다.


                                  이성교 시인의 ‘月川에서’



  정말이지, 우리는 조국의 품에 안겨서 살아 왔고, 또 지금도 살고 있다. 그 관계가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인 것이다. 그러나 김경수 시인은, 조국은 나의 신부라고 소리 높이 외친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일심동체의 관계를 지향한다. 조국에 대하여 이보다 더한 사랑이 어디에 또 있겠는가. 김 시인은 또 노래한다. 어둠 걷히어 가득찬 보석의 탐스런 몸매, 미움은 죽이고 살성을 풀어 유난히 푸른 하늘, 펄럭이는 하나의 마음 펴보이며 깊이 안기라고 다시 외친다.

  이성교 시인이 노래한 ‘月川’은 그의 고향 저쪽 한켠으로 흐르는 제법 큰 냇물이다. 그의 고향에는 그밖에도 서정이 깃든 곳이 많다. 즉, 시퍼런 다랭이들이 펄펄 뛰던 ‘竹邊’, 봄 되면 달맞이꽃이 은연스럽게 피던 ‘富邱’, 여름이 아닌데도 아래 구석엔 늘 깃발이 날리던 ‘羅谷’, 세상에 더 없는 미역 숲이 다가오던 ‘枯浦’, 토닥이는 파도로 가슴이 파래지던 ‘湖山’, 뭍으로 양미리가 꾸역꾸역 밀려들던 ‘鵲津’, 언덕받이에 피묻은 깃발 펄럭이던 ‘龍化’, 늘 숨어서 큰 힘을 키우는 ‘草谷’, 속을 터놓은 사람들이 사는 ‘莊湖’가 바로 그 곳들이다.

  물론, 두 시집에는 신앙이 밖으로 드러나 있는 시도 보인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

      죽은 아벨이 또 가인을 죽이며

      이어지는 화려한 족보자랑 나라 망치고

      망해 가는 집안

      큰 문패 달아

      아무도 얼씬거리지 못하는

      성역, 늘어만 가는

      동상

      꽃바구니에는

      꽃도 없는데 왕벌 무당파리 모이고

      높아가는 호령에 따라

      모였다 흩어지는 깨진 배들

      노아의 방주를 찾고 있다.


                                  김경수 시인의 ‘노아의 방주’




      동해의 바닷가

      조그마한 마을에

      새 소식이 왔습니다.

      큰 빛이 왔습니다.


      언덕위 교회당의 십자가가

      유난히 더 높습니다.


      그것은 오랫동안

      바다가 잔잔한 목소리로

      간구한 탓이지요.


      예수님 오신 날 밤

      바다가 새 얼굴로

      노래합니다

      노엘 노엘 이스라엘 왕이

      태어났다고―


      모랫바람을 막던

      울타리가에도

      기쁜 소식이 왔습니다.

7

      말랐던 나무들도

      제각기 미소를 띄고

      무엇을 바라고 있습니다.


      고기가 안 잡혀

      울상을 한 사람들도

      모두 다 얼굴이

      확 피여지고 있습니다.


      바다도 아울러

      속을 다스리는 마음으로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습니다.


                                  이성교 시인의 ‘漁村 크리스마스․2’



  여호와께서는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한탄하셨다. 그래서 홍수를 내려 그분이 창조한 사람을 지면에서 쓸어 버리실 때, 노아로 하여금 방주를 만들도록 해서 은혜를 내리셨다. 그때 그 방주를 만든 재료는 잣나무이며, 그러므로 잣나무가 직접적으로 우리를 구원한 셈이 되는 것이다. 허나 현실은 탐욕만 무성할 뿐, 나무들은 곳곳에서 무참히 훼손되어 가고 있다. 또다시 여호와께서 징벌로 큰 홍수를 내리시게 된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방주를 만들어야 할 것인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크리스마스는 역시 즐거운 날이다. 순결을 상징하는 흰 눈이 내리고, 산밑 교회당에선 아침부터 풍금 소리가 울린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아이들의 목청이 한결 영글었다. 붉은 외투에 흰 수염을 휘날리는 산타 클로스의 선물을 받을 수 있어서 좋았던 기억이 있다.

  조국을 살리는 방주와, 고향을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크리스마스. 구원을 위한 기도와 은혜에 대한 찬양이 두 시집에서 또한 기막힌 대조를 이룬다.

  더욱 놀라운 일은, 두 시인이 두 시집에서 노래한 ‘조국’과 ‘고향’에 대한 사랑이 맹목적이지 않다는 데에 있다.



      우리에게도 정말 가슴 뭉클한 겨레의

      만남이 있어야겠다

      휴전선도 열어 놓고 가시 철망도

      떼어내고

      맺힌 한의 검은 피 쏟아 내며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드는

      기찬 웃음

      다시 떠오르는 햇살 골고루

      있어야겠다

      흩어진 핏줄의 흩어진 모래알 모아

      터 닦고 높은 성 쌓아

      새 집 짓는

      마음 뿌듯한 좋은 날씨

      한번 잘 갠

      하늘이 있어야겠다.


                                  김경수 시인의 ‘새 집’




      누가 언덕배기에

      어설픈 집을 지었나.


      맑은 바람 속에

      햇빛 속에

      또 하나의 역사를

      수놓고 있다.


      떠났던 사람들도

      다시 눈감고 돌아오고,


      제길로 흐르는 물도

      유난히 옥타브가 높다

     「고향으로 가네

      고향으로 가네.」


      그리운 사람의 얼굴도

      울타리에 많이 걸려 온다.


      해는 자꾸 떨어지고 있는데

      陰府에서는 까치들이

      큰 역사를 하고 있다.


                                  이성교 시인의 ‘섣달 까치집’




  반드시 도달해야만 하는 곳, 그 목적지는 앞의 시에서 밝혀져 있다. 분단된 우리 조국의 염원은 통일이요, 점점 외로움이 더해가는 고향에의 꿈은 귀향임이 분명하다. 다른 설명을 더 필요로 하지 않는다.


(3)

  두 시집은 개성이 뚜렷하다. 그러면서도 친구처럼 나란히 걷는다. 징검다리를 건너듯, 정확한 걸음을 옮기고 있다. 그렇기에 눈으로 볼 수 있는 아름다운 모습뿐만 아니라, 코로서도 느낄 수 있는 향기를 맡게 한다. 그것은 모두가 순수성에서 비롯된 것일 성싶다. ‘조국’과 ‘고향’을 사랑의 얼굴로 택한 것 자체가 그렇다는 것이다.

  그분께서도 ‘어린아이처럼 되지 않고서는 나에게로 올 수 없다.’고 말씀하셨지 않은가. 크리스찬으로서, 그리고 시인으로서 지닌 맑은 영혼이 이 두 권의 시집에 꽃으로 가득 피어나서 은은한 향기를 전한다.

  꼭 ‘조국’이나 ‘고향’이 아니라도 좋다. 누구나 그 가슴에 지극한 사랑의 얼굴을 하나 품고서 살아간다면, 아무리 눈보라 휘날리는 한겨울에도 추위를 느끼지 않을 것이다. 달 뜨는 외로움의 긴 밤에도 그리움의 질긴 아픔을 견딜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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